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의 진화
배낭은 등산의 필수품이다. 오십여 년 산을 오르면서 내 등허리를 스쳐 간 배낭은 수도 없이 많다. 크고 작고 색상도 가지가지, 요즘은 막내며느리가 선물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검정 색깔 배낭을 멘다.
언제부터인가 산이 아닌 시내로 나갈 때도 곧잘 배낭을 들쳐 멘다. 운동화에 빵떡모자, 훌렁한 옷차림에도 배낭만 메면 꿀릴 게 없어서다. 또한 배낭에는 하루살이 물품들을 넣고 다닐 수 있지 않은가. 선글라스, 방풍 점퍼, 책, 가끔은 우산을 넣어 다닐 때도 있다. 노년에 손에 뭘 들고 다니면 낙상 위험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어느 친구는 양손에 뭘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가 뒤로 넘어져 달포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지 않는가.
세상 모든 것은 진화하는 것일까. 올봄부터 내 배낭이 장바구니로 진화했다. 아침 일찍 한 시간씩 공원을 도는데 그 중간쯤에 장터가 있다. 장터라 해봤자 ‘막 퍼주는 집’ 딱 한 집뿐이다. 그 집이 장터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게 된 건 오만 가지 먹거리가 다 갖추어져 있는데 다, 몰려든 사람들로 노상 도떼기시장처럼 붐벼서 일 것이다.
와글와글 붐비는 이유는 우선 값이 싸기 때문이다. 주변 마트에 비하면 거의 절반 값이다. 거기다 상품들의 들고 남이 빨라 채소나 과일들이 농장에서 갓 따온 듯 싱싱하기까지 않는가. 중년 남자 셋과 그들 배우자로 보이는 여성 셋이 운영하는 거기서는 카드는 사절이고 현금만 받는다. 여성 두 분이 계산대에서 셈을 하는데 예닐곱 가지 물건을 정말 눈 깜짝할 사이, 바코드 계산보다 훨씬 더 빨랐다.
상품 진열이 끝나고 아홉 시부터 판매를 시작하는데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줄잡아도 삼사십 명, 목소리 큰 아주머니들이 가장 많고 다음이 구부정한 할머니들이다. 가끔 앳된 새댁이나 엉거주춤한 할아버지가 밋밋한 줄에 추임새라도 넣듯 다문다문 박혀 있다. 줄 중간쯤, 빵떡모자에 배낭 메고 먼산바라기 하는 저 할아버지는 누구일까.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은 얼굴이다.
배낭으로 장보기를 시작한 것은 몸도 성치 않은 아내가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양손에 먹거리를 들고 오는 걸 보고 내가 자청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는 노마님인 아내가 불러주는 대로 “예이!” 하며 배낭을 둘러메는 마당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척척 내가 다 알아서 사들인다. ‘막 퍼주는 집’뿐이 아니고 마트나 백화점까지 들락거린다, 가지 수도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브로콜리를 비롯한 채소 몇 가지를 추가한 것은 빵과 우유에다 라면, 피자 같은 인스턴트식품을 선호하는 아내의 식성을 고쳐볼까 해서다. 시난고난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음은 그런 먹거리 탓이 틀림없다 싶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 어쩌자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그런 식품들을 즐긴단 말인가. 아내의 식단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듯 그러기 위해서는 부엌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른 아침 아내가 수영장에 간 사이 아내의 밥상을 준비했다. 방울토마토와 떠먹는 요구르트, 브로콜리, 당근, 오이, 파프리카, 네 종류의 채소 한 접시에 다 초장과 쌈장, 계란반숙, 견과류 한 움큼, 전복이나 육고기 같은 고단백 식품은 하루씩 번갈아 가며 올렸다. 사과 배 같은 과일은 스스로 깎아 먹게 통째로 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처음 며칠간은 다소 계면쩍어하더니 얼마쯤 지나면서부터는 당연하다는 듯 가슴을 펴고 그릇들을 깨끗이 비워냈다. 그러면서 차츰 인스턴트식품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 선반 위의 라면 숫자가 그대로이고 냉동실의 피자 또한 손을 대지 않았다. 봄부터 시작해 칠팔 개월 동안 내 상차림 덕분인지 아내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걸음걸이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목소리에도 생기가 실렸다.
다 저녁때, 여생이 한 줌 햇살일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아내의 밥상을 차릴 것이다. 육십여 년을 함께 살면서 아내에게 너무나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늦었지만 이리 밥상을 차림으로써 그 빚의 일부라도 갚을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부엌일이 결코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보은(報恩)이라 생각하면 팔뚝에 절로 힘이 붙었다. 게다가 지난 주말 효부들이 아버님을 위해 꼬마 식기 세척기까지 놓아주지 않았는가.
배낭을 둘러멘다. 오늘은 장터에서 깐 마늘과 깻잎을, 마트에서는 가지볶음에 필요한 굴 소스와 맛술을 사 올 참이다. (계간《에세이21》2023년 봄호 게재)
첫댓글 재미있습니다.
회장님 늦게 철드셨네요. ㅋㅋ
행복한 두분 식탁이 눈에 선합니다.
경희 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