제가 지금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는 중입니다. 워낙에 게을러서 금년 3월에 학교에 있는 줄 알고서도 이제서야 읽고 있는 중이죠,,,이걸 빌려놓고도 언제 다 읽을지,,,(워낙에 게으르니까요...게다가 다음주 까지 시험기간이라,,요즘은 거의 못봅니다.)
읽다보니 이정기님 말씀대로 김상 선생님의 삼한백제론이 김성호 선생님의 비류백제론에서 거의 나왔다라는 것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조금씩 얻은 바도 있구요.(그런데 비류백제가 있었다면 그 위치가 충청 전라였다는 김성호 선생님의 가정에는 저는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왜냐면 온조왕 초기 기사에 보이는 마한에 대한 사신 기록이 10여년 후에 있는 것으로 봐서 비류가 온조와 더불어 나라를 세운 곳이 마한이 아닐 닐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류에게서 온조가 독립하고 비류가 또 다시 대륙에서 한반도로 왔다면 중국측에서 그에 따른 기사의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류로 추정되는 구태가 대방고지 - 이때의 대방고지는 공손도가 대방군을 세우기 훨씬 전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 나라를 세웠다는 말에 더욱더 비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을 가능성을 점쳐봅니다. 아직은 제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는 단계라 제 가정이 완벽히 맞다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읽다가 한가지 혼란이 온 것은 책의 뒷부분(읽다보니까 중간은 보지도 않고 뒤쪽에 내용 일부를 좀 봤습니다.)
바로 진한의 위치에 대한 것이었는데 읽어보니까 진한이 경기, 강원에 있다고 하시더군요. 이 가설이 두계 이병도의 가설과 같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서울이라는 고대 지명이 서라벌이며 그 때문에 신라인들의 전신이 되는 진한사람들이 한때 나마 이곳에 머물렀다는 가정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유물 출토 여부는 어디까지나 사료상의 자의적 해석일 수도(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있기 때문에 유물 출토는 일단 배제했는데 그렇게 되니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지금은 약간의 갈피는 잡고 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시험기간이라서 그간 실마리를 잡았던 것도 다 까먹어서 방학되면 다시 이거 가지고 골치를 썩여야 할것 같습니다.
어쨋건,,,그 문제 많은 김성호 선생님의 책,,,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라는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저는 책 제목보고 바로 살 결심을 버렸습니다...제목 부터가 맘에 안들은 것이죠,,,나중에서야 마음을 고쳐먹고 제목이 예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서 유교 비판을 했던 것 처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평과 선생님의 비판을 보니,,,살 생각이 싹 사라지네요,,, 잠시 서평을 읽어보니,,,
우리에게는 곰 숭배 신앙이 없다는 둥 - 곰을 미련퉁이로 보는 근세 조선의 풍습을 두고 한것 같네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근세일 뿐 지명에 있어서 곰, 고마계 지명이 나옵니다. 물론 저는 이 곰, 고마를 지신인 감으로 보는 입장이지만요 - 단군신화에 보이는 쑥을 먹는 곰이 있을 수도 없다는 둥 - 만약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완전 말도 안되는 코메디라는 소리인데,,,어디까지나 한자 해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문헌에 보이는 쑥과 마늘,,여기서의 쑥은 작고하신 임승국 교수님의 견해로는 그냥 쑥이 아니라 태워서 소독을 하는 쑥향(일주라고 해서 한자 해석상 향으로 해석함이 옳다고 하시네요)일 것이며 마늘은 단군신화가 나오는 시기인 기원전 24세기경에는 보이지 않으니 이때의 마늘은 마늘이 아니라 달래라고 봐야겠죠,,,쑥과 마늘은 어디까지나 고정관념이 아닐까요? - 또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이 아니라 혼합민족인게 다행스럽다,,,그 이유가 단일민족은 거대 문명권 앞에 무너지기 쉽다,,,? - 그것도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지,,,어디까지나 언급했던 단일 민족들은 경쟁없는 평화를 누리다가 그렇게 된 것일 뿐,,상황의 문제죠,,단일민족과는 하등 관련 없습니다. - 너무 단편적인 것만 보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신게 아닌가 하는데,,,솔직히 통계적 지명고 자체만 보고도 꽤나 실망을 했었는데 이번에 글을 보고,,,더 김성호선생님에 대한 실망감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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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씨.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이란 책을 내셨다.
1982년에 책이 나왔으니까 그때는 그 분이 중년이었다. 그 책은 열정과 신선함으로 가득차서 비록 이잔국, 벌잔국 이란 해석상의 무리라든가, 통계적 지명고찰 등 방법상의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백제가 두개라는 새롭고 참신한 생각으로 많은 이들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분은 또 96년에 일본승려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바탕으로 쓴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2권 을 쓰기도 했는데 이 또한 참신한 생각이 돋보인 책이다.
그래서 나는 김성호씨에 대해서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99년 10월 13일에 나에게 평소 친한 유명한 출판사 편집장이 김성호씨 책의 원고를 들고 와서 이 책을 출판해도 되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열심히 검토를 하고서 나는 매우 부정적이다 책을 출판하면 안된다고 답변을 했다. 출판사에서는 자체적으로 검토한 결과도 이 책은 출판해서는 안되겠다고 결론을 내려서 마침내 김성호씨에게 찾아가서 원고의 수정을 요구했으나, 김성호씨는 화를 내었고, 결국 그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다음해 3월에 출간되었다. 그 책이 바로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이다.
지금 질문한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책은 김성호씨가 앞의 책의 내용을 보다 확대 보강해서 낸 책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보지 않았다.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도 원고 형태로 보았지만, 역시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분의 출발이 너무나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이제 60이 넘어서서 그런지 그분은 남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기존의 해석을 전혀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에 조금만이라도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찾으면 견강부회를 일삼는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인 한문해석도 무시하게 되고, 전후가 맞지 않는 것은 물론 근거조차 없는 자신만의 환상속에서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으로만 글을 끌고 가다 보니 희안한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분이 비류백제를 주장한 후 기존 사학계로 부터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해 분노하고 기존 사학자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고 판단하고 자기의 세계에만 빠져들어 생긴 문제라고 본다. 역사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주장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에게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김성호씨는 그런 점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최근의 책이 월간조선에서 출간되고, 월간조선에 화제의 책이라며 인터뷰 기사까지 실린 것은 다분히 조갑제 편집장의 취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조갑제 - 정순태(김유신평전 저자) 등이 갖고 있는 생각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불쌍하다는 생각, 안됬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조갑제류의 인간들에 의해 김성호씨의 노력한 작품이 더 왜곡되는 것이 더 안타깝다.
김성호씨의 책 제목이 처음에는 이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조갑제류의 인간들이 우리는 신라 정통을 내세워야 한다. 그러니 이번기회에 고조선과 고구려를 제거하는 기회로 삼자. 그래서 이런 식의 도발적이고 악의적인 책 제목을 낸 것이라고 본다.
김성호씨의 주된 주장은 족보식의 역사인식이다. 그것도 부계혈통의 만세일가적인 혈통이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김씨의 조상인 소호금천씨야 말로 우리의 조상이다. 우리 민족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신라의 후예가 아니냐. 고로 단군의 후손도 모두 사라지고 고구려의 직계 후손도 사라졌는데 그들을 내세우지 말고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삼자. 이것이다.
그의 인식을 쉽게 푼다면 지금 김대중 대통령이 나라를 통치하니까 김대중의 할아버지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단군이고 뭐고, 다 없애자. 이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의 공통된 조상이 될만한 유명하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 할아버지는 말이야 콩으로 수소폭탄을 만드시고, 나무 하나로 댐을 만드는 위대한 영웅이셨다고 주장했다고 하자. 지금 우리들은 놀고 있네라고 할 것이다.
자 이것을 신라시대로 옮겨보자. 김씨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 신궁을 세우고 알지 또는 성한왕, 또는 김미추를 위대한 조상으로 섬겼다. 그런데 당나라와 만난 후에 그래 너의 조상은 대체 누구냐. 너희가 김씨라면서 혹 당나라에 김씨들의 조상인 소호금천씨와는 어떤 사이냐고 묻게 되자, 신라 김씨들이 에 그러니까 우리도 소호금천씨의 후손이고, 그 후예인 김알지가 신라의 왕이 된 후에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에서 그래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로군. 음 좋아. 그랬던 것이다.
자. 소호금천씨가 진짜 우리 조상맞는가. 전혀 아니다. 중원인들은 주변의 사이가 모두 자신들의 옛 조상들의 방계 혈족이란 생각을 가졌다. 흉노는 전욱의 자손이다 이런 식이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신라라는 생각은 아주 늦게 형성된 것니다. 소호금천씨와 신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고려나 조선시기에도 우리 조상은 단군과 기자를 섬겼지, 소호금천씨를 섬긴 적은 전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단군과 고구려를 조상으로 섬기는데, 자신만이 아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면 보다 정확한 근거를 대고 우리의 역사 천여년 동안 잘못된 조상을 섬겼음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의 논거는 너무나 허술하기 짝이 없다.
내가 출판사에 보낸 글을 잠깐 인용하겠다. 이것은 "씨성으로 보는 한일민족의 기원"에 대한 것이고, 원고 상태에 대한 비판이다.
*** 출판사 귀하 ***
씨성제는 한번 정한 성씨가 변하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또 부계의 혈통만으로 이어지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아울러 김씨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들을 구별하여야 함에도 전혀 구별하지 않고, 같은 성이면 산동성의 소호금천씨와 경주의 김씨가 같다고 보는 것은 대단한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씨성제를 통한 역사연구는 귀족, 특히 왕 중심으로 역사를 보려는 시각으로 대다수 민중의 역사, 문화의 역사라는 측면을 무시한 체, 소수의 왕 중심의 역사관으로 흐르게 한다.
만약 김성호씨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모두 김대중 대통령의 아버지에 아버지에 아버지를 모든 사람들의 조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고구려의 경우도 왕족의 선조에 대해서는 국조신으로 섬기지만, 각 귀족들은 별도의 묘를 세우고 자기 조상들을 숭배했다. 전체 씨족사회를 단 하나의 성씨로 보려는 시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또한 만주지역이나 북방계통에서 내려온 전통을 무시하고, 중국에서 모든 씨족들이 이동해왔다고 보는 것도 엄청난 잘못이라고 하겠다.
16p에서 한국의 씨성제가 은주시대부터 고정되어 온 것이라는 관점은 한마디로 비웃음의 대상이다.
18세기까지 한국에서 성씨를 가진 양반은 20%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노비와 성도 없는 평민들이다. 그러다가 양반의 족보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 기하급수적으로 양반이 늘어나면서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소수의 성씨만으로 역사를 보려는 관점은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기본적인 사료의 해석에서 엄청난 오류가 있다. 자기가 원하는 자료만을 인용하고, 전체 문장의 맥락이나, 왜 이사료가 정당한지에 대한 분석조차 없이 단편적인 자료만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학자의 기본기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1p 시경 한혁편의 추(追)와 세종실록 지리지의 철(鐵)을 같은 비교의 대상으로 놓고 설명하는 것은 사료의 연대상의 지대한 오차 (적어도 2000년)를 무시하고 보는 것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비유다.
어떻게 성만 같다고 같은 종족이 되겠는가. 숱한 양자가 많았고, 혈통이 서로 섞이고 혼혈된 것인데, 122p 중간부분의 김씨와 서씨는 하나라는 부분은 지나친 자의적 해석이며, 구체적 설명이 없다면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소호금천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면 소호금천이 우리 역사에서 과연 국조로서 어떤 역할이 있었는가.
그리고 왜 우리의 다양한 뿌리가운데 소호금천만이 우리의 국조가 되어야 하는가. 이씨나 박씨, 김해김씨는 소호금천씨가 조상이 아니다. 단지 경주김씨만이 소호금천씨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단군이 우리의 국조라는 이야기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국가를 세운 인물이며, 국란시마다 국가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했기 때문이지, 그가 곧 우리의 혈통상의 뿌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숭배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성씨적 조상과 국가적 조상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26p 소호금천씨가 김씨시조라는 것이 중국사학계에 정식 공인되었다는 것도 무리한 지적이며, 중국인구의 7할 넘는 지역이 동이족 선주지라고 해서 동이족이 최대의 비중이었다는 것 또한 시간적 통념, 역사적 변화개념도 없는 단순한 억측이다. 5호십육국, 원의 침입으로 인한 한족의 남방 이동 등 역사적 변화만 보아도 엄청나다. 한 시대에는 장안, 낙양 등에 인구가 많았고, 산동지역의 인구는 진시황의 정책에 의해 크게 해산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무시한다는 것은 언급의 가치도 없다.
130p 삼국유사의 최치원 언급이 꼭 맞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삼국유사는 여러 가지 주장을 병렬식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 가운데 최치원의 주상을 입증하려면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고진의 묘지명만 해도 부여나 진한은 고구려를 회피하여 표현하기 위한 당시대의 표현일 뿐, 부여와 진한이 같은 동족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142p 부여와 고구려가 서로 다르다고 한 부분은 한마디로 사료해석의 자의성이 얼마나 심한가를 보여준다. 부여도 4출도와 중앙을 통해 5부족으로 구성되었다는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 6이 성수라고 해서 고구려와 달랐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당시 중국인들이 동맹국인 부여에게 친근감을 묘사하고, 고구려에 적대적으로 묘사한 상황에 대한 이해도 없다. 고구려와 부여의 일체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드러난다. 만약 두 나라의 차이를 이야기하려면 무덤에서의 차별을 통한 고고학적 비평이 가해지는 것이 좋다.
146p 해모수의 부루왕의 부인을 건드렸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유화부인이 부루왕의 후비여서 쫓겨났다면, 어찌 부루왕의 아들인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가. 하백=해부루 설은 전혀 불가능하다.
150p 왜 갑짜기 여씨왕권인가. 서씨라면 몰라도. 또 모제(母弟)는 동모제라는 표현이다. 결코 처남이 아니다. 한문 해석조차 헤메고서 어찌 차대왕이 여씨라고 할 수 있는가.
151p 우씨부인이 자기의 친동생을 설득했다고. 그러면 친동생은 우씨가 되어야 한다. 우씨부인은 연나부 출신의 우소의 딸이다. 그러면 우씨왕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삼국사기에 고국천왕, 발기와 연우, 계수의 4형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연우가 발기의 친동생이 아니고, 우씨의 친동생이라면 삼국사기 기록 자체를 모두 부인하는 것이다. 또 연우가 우씨부인과 결혼했는데, 그러면 친남매끼리 결혼했다는 말인가. 도무지 사료해석을 이렇게 할 수 있는가.
153p 고자의 묘지명의 사료 해석의 잘못은 극에 달한다.
원문은 식읍이천호, 환자지적신천실, 비차위경(比此爲輕), 武安之拔郢三都 方玆豈重 으로 되어 있어서 고자가 받은 식읍 2천호는 환자의 하급관리가 받은 천실에 비하여 이것은 가볍다는 내용이다. 환자지적신은 좌전 장공 22년에 나오는 진무자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분명히 비교대상문장이 있다. 뒷 문장도 무안의 발영군은 삼도인데, 이에 비하면 어찌 무겁게는가? 라는 비교문장이다. 이러한 전체 문장을 생각하지 않고, 환자만을 따로 떼내어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조선인이라는 것은 당나라 시대에 동방지역을 조선으로 칭한 것으로 고구려를 회피하여 언급하기 위한 언급일 뿐, 그것이 한씨족의 부활이라고 볼 수는 없다.
152p의 고구려 왕통계보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계속 이어져 비평이 계속되지만, 너무 길어서 여기까지만 인용하겠다. 그는 동모제를 이복동생이 아닌 처남으로 해석하는 등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역사학의 기본에서 볼 때 어떻고 하는 것은 이미 그의 책에 대한 비평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다. 한마디로 기존 역사가들이 볼 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책이다.
그런 책을 바탕으로 또 다시 확대해서 낸 책(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해서는 더 더욱 학계에서 받아들여질 이유도 없고, 그의 주장에서 타당성있는 부분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서 그 책의 기초가 되는 책만을 보고서 이렇게 가치가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주된 논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나는 김성호씨가 한번 자기의 생각에 빠지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의 사고에 몰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는 않다. 그런 열정이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분단 획책 사관을 강화하려는 조갑제류의 인간들이 이 책을 팔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이 책을 절대 사지 말라(보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강하게 비판을 해본 것이다.
『단군은 우리 조상 아닌 日本人의 시조… 金庾信은 문무왕이 암살했다』
金聖昊
1934년 강원도 철원 出生. 서울大 농대 농업경제학과·건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일본 교토大 박사학위 취득. 농촌진흥청·국립농업경제연구소·농림부·한국농촌경제연구원 근무.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으로 비류백제와 그의 일본 망명설을 최초로 발표, 2000년에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으로 비류백제는 망명 전부터 倭人의 나라였음을 보완하였음.
1982년 「비류백제론」으로 역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던 金聖昊(김성호·68)씨. 그가 20년 간의 치밀한 연구 끝에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月刊朝鮮社)를 내놓았다. 이 책은 한반도의 역사적 여명기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다루고 있는데, 이 안에는 正史를 뒤엎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도전적 담론들은 다음과 같다.
▲「三國史記」의 전부를 김부식이 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복합민족이다. ▲檀君(단군)은 우리의 시조가 아니라, 일본인의 시조이다. ▲일본인과 고구려인은 同一민족이다. ▲金庾信(김유신)은 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문무왕에 의해 암살되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서의 머리가 아니라, 꼬리에 불과하다.
「正史」란 「바르고 정확한 역사」라는 뜻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자기의 집권을 정당화한 것이라는 게 金聖昊씨의 持論(지론)이다. 金씨는 1982년에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으로 正史에 도전장을 던져 이미 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바 있다.
그동안 일본 왕실이 한반도 이주민이라는 說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었지만, 史料 부족 등의 이유로 외면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金聖昊씨가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인 應神(응신)이 일본으로 건너가 15代 天皇이 되었다는 說을 제시한 것. 「氏姓으로 본 한민족의 기원」(2000)에서는 氏姓의 연구를 통해 비류백제는 망명 전부터 倭人의 나라였음을 보완하였다.
金聖昊씨의 위와 같은 가설에 대한 講壇(강단) 사학자들의 반응은 유보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역사 인식이 한 걸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지난 5월3일 오후, 기자는 老학자 金聖昊씨의 집을 찾았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그의 집은 노부부 단 둘이 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2층집이었다.
대학에서 農學을 전공한 그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재직 당시 「농지개혁사 연구」(1989)를 편찬한 바 있다. 역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때 취미 삼아 역사 공부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農學과 史學이라는 동떨어져 보이는 두 분야의 연관성을 묻자, 둘은 不可分性을 가진다고 했다. 토지 私有가 姓의 발생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고대는 씨족사회였어요. 씨족이 해체되면서 토지 私有 제도와 姓氏 제도가 처음으로 생긴 것입니다. 토지 私有의 시기를 추적하면 姓의 발생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三國史記」 本紀는 김부식이 쓴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正史가 「三國史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金聖昊씨는 「三國史記」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1000년 간 역사를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正史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승리한 자의 기록인 만큼,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삼국의 本紀는 김부식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後代에 저작된 것이 아니라, 실은 삼국의 건국 초부터 씨족별로 각각 기록되었다는 것이 金聖昊씨의 주장이다.
고구려는 解(해), 夫餘(부여), 高(고)氏로 변천했음에도 고구려 本紀에는 마지막 왕통인 高씨의 단일왕통으로 되어 있고, 백제도 해, 牟(모), 부여氏로 변천했음에도 부여씨의 단일 왕통으로 되어 있으며, 신라도 박, 석, 김씨로 변천했는데, 마지막 김씨족이 박혁거세의 탄생을 김씨족의 卵生신화로 바꾸었다고 한다. 즉 마지막 王統에서 法統(법통)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단일왕통을 표방했다는 것이 그가 제기하는 근거이다.
『우리가 단일민족이었다면 소멸되었을 것』
金씨는 우리 민족이 檀君의 후손인 단일민족이 아니라, 東夷族(동이족) 중심의 복합민족이라고 한다. 청동검과 축성술에 능했던 한씨족, 항해술과 불사약 및 관개농법을 지닌 오족왜인, 기마술에 능했던 스키타이族 등이 활을 잘 쏘았던 東夷族 중심으로 혼혈된 혼합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단일민족이 아닌 복합민족이라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만약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었다면,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을 거예요. 단일종족일수록 고도문명에 접하면 곧 소멸하거든요.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외래 민족이 오면 곧 망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복합민족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의 직업 분화는 종족별로 되었습니다. 농사짓는 종족은 농사만 짓지 다른 건 모르고, 배를 타는 민족은 배만 타고, 말을 타는 민족은 말만 탔지요. 말하자면 우리 민족은 각 분야의 능력 있는 종족이 모였기 때문에 그만큼 생명력이 강한 것입니다. 중국 민족이 몇 천년 간 먹고 먹히는 역사를 겪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복합민족이기 때문이에요』
이에 대한 해프닝의 하나가 신라의 향가 「獻花歌(헌화가)」와 고대가요 「龜旨歌(구지가)」의 주인공인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김해가라 首露王의 수로와 발음이 같지만, 수로부인의 水路(수로)는 「물길」, 즉 말갈의 별칭을 빗댄 말이라고 한다. 말갈과 거란은 박씨족과 같은 이란계 스키타이族이라는 것이다.
『이란계 스키타이族 중에는 훤칠한 팔등신 미인이 많아요.「헌화가」에서 水路부인이 바로 스키타이系였거든요.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지나가던 노인이 목숨을 걸고 꽃을 따다가 바쳤겠어요. 이 이야기는 순정공의 아내가 이란계 스키타이族이던 김해 여인이었음을 빗댄 희롱조였습니다』
그리고 金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단군신화는 가짜이며,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니라, 일본인의 시조라는 것이다.
그는 단군신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이야기에서, 桓雄(환웅)은 사람이 되려는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여 여인으로 환생한 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는 곰 숭배사상이 全無(전무)하며, 정작 곰 숭배사상을 가진 민족은 日本 홋카이도의 아이누人(인)이라 했다.
20세기 초까지도 곰 사냥에는 「슈루쿠」라는 독약을 사용했는데, 이 독약 원료가 쑥이었다고 한다. 현대의 곰이 쑥을 먹고 죽는데, 고대의 곰인들 쑥을 먹고 죽지 않았겠냐는 것. 결국 환웅이 곰에게 쑥을 먹인 것은 곰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곰 토템족을 정복한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곰 토템족을 정복한 이야기를 미화한 가짜라는 것이 金씨의 주장이다.
檀君은 일본인의 시조, 일본인과 고구려인은 同一 민족
그리고 평양에 설치된 단군릉 또한 사기라고 한다. 고조선은 朝陽(조양)에서 망하고, 韓氏朝鮮의 마지막 단군 準王(준왕)은 강화도에 정착하여 평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평양에 단군릉이 있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평양에 설치된 단군릉은 金日成이 자기의 주체사상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것」이 金씨가 내린 결론이다.
일본인은 倭人(왜인)의 탈을 쓴 韓씨족이어서 한씨시조 天孫檀君(천손단군)은 응당 일본인의 시조라고 한다. 반면 한국인은 韓씨족의 탈을 쓴 東夷族이면서도 자기 시조 少昊金川氏(소호김천씨)를 단 군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단군신화를 「三國遺事」에 인용한 것은 一然禪師(일연선사)이지만, 曲學阿世(곡학아세)의 主役은 유교의 盲從者(맹종자) 이승휴입니다. 이승휴가 後朝鮮(후조선 - 韓씨조선)을 기자조선이라 하여 三朝鮮을 수용함에 따라 先朝鮮(선조선 -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어부지리로 우리의 시조가 된 거예요』
신화의 허무맹랑한 부분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전승자들로 하여금 믿게끔 하는 것이 신화의 매력이자 기능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에 金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대인들에게 신화는 거짓이 아니라, 실제였어요. 현대인들이 신화를 해석하려고 하다 보니 주관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신화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내가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이유는 단군신화가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檀君이 우리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檀君은 일본인의 시조이고, 우리의 시조는 小昊金天氏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이 미신이라는 이유로 檀君을 부정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리고 金씨는 고구려와 일본인이 같은 韓씨족이었다고 주장한다. 韓씨조선 후손의 일부는 고구려 高씨족이 되었고, 일부는 위만에 의해 정복당했는데, 위만이 바로 倭人이었다는 것이다.
『韓씨조선을 정복한 위만은 중국 남부에 살던 吳族(오족)으로, 키가 작아 倭人으로도 불렸어요. 그런데 이들은 불과 1000여 명의 소수 인력으로 韓씨조선을 정복한 거였습니다. 그 결과 정복 후에는 逆으로 韓씨족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죠』
그렇다면 金聖昊씨는 이들이 어떻게 지금의 日本 영토로 갔다고 보는 것일까. 韓씨족에게 逆으로 동화된 倭人이 비류백제의 후손이 되었고, 비류백제가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天皇국가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온조의 형 비류가 正史의 기록대로 자살한 것이 아니라, 한강 부근에서 공주로 옮겨 비류백제를 세웠는데, 이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이 광개토왕의 남침으로 39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15대왕 應神(응신)이 되었다는 것. 일본의 14대 이전까지의 天皇들은 모두 毛(모)씨였지만, 15대째부터는 眞(진)씨라는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과 고구려는 始祖神話(시조신화)와 언어가 같다는 점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고 한다. 金씨는 고구려어가 신라어와는 다르고, 일본어와 같다는 예로 다음을 들고 있다. 고구려어의 「오사함(烏斯含=토끼)」은 일본어의 「우사기(うさぎ)」, 「내물(內勿=납)」은 「나마리(なまり)」, 「내미(內米=파도)」는 「나미(なみ)」, 「어사(於斯=도끼)」는 「오노(おの)」, 「미(彌=물)」는 「미즈(みず)」였고, 고구려어의 「밀(密=셋)」이 일본어의 「미(3)」, 「우차(于次=다섯)」가 「이쓰(5)」, 「난은(難隱=일곱)」이 「나나(7)」, 「덕(德=열)」이 「토(10)」였다는 것.
『만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말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金씨는 말한다.
金庾信은 문무왕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책은 원래 「金庾信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金庾信은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영웅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은 삼국통일을 둘러싸고 엄청난 파워게임이 있었음을 발견했다는 것.
金庾信의 여동생 문희(문명왕후)가 김춘추(무열왕)의 왕후가 되었으니 金庾信과 김춘추는 처남매부 간이었다. 그런데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은 삼국통일 당시 자기에게 불복한 反戰派(반전파)들이 金庾信을 등에 업고 北進을 꾀하다가 실패하자, 눈엣가시였던 金庾信을 제압하기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 같다고 한다.
北進의 실패로 왕위를 빼앗긴 문무왕은 强首(강수)로 하여금 唐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항복 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그런데 强首는 항복 문서에서 웅진 공격만 사죄하고, 金庾信의 北進에 대해서는 一言半句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唐나라 황제에게 使者로 보낸 原川(원천)의 口頭報告(구두보고)를 친히 듣고 裁可(재가)해 달라고 애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原川이 직접 보고한 내용은 항복 문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金庾信의 北進에 대한 것이라고 金씨는 주장한다.
『北進의 책임자는 金庾信이니, 그를 죽여야 唐나라 황제에게 사죄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어떻게 문서화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이런 내용을 原川더러 口頭로 보고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金庾信 암살이 암시된 强首의 항복 문서를 본 문무왕은 잘 되었다고 칭찬하면서 벼슬과 下賜穀(하사곡)을 내렸거든요. 이것은 곧 「金庾信을 암살하라」는 無言의 지령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백두산은 머리가 아니라 꼬리
뿐만 아니라 문무왕이 金庾信의 혈통을 변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金庾信은 원래 任那王族(임나왕족)의 후손이었으나, 문무왕은 金庾信의 매부인 아버지 무열왕의 王統을 세우기 위해 金庾信을 수로왕의 후손으로 변조했다는 것. 문무왕은 임나왕족인 金庾信의 조상을 수로왕으로 바꿔친데다 그를 암살까지 했으니, 金庾信의 혼령이 임나 왜병을 이끌고 와서 자기 무덤을 파헤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고, 이에 豪華墳墓(호화분묘)를 사양하고 대왕암의 護國大龍(호국대룡)이 되어 庾信과의 혼령대결을 예비했다는 것이 다. 이 또한 문무왕이 호국대룡이 된 것은 죽어서도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는 正史를 뒤집는 학설이다.
그렇다면 단군이 우리의 시조로 부활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金聖昊씨는 고려의 건국 때부터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종족별로 각기 다른 시조를 두었다는 것. 즉 朴씨의 시조는 朴赫居世(박혁거세), 金씨의 시조는 小昊金天氏, 高씨의 시조는 天孫(천손), 그 밖의 다른 姓들도 각각 다른 시조를 두었기 때문에 姓의 數와 시조의 數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 땅은 거의 차지하지 못하고 백제만 통합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聖域化(성역화)하기 위해 단군을 봉안한 곳인 安岳(안악) 九月山(구월산) 三聖祠(삼성사)는 고구려 멸망 후 350년 간 고스란히 잔존했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고려가 건국되자, 고려가 단군을 우리의 시조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북한이 현재의 우리 영토가 된 것은 고구려 땅이어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에서 조선 초까지 700여 년이나 추구된 北進의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항간에 膾炙(회자)되어 온 것같이 민족의 발상지가 아니에요. 한강에서 경주까지 밀렸다가 다시 北上한 한반도의 마지막 종착역이죠. 지금까지 우리는 꼬리를 머리로 잘못 알아 온 것입니다』
따라서 金聖昊씨는 한민족의 중심을,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백두산이 아니라, 네 종족의 先住地(선주지)였던 한강 유역으로 본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북방대륙을 고대의 우리 영토라고 거품을 넣어 널찍하게 그렸지만, 실은 각 씨족의 개별적인 先住地였을 뿐이라는 것. 한민족의 근간인 4개 종족(마한 한씨족, 변한 진·모씨족, 진한 김씨족, 진국 박씨족)이 융합한 한민족의 1번지는 한강 유역이어서, 한강은 바로 한국판 갠지스강이라는 것이다.
正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 20년 이상 걸려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나도 正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 2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正史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 도통 들으려 하지 않아요. 둘째 아들이 사학과를 졸업했는데, 그놈과는 만나기만 하면 싸운답니다』
1934년생인 그는 나이도 나이지만, 15년 전 위암수술로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런데도 매일 새벽 3∼4시까지 책을 읽고 연구한다고 했다. 金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참을 챙겨주는 부인 칭찬을 하면서, 요즘은 소화가 잘 안 돼서 간단하게 먹는다고 했다. 잠자리에 들어도 그 날 공부한 것들이 머리 속에 남아 있어서 잠이 오지 않아 소주 반병씩은 매일 마시며, 커피도 하루에 서너 잔은 기본이고, 담배도 한 갑 이상씩 꼭 피운다고 한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金聖昊씨는 아시안 바이킹의 해상 활동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서양뿐 아니라, 백제에도 바이킹族이 있었다면서 또 하나의 正史에 대한 도전장을 내놓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