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문 앞에 서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그런 일은 잠깐 머리를 내밀었다가 도로 잠수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가끔은 의식의 표면에 좀 오래 머물러 있을 때도 있다. 다음 이야기도 그런 일 중의 하나로 이참에 한번 진지하게 반추(反芻)해 봄으로써 그 앙금을 씻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용도실 선반에 얹혀 있던 코다리가 눈에 띈 것이 문제였다. 아니, 조금 전에 방문객이 와서 무슨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을 빨리 치워야겠다는 일념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용도실 쪽으로 움직였을 뿐인데, 갑자기 내 오른쪽 눈두덩이에 강한 충격이 온 것이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거기 유리문이 있는 것을 깜빡했나 보다. 얼른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오른쪽 눈두덩이가 금방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더 커지기 전에 어서 병원으로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즉시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서 당직 의사가 내 설명을 듣고 웃었다. 남이 아프다는데 웃는 인간이 의사라니! 하지만 워낙 듣는 쪽에선 우스운 일일지 모르니 그냥 용서해 주기로 했다. 싱겁게 생긴 그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별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주 치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말이지 하루 지나고 나니 상처 부위가 뽕나무의 오디 빛깔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그렇게 흉한 모습으로 외출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사방에 연락해서 일일이 약속 날짜를 바꾸는 수고를 해야 했으니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때 누구였으며, 어떤 의식 상태로 있었는가? 뒤 베란다 쪽이 원래 좀 어둡기는 하지만 유리문이 닫혀 있는지 열려 있는지도 분간 못 할 정도로 내 의식이 흐리멍덩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고 쳐도, 어쨌든 그때의 내 의식은 오로지 앞에 보이는 목표물만 보고 내 몸은 잊은 게 사실이었다. 즉 유리문 쪽으로 바삐 걸어간 자는 나의 의식이고, 거기 부딪힌 것은 나의 몸이었다. 아, 나는 내게 몸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단 말인가?
러시아의 문예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말의 미학』이란 저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다가 앞에 누가 오면 그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몸을 피할 때 의식 속에서 그와 나와의 거리, 그리고 자기 몸의 크기를 의식하고 조절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몸을 의식한다. 몸을 바라보는 나와 그 몸을 움직이는 타자가 잘 조화되는 순간이다. 이 이론대로라면 내가 유리문에 부딪힌 이유는 그때 내 몸과 내 몸을 움직이던 의식과의 사이에서 조화가 순간적으로 깨진 탓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생각지도 않게 그릇을 떨어뜨리거나 하는 실수는 다 이런 증상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렇게 의식을 잠깐 놓치면 실수하게 마련이지만, 의식을 똑바로 차린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바흐친은 앞의 말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도 하고 있다. 우리가 개울 같은 것을 건너뛸 때 자기 발을 의식하면 절대로 그 개울을 넘지 못하고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이를 실증할 경험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답십리에 살 때의 일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한양대 쪽으로 가려면 사근동을 지나가야 했는데 중간에 청계천 하류를 만나게 된다. 그 개울에는 긴 통나무들을 얼기설기 묶어서 엮어 놓은 엉성한 나무다리가 있었다. 다리 폭도 좁아서 한 사람이 간신히 건널 정도였는데 어쩌다가 다리 중간에서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피하기 어려워서 곤욕을 치르곤 했다. 자칫하면 구정물이 흐르는 개천에 그냥 떨어질 판이었다. 매번 다 건너고 나서 돌아보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곤 했다. 이 건너기 무서운 다리를 언젠가 달밤에 술 한잔 걸치고 뛰어 건넌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두려워서 쩔쩔매던 다리를 그냥 달리니까 순식간에 건너게 된 것이다. 발밑을 의식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도전이다. 몸을 의식하지 않고 몸에 의식을 얹은 것이라고 할까?
미국 LPGA에서 뛰는 박인비 선수가 2013년 한 시즌에 6승의 위업을 달성했을 때 일이다. 신문마다 이를 대서특필했는데 모 일간지에서는 “생각 말고 느낌 믿어…모두를 쓰러뜨린 무심 퍼팅”이라는 타이틀을 뽑아 특집을 만들었다. 내용인즉 그녀가 세계에서 가장 퍼팅을 잘하는 사람이 된 비결은 ‘느낌’이고 ‘감각’이라고 했다. 공을 홀컵에 떨어뜨리려고 애쓰거나 의식하게 되면 실수하게 마련이다. 그냥 몸의 느낌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 또한 의식을 몸에 얹어서 수행한 작업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보통 때는 의식이 몸을 데리고 다니나, 중요한 순간에는 그냥 몸에 의식을 얹으면 몸이 알아서 잘해 준다. 이런 방식이 때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위에서 든 여러 예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몸과 의식의 공생 관계는 정말 신비스럽다. 언제부터 형성되고 어떻게 유지되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묘한 관계가 아닌가.
오늘 또 유리문 앞에 서서 그날의 정경을 떠올려 본다. 그날 내가 코다리를 치우려다가 유리문에 부딪힌 것은 전적으로 내 의식의 잘못은 아니다. 내 의식이 내 몸을 데리고 가다가 중간에 유리문이 있는 것을 깜빡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내게 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몸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서 곰곰 따져보게 되었으니, 그 유리문은 의외로 많은 것을 가르쳐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