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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인
박정하 노모가 쓰러지셨으니 새로운 사태이다. 85세 여름, 서해안에 인접한 봉락리 방앗간에서 발을 헛디뎌 처음 쓰러지면서 지팡이를 짚기 시작했는데 그 후 8년이 지난 93세 봄날이었다. 그러니까 85세 그해에는 실수로 계단을 놓쳐서 넘어지는 바람에 지팡이를 짚게 된 것이고 이번에는 뇌경색이란 병명으로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 입원하면서 70여 년 만에 그미의 이름을 다시 찾게 된 점 하나만으로도 특이한 사건이다. 그랬다. 일제 강점기 소학교 시절에만 이름 석 자 ‘박정하’로 불리었고 군청 서기 때는 이름 두 자를 뺀 ‘박 양’이었다. 그러니까 딱 한 가지, 해방 직후 군청 서기 시절 때까지만 이따금 호명되던 자신의 이름 석 자, ‘박정하 양’이 소환된 것 하나만 좋아진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이었다.
스물셋에 시집오면서 70여 년 간 이름자가 사라졌었다. 그 해방 직후에 스물세 살의 결혼은 늦깎이 혼사였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노처녀도 시집간다’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던 것 같다. 그 후 20년 이상은 이름을 버리고 ‘규호메’로 통했으니 ‘김규호 어머니’라는 서산 사투리의 준말이었다. 40년 후 남편이 퇴임을 하고 아들 김규호가 어른이 되면서 다시 ‘하늘랄메’로 변경되었으니 손녀 ‘하늘이 할머니’의 줄임말로 여기저기에서 불렀는데 나중에는 그게 ‘몸에 맞는 옷’처럼 자연스러웠다. 가장 품격 있는 호칭은 ‘사모님’이었는데 남편 김구원이 오랫동안 교장님으로 복무하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젊은 날의 그미는 호미 들고 밭을 매기도 했으나 남의 집 품앗이를 거부하면서 그 동네 논두렁 아낙들과의 차별성을 아주 쬐끔만 보여주었다. 또 있다. 호미질이 끝나면 흙 묻은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마루를 닦아낸 다음 깨끗한 밥상으로 정돈했다. 동갑네 아낙네들로부터 ‘깔끔헤유’ 소리를 들었지만 오랫동안 고단한 몸을 돌보지 않았다. 결혼 초기에는 엄두를 내지 않던 지게질도 시작했고 감나무와 뽕나무에 올라가 감도 따고 뽕잎도 따면서 세월을 보냈다.
괜찮은 인생도 있었다. 다섯 자식을 대학에 보냈으며 남편의 정년퇴임 후 부부 동반으로 동남아와 유럽을 다녀오는 화양연화의 노후도 있었다. 그러나 노년 이후 사람들과 소통을 하지 않은 게 외로움의 이유가 되었다. 아파트에 정착한 노년에도 그 흔한 아파트 경로당조차 나가지 않았다. 교장님 출신인 김구원은 오히려 경로당에 들러 고스톱도 치는 소탈함을 보여주는데 그미 혼자 요지부동이었다. 경로당에서 지도하는 젊은 여자 선생님의 손짓에 따라 박수 치고 노래나 부르는 게 왠지 어린애같이 보여서 싫었다. 5월 어버이날 경로잔치에도.
“같이 구경 가.”
지아비의 요청도 설레설레 도리질 쳤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독서와 TV 시청으로 외로운 노후를 보냈다. 외출은 딱 한 곳, 소도시 시장 골목 ‘광천 새우젓’ 사무실 소파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물전 사장 김숙자의 아버지 역시 교장님 출신이어서 남편 연줄로 ‘어머님’ 소리로 방석을 내주는 그 자리가 가장 편안했던 것 같다. 귀가할 때마다 젓갈 한 통씩 팔아주면서 어른의 체통을 세웠는데.
모친이 지키고 싶었던 나름의 품격이 뇌경색 한 방에 모래성처럼 무너진 것이다. 뇌의 동맥이 막혀 혈액이 흐르지 못해 뇌 조직이 괴사하는 병이다. 그렇게 병동에 입원하면서 영원히 격리될 줄은 차마 예상치 못했다.
기실 처음 쓰러진 85세 때가 충격이 더 크긴 했다. 그리고 생애 처음 석지옥(51세) 간병인을 따로 고용한 것이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와 호수처럼 출렁이는 눈동자를 가진 그미가 나타나 늙은이의 기저귀를 갈아주었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그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모는 80여 년 만에 다시 기저귀를 차게 된 신세를 수치스러워하며 사사건건 간병인과 부딪쳤다. 짜증 난 몸의 화풀이도 겸했던 셈이다. 때로는 남편이 없는 간병인의 이력을 못마땅해하며 혹독하게 날을 세우기도 했다. 밥을 먹다가도.
“남자가 자주 찾아온다.”
깎은 밤톨 스타일의 사내 하나가 병실 바깥에서 기웃거릴 때마다 그 흔적을 포승줄로 묶으려 했다. 석지옥이 ‘왜 참견이냐?’는 표정으로 뾰루퉁 찌푸리면.
“나를 간호하러 왔으면 내 말을 들어야지.”
큰 목소리로 권위를 세우려 했다. 심지어.
“너는 간병인으로 온 거냐? 아니면 연애하러 온 거냐?”
소리를 빽 질러 병실 사람들을 석고처럼 굳게 만들기도 했지만 둘의 인연은 일단 거기서 마감되었다. 20일 후 무사히 퇴원을 했지만 노모는 지팡이를 짚게 된 자신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때까지는 그렇듯 불안하나마 자존감을 세우고 싶어 했다. 딱 그때까지만.
8년 후 두 번째 쓰러지셨을 때는 요양보호사의 방문을 받을 즈음이었다. 남편이 93세로 사망 후 요양보호사가 주 5일 하루 4시간씩 방문하여 청소도 하고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살림도 소소하게 거들었으니 엄청 불편한 건 없었다. 다섯 명의 자식들이 순번대로 주말 방문을 채워주는 구조로 그럭저럭 지탱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가 2019년 3월 이후 돌연 코로나 시국이 도래하면서 잠잠하게 지탱되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양보호사 남편의 회사에 코로나 접촉자가 나타나자마자 센터에서 케어를 일시 차단시킨 것이다. 요양보호사가 코로나에 걸린 것도 아니고 남편이 걸린 것도 아니며 단지 그 남편이 다니는 회사에 확진자 딱 한 명이 나타났다는 풍문 하나가 이유이다. 그래도 센터에서는 책임감을 느끼며.
“다른 요양보호사로 임시 대체할게요.”
점잖게 타협점을 제시했으나.
“혼자 살 수 있어.”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게 마지막 자존심이다. 노모 혼자 일주일을 보내는 게 불안했지만 맏아들 김규호 역시 ‘형제들이 돌아가며 방문하면 될 거야’ 하며 어물쩍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주말마다 번갈아가며 방문하던 시스템도 쉽지 않았다. 부천에 사는 남동생 김규철의 주말 방문 순번이었는데 형제 카톡으로.
‘하필 부천에 확진자가 생겨서.’
망상망상 주저하자.
“그럼 오지 마. 아직은 끄떡없어.”
노모께서 쉽게 대답하는 바람에 김규호까지 동생에게.
“가지 마. 타이어 바퀴에 균이 묻어 옮기면 다 죽을 수도 있어.”
전날보다 3명이 늘어나 전국의 확진자가 17명으로 집계되니 긴장되는 상태이긴 했다. 그날 집계표를 보면 한국은 17명이지만 일본은 723명, 인도는 3200명이고 중국이나 미국 역시 몇천 명이 넘은 상태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코로나 방역 시스템이 철저했으니 그에 덫이 되기도 했다. 보호자 없이 아파트에 혼자 사는 며칠이 이어지다가 노모가 쓰러졌으니 심약한 자식들 가슴에 대못이 박힌 것이다.
앰뷸런스의 처음 탑승은 소도시 시립병원까지의 119구급차였다. 응급실에서 MRI와 CT를 연달아 찍더니.
“치료할 수 없습니다. 대도시로 옮기고 싶으면 연락을 해드리고요, 아니면 그냥 여기에서 약물 치료를 해드립니다.”
“약물로도 치료가 되나요?”
그때만 해도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오. 그냥 하는 겁니다.”
도리질 치는 젊은 의사의 표정을 남기고 서울에서 가까운 거점병원으로 두 번째 앰뷸런스를 몰면서 현금으로 18만 원이 들었다. 옮기자마자 또 MRI와 CT를 연달아 찍었지만.
‘먼저 병원에서 찍었는데 그 자료로 대체하면 안 됩니까?’
머뭇머뭇하던 그 말이 절벽처럼 막히는 것이다.
CT는 몸속을 투과하는 방사선을 컴퓨터로 영상화하는 장치이다. X선관을 이용하여 인체 내부를 단면으로 잘라 해부학적 구조의 변형과 질환의 유무, 성격 등을 알아볼 수 있다. 회질, 백질, 혈액, 종양, 뇌척수질 등의 섬세한 차이를 데이터로 기록하며 3차원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에 MRI는 자기공명영상이다. 자석통 안에 들어가 신호의 차이 값을 측정한 다음 컴퓨터로 재구성하여 영상화시키면서 판독한다. 환자의 자세 변화 없이 인체의 영상을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CT는 부위에 따라 4∼10만 원이며 MRI는 한 부위 당 30∼60만 원인데 요즘 병원에서는 두 검사 모두를 병행하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박정하 노모의 식솔들에게 초비상이 걸렸다. 과거라는 흔적이 차단되면서 지금 이 순간이 현재이며 앞으로가 미래라는 시간적 구분이 떠오르는 것이다.
문득 망우동 매하 이모가 겹쳐 떠오르기도 했다. 노모보다 열두 살 적은 용띠 동갑인 매하 이모는 이른 나이인 75세 어느 날 뇌가 터지면서 7년째 입원 중이다. 처음에는 착한 이모부께서.
“누워있어도 집에 아내가 있다는 게 든든해.”
흥부 같은 마음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다가 7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 이모부 역시 등이 굽고 검버섯 피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이제 힘이 빠졌어. 수발할 경비도 다 떨어지고.”
슬쩍 던지던 하소연의 농도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급기야.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
몸과 돈, 그 잦아드는 이중고를 하염없이 호소하는 바람에 전화 통화도 민망할 때가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그 문장 그대로였다.
코로나라는 용어조차 등장하지 않을 때부터 노모에게 약간의 조짐이 보이긴 했었다. 권보미 요양보호사(40세)와의 갈등이 시작된 게 의아스러운 일이다.
“사과 두 알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과일 몇 개를 다용도실에 숨기기 시작했다. 참치 통조림도 숨기긴 했으나 그건 상하지 않으므로 일단은 염려를 접었다. 더러는 요양보호사가 들어오자마자.
“고등어 두 마리 내놔. 염려 말고.”
무슨 의미인지 눈치를 챈 요양보호사가 뜨악한 눈빛으로.
“그런 말씀하시면 안 돼요. 어머니.”
“내가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래두. 여기서 깔끔하게 끝낼 거야.”
그러다가 권보미 요양보호사가 갸우뚱하며 여기저기 뒤적거리다가 냉장고 둘째 칸에서 고등어를 발견하고.
“여기 있네요. 와서 보세요.”
제대로 보존된 생선 두 마리를 꺼내자마자 노모께서 깜짝 놀란 표정을 바꾸며.
“사람이 늙으니 이렇게 실없는 소리도 하게 되네.”
재빨리 시인하며 일단 마무리되기도 했으니 수상한 조짐이다.
그러다가 2020년 3월 어느 날, TV 브라운관에 초로의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나타나 코로나 사태의 추이를 설명하는데 문득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동그란 얼굴에 두툼한 입술 그리고 듬성듬성 새치가 섞인 담담한 표정들이 뭔가 음험한 불안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랬다. 그미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구체적인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이다.
노모의 통장에 적힌 마지막 현금이 1억 원이었으니 초고령 노인네로서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 돈을 툭 털어 손주들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불현듯 선언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규호네 5남매 모두 한결같이 딱 두 명씩만 생산했으니 손주가 도합 ‘2 곱하기 5’로 딱 10명이었다. 평생을 자식에게 헌신한 노모는 이번에는 손주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했다.
91세 어느 날 갑자기 손주들 10명에게 500만 원씩 보내면서 딱 절반인 5,000만 원이 잘려 나갔다. 손주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깜짝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맏아들 김규호를 부르더니.
“나머지 5천만 원 모두 손주들에게 또 줘야겠다. 다시 1인당 오백만 원씩.”
순간 김규호의 머리에 복잡한 셈법이 엄습하면서.
“기다려 보시지요.”
“손주들 푸릇푸릇 이쁠 때 빨리 나눠주고 이승을 떠나야지. 저승에서 무슨 돈이 필요하겠니?”
‘이승’과 ‘저승’이란 단어가 문득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데.
“행복할 때 가는 게 가장 좋은 죽음이야.”
“기다려 봐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응답한 ‘혹시 무슨 일’이 실제로 터진 것이다. 그리고 박정하 노모의 치료비는 일단 나머지 5천만 원 통장에서 지출하게 되었으니 노모의 ‘통 큰 결심’을 차단시킨 게 형제들 입장에선 아주 다행이었다.
2021년 현재 병원 치료에 드는 돈으로는 간병인에게 입금시켜야 하는 금액이 가장 크다. 나머지는 뜻밖으로 감당할 만하다. 불과 입원 사오일 후, 청구서 꼭대기에 수술비 2천만 원이 적혀있어서 숨이 콱 막힐 정도로 놀랐는데 실제 납입액은 127만 원이라서 ‘휴우’ 안도하는 동시에 깜짝 놀란 것이다.
‘왜 이렇게 싸지?’
뇌경색의 경우 첫 입원 28일까지는 보호자 부담금이 수술비의 5프로를 넘지 않는다는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다음부터 20-30프로로 상향 조정되지만 1년 병원비 총액 600만 원이 넘으면 몇 달 후 다시 통장으로 환급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이 세계 최고라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누나 김규옥네 재미교포 아들, 딸의 가족들도 병원 수속을 미루었다가 한국에 올 때마다 병원을 찾는단다. 경비의 차이가 무시무시하다나, 딱 하나, 한국 땅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경비가 있으니 그게 간병비이다. 14개월 동안 1인 간병인을 고용하자 노모 통장의 마지막 잔고 알토란같은 5천만 원이 삽시간에 날아갔다. 너무 크다.
간병인은 85세 때의 석지옥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을 만났다. 나이는 50대에서 70대 초반까지였으며 두 사람은 조선족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토종 한국인이었다. 한 사람을 빼고 대부분 키가 작았으며, 혼자 사는 여자가 셋이고 나머지는 남편이 있었다. 그미들과 ‘좋은 관계’도 있었고 ‘나쁜 사이’도 있었으니 저마다의 사연들이 지난한 스펙트럼으로 벌어진다. 다섯 번째 간병인과 가장 오래 함께 하면서 그만큼 의지했던 것 같다.
병원마다 코로나 검문 검색이 그리도 엄격한 줄은 까맣게 몰랐다. 좌우지간 출입문에서부터 촘촘한 그물망 수속 절차로 닦고선 방문객을 골라 호시탐탐 핀셋으로 찍어내는 것이다. 입원 수속 절차를 받으려던 김규호가 수배자처럼 끌려 나온 게 예상 밖의 사태이다. 무심히 올라탄 엘리베이터의 3층 문이 열리면서 하얀 셔츠를 입고 안창을 살펴보던 젊은 사내 세 명의 덫에 걸렸으니.
“나오시지횻!.”
드라이하게 끊는 어투에 초장부터 기가 죽었다. 옷깃에 표찰을 찬 여자들이.
“저는 간병인인데요.”
“저도요.”
그렇게 표찰 찬 사람들을 열외 시키더니.
“나는 보호자요. 오늘 입원한 환자의.”
그는 다시 간병인과 여동생 김규선을 제외시키더니 유독 규호 씨에게만.
“나오세요.”
“…….”
“보호자 한 사람만 제외하고 아저씨는 나오세요.”
“나도 보호자라니깐, 왜?”
노모가 위독해서 병원에 모시고 왔는데 입실하지 못한 채 바깥으로 쫓겨나는 건 어이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제대로 티격태격 한 차례 벌이지 못한 채 바깥으로 끌려 나오자마자 당장 갈 곳이 없어졌다.
그 종합병원의 입장이 비상사태란 건 나중에 안 이야기이다. 전국에 열 개 정도가 포진된 계열사 그룹인데 지난달 그중 하나가 코로나에 노출되면서 그 병동 전체가 문을 닫음과 동시에 나머지 계열사 병원의 신뢰도까지 대폭 추락 되었단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 환자 한 명만 터졌다 하면 12층 건물 전체가 그물에 덮인다. 100여 명의 의사와 수백여 명의 간호사와 직원들 그리고 비정규직 알바들까지 싸그리 손발이 묶이게 되니 그게 한반도의 코로나 계엄령이다.
집회나 종교 모임은커녕 학교 수업조차 받을 수 없으며 친교를 위한 식사도 할 수가 없다. 환자 옆에는 딱 한 명의 보호자만 허(許)하게 되었으므로 그 후로는 간병인 표찰을 바꿔 차야만 면회가 가능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주억거렸지만 그 비유가 맞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간병인들은 24시간 풀타임 근무이며 보호자가 지불하는 9만 원이 수입의 전부이다. 환자를 14일 정도 연달아 돌보다가 겨우 몇 시간 외출 후 다시 병실로 돌아오는 구조이다. 그러다가 환자가 퇴원하거나 아예 세상을 떠나면 다시 센터로 복귀하여 로테이션 순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노모의 첫 간병인은 북간도 출신 이미숙(57세)으로 청량한 먹머루 눈빛이었다.
“죄송하지만……간병비 얘기가 되었나요?”
“예, 일당 9만 원요.”
내주는 사람 입장에선 만만찮은 금액이다. 간병비는 일당직이 기본이지만 장기 입원의 경우 휴일수당을 따로 지급해야 한다, 고 법에 규정되어 있다.
“부탁이 있는데요. 할머니, 식사 때 밥 한 공기만 추가해주세요.”
노모의 밥상에 젓가락 하나 올려놓으면 그만큼 절약이 된다니, 그러마고 했다. 아무튼 간병인들은 돈 쓸 시간이 없으므로 거꾸로 생각하면 번 돈의 몽땅 저축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10년을 채우면 소액의 연금 수급도 가능하니 3D 업종의 고단함 대신 노후가 쬐끔은 보장되는 시스템이다.
조선족 출신인 이미숙 간병인은 어투에서 딱 사회적 약자의 표시가 났다. 한국 정착에 성공은 했지만 막상 지난한 난관들이 고달프다며 지금도 동업 직종 본토인의 우격다짐을 호소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간병인 중에서도 조선족들이 ‘을’이 되는 것이다.
김규호가 느끼기에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첫날 침대를 밀고 올 때는 분위기가 쾌적했다. 병실이 깨끗했고 커튼이 활짝 열린 채 환자들끼리 ‘하하호호’ 웃는 넉넉한 느낌이었는데 언제부터였나, 면회를 갈 때마다 어렵쇼, 수상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모든 커튼이 내려지고 무거운 침묵이 서리는 싸-한 공기로 변신한 것이다.
새로 등장한 옆 침대 키다리 간병인 때문이라고 수군대는 중이다. 그러니까 불과 몇 명의 공동체라도 낱낱이 보듬어주는 품성이 필요한 것이다. 노모를 괴롭힌 옆자리 간병인인 그미를 그냥 ‘송’이라 부르겠다. 그 첫 갈등은 노모의 움직임 때문이다. 혼몽 상태에서 간신히 팔을 움직였더니.
“왜 건드려?”
‘송’이 벌떡 기차 화통소리로 짜증을 낸 것이다. 안타깝다. 조선족 출신 이미숙은 자신이 담당한 환자에게 소리치는데도 토종 간병인의 기에 눌려 ‘그러지 말라우요.’ 라는 항의조차 못했다고 종시 억울해한다.
‘송’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개의 표정을 지니고 있으니 하나는 싸늘함이요, 또 하나는 화사함이다. 자신이 맡은 환자 정면에서의 싸늘했던 표정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화사한 사슴 눈빛으로 변신하는 야누스의 얼굴이다. 미소와 우수가 혼재된 그 두 표정 또한 모두 진실이므로 청량하게 가슴을 울릴 수도 있다. 특히 목사님과 전화할 때는 허리까지 싸리회초리처럼 낭창낭창 흔들면서 청량한 음료수 같은 톤의 언어만 내뿜는다.
“목사님 말씀은 단 한 마디도 놓칠 게 없어요.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비단 주머니 해법 단추로 풀어주시네요. 홧팅요.”
그러다가 담당 환자와 ‘면 대 면’이 되는 순간 B사감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몸을 다루고 팔을 비튼다. 밥을 먹일 때에도 숟가락이 환자의 이빨을 부러뜨릴 듯 딱딱 들이민다. 그미의 환자 역시 의사 표현을 못하므로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다.
박정하도 마찬가지로 휘두르는 대로 깨질 수밖에 없다. 김규호도 아내와 함께 면회를 갔다가 오픈게임을 겪었다. 노모의 손등을 조심조심 쓰다듬는데 송이 다가오더니 낮은 톤으로.
“한 분은 나가세요.”
두 사람 면회는 금지라는 그 말이 코로니 시국 병동 규칙상 맞는 말이긴 해서.
‘아니, 의사도 아니고 경비원도 아닌 사람이 왜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항의하지 못한 채 커튼을 내리고 노모와 눈빛만 맞추며 몸을 바싹 낮췄다. 그런데 잠시 후 송이 2번 침대 간병인에게.
“우리 엄마 맡아주세요. 내가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
부탁하는 것이다. 이게 뭐지? ‘환자 외에는 사용 금지’ 팻말이 붙은 실내 욕조에서 그 여자 혼자 샤워를 시도하는 것이다. 간병인들은 복도 끄트머리 화장실을 사용하라는 규칙을 당당하게 어기니 그게 내로남불 타법이다. 남들의 법과 원칙에는 엄격하되 자신의 규칙 위반에는 관대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규호는 숨죽이는 수화(手話) 면회를 끝내고 살금살금 나왔다. 흐흐흐, 이번 면회도 성공이다, 비로소 안도하며……그리고 또 하나, 송이 환자에게 붙이는 ‘엄마’라는 호칭만큼은 정겨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여동생 김규선 역시 면회 금지 상태에서 환자를 만나려니 위장 진입 작전을 쓸 수밖에 없다. 간병인 명찰을 차고, 대기실 벤치에서 혼자 쉬게 한 다음 여차저차 수속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간신히 진입했는데 하필.
그때 노모에게 호통치는 장면을 만난 것이다. ‘딱’ 걸렸다.
“팔 치우라구요. 왜 자꾸 넘어와. 내 말을 개무시하나? 진짜.”
노모의 팔뚝이 침대 모서리를 넘어 옆구리에 스치자마자 송이 ‘아이구 아야’ 아픈 표정으로 생쑈를 한다는 얘기를 이미숙 간병인에게서도 들은 바가 있다. 지금도 송이 솔개처럼 부라리는 중이고 가련한 노모 혼자 병아리처럼 발발 떠는 상황이다. 나머지 침대는 모두 성벽처럼 닫힌 채 움쩍도 하지 않는다.
아, 내 노모가, 구십 평생 도도한 자존감 하나로 살아오신 그 노모가, 한반도 역사의 살아있는 박정하 증인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눈빛조차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도 절반 이상 반말 투인데.
“팔을 단단히 묶어놔야지, 도대체 성경을 볼 수가 있나, 기도도 못하고 잠도 잘 수가 없으니 불면증으로 생사람 쓰러지겠네.”
“……아.”
“늙은이 팔뚝이란 게 삭은 장작처럼 파삭파삭하는데 한 번 부딪치면 꼬챙이처럼 아픈단 말이야.”
그 막말도 고스란히 감수하는 중이다.
“너무 오래 살면 못 쓰는 거야.”
그 광경을 먹하니 지켜보던 김규선이 ‘찬’하고 가로막으니 찬바람 소리가 훽, 스치는 것이다.
“저는 이 환자의 딸입니다.”
고요, 고요가 맴돌았고 송의 고개가 조신하게 조아려지는 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얼굴도 홍당무처럼 발그스레 달아오르더니 야수처럼 포효하던 그미가 급 겸허한 모드로 변신한 것이다. 지금은 그렁그렁 젖어있던 김규선의 눈시울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다.
“무슨 일이시죠?”
낮게 터지는 목소리에 서슬이 서린다.
“그게 아니구요.”
그 후 송은 익은 벼처럼 다소곳해졌다. 노모의 눈빛도 아주 잠깐 눈사람처럼 녹는가 싶더니 아, 눈시울까지 번지는 것도 막내딸과 비슷하다. 안타깝다.
보름 뒤, 송의 환자가 세상을 마감하면서 병실을 떠났으므로 짧은 악연이 표표히 마감되었다. 석별 과정에서 그미의 눈빛에 맺힌 이슬도 아슴아슴해서 ‘측은지심과 노여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며 수도에 빠지는 중이었다.
닫혀있던 커튼들이 일제히 열리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노모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요구르트 빨대에 입술을 대셨노라는 전언이다. 그 상황이 어쩌면 노모가 ‘을’의 자리에 서게 된 마지막 스크린이었을 수도 있다.
병원마다 수술과 시술을 요구했고 거부할 때마다 전원(轉院)을 채근받는다. 야박하지만 그 요구가 경우에 맞는 것이다. 대학병원은 환자에게 침대나 제공하는 숙박업소가 아니다.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는 환자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을 찾아 나가라는 요구가 정답이다. 문제는 시술을 한다손 치더라도 환자의 몸이 좋아질 확률은 1도 없다는 걸 그들도 아는 것이다. 아, 세상을 합리적으로 마감하는 방법은 제발 무엇인가. 다시 앰뷸런스로 치달리니 도심지 차량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쫘악 갈라진다.
박정하 노모는 1928년생으로 소학교 졸업장 하나가 처음이자 마지막 학벌이다. 두세 살 많은 동급생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호롱불에 머리카락 태우는 향학의 열정을 보였단다. 상급반 진급 이후 무용과 콩쿠르 대회 대표 선수였고 어깨 너머로 풍금도 배웠다. 소학교 졸업 후 진학을 못했지만 정돈된 글씨와 출중한 주산 실력을 인정받아 군청 서기로 취업이 가능했다. 그 시절이 가장 풋풋한 청춘이었다. 면내 최초로 파머를 했고 발바닥에서 15센티 올라가는 치마를 입어 세인의 눈길을 끌었다. 해방 직후 여자로서는 최초로 자전거를 탔으니 신작로에서는 가장 멋쟁이였으나 사내들이 감히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소학교 훈장을 만나 족두리 쓰면서.
‘서울로 시집가고 싶었는데’
펑펑 운 게 청춘의 마지막이다. 그리고 70여 년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세 번째 병원.
여기서 만난 흑룡강 출신의 김미진 간병인(63세)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신산의 질곡이 보인다. 그 강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 부근을 흐르는 물살로 ‘아무르강’이나 ‘헤이룽강’이라고도 부르는데 유유히 흐르는 물결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중류쯤이란다. 몽골 북부의 오논강에서 갈라져 동쪽으로 흐르고 흘러 타타르 해협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김미진은 그 흑룡강 중류 언저리에서 보따리 옷 장사로 생계를 유지한 이력이 있다. 보디랭귀지를 합친 소통이지만 중국어와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3개 국어를 구사한다며 은근히 자랑도 했다. 그가 살던 한인촌은 상점 간판마다 한자어와 한글을 동시에 표기한단다. 모두 가난했고 여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으며 특히 북한에서 압록강 건너온 여자들은 약점만큼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었단다. 그미도 그랬다.
“사연을 쏟아내면 소설책 열 권 이상은 나온다우. 나는요, 누가 뭐래도 서울 사는 지금이 행복해요. 물론 여기도 차별과 텃세가 있지만 다른 나라처럼 무지막지하진 않으닝까요. ”
사연을 토로하려는 바람에 얼떨결에 경청하다가 몰입에 빠지기도 했다.
“스물한 살 꽃띠 나이였다우.”
바나나 속살을 얇게 잘라 노모의 입에 넣어주며 한숨을 쉬더니.
“산에서 나무를 했고 나무껍질을 벗겨서 죽을 쒀도 날마다 배가 고팠다우.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두만강을 넘은 거지요. 브로커에게 쌀 두 가마 값을 주고 오로지 그 사람 뒤만 따르는 거예요. 가뭄이 오니까 두만강 상류 쪽 물이 마른 거지. 우리를 안내하는 브로커는 아랫도리 홀라당 벗고 털레털레 물을 건넜고 여자들도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팬티 바람으로 건넜다오.”
간신히 건너 한숨을 쉬는 찰나 군인들의 총구가 머리를 겨누더라는 것이다.
“키가 작고 눈매가 매서웠다우. 죽었구나 했는데.”
그리고 어디론가 팔려 갔는데 그나마 북한이 아닌 게 다행이라며.
“나를 납치한 인간들이 즈이 멋대로 몸 가격을 먹였는데 ‘아얏’ 소리도 못한 채 팔려버렸어요. 인신매매 신부니까 인질치고는 그래도 운이 좋다 할까요. 뜻밖으로 나를 사간 시댁 사람들 인품도 괜찮습디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 서른세 살 남편도 핏줄 닮아 성품이 착하긴 했어요. 오른팔을 못 쓰고 발가락 네 개가 잘려 나간 건 약초 캐다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그런 거구요.”
딸도 하나 낳은 김에 마음잡고 정착하려는데 누군가의 신고로 다시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 5년을 살았으니 기박한 팔자이다. 맞고 밟히고 노역에 시달린 건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란다. 그 긴 형을 마치고 이차구차 돌아오니 남편은 뇌수막염으로 죽었고 여섯 살 딸은 훌쩍 커서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그런데 웬일일까, 착한 시부모가.
‘혼자 살지 말고 한국이라도 넘어가서 너 하나라도 행복하게 살아라.’
기가 막힌 진정성을 보여주니 놀라운 일이다. 처음에는 사양하면서도 여기저기 브로커를 몰래 알아보았고.
“이백만 원 내면 국경 통로까지는 태워다 줄 거이다. 목숨값은 거기까지고 그 후로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알아서 가시우. 내 의무는 여기까지.”
그렇게 탈북자 무리에 끼어 산 넘고 물 건너 걷고 신산의 사연으로 하염없이 걸은 것이다. 함께 따라 나온 여섯 살 딸이 가장 문제였다. 날씨까지 추워지니 ‘배고파’ ‘추워’ 하며 울먹이는데 실제로 얼굴빛이 파리한 게 금세 쓰러질 것 같은 것이다. 그래도 일행들로부터 뒤처지면 모든 게 낭패이므로 바싹 고삐를 쥐며.
“자꾸 울면 너만 산속에 뚝 떼어놓고 간다. 늑대가 잡아먹든 호랑이가 물어뜯든 엄마는 책임 못 지니까 살고 싶으면 알아서 움직여. 아니면 나 혼자 간다. 당장 일어섯!”
그렇게 귀엣말로 겁을 주자 오돌오돌 떨던 딸이 발걸음을 따라왔단다. 그때의 겁먹은 표정이 아직도 굳은살처럼 가슴에 맺힌 것이다. 한국행에 성공을 하고 시간이 흘렀는데도 딸에게 모진 겁박을 주던 그 기억이 아직 송곳처럼 아프단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타이어 공장 사무직에 취업하더니 익은 배 같은 성품의 한국 총각을 만나 17평 연립주택에 둥지까지 틀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시집간 딸이 아기만 낳으면 간병인이고 뭐고 죄다 마감하고 손주 하나만 보며 여생을 살고 싶단다. 그미는 이야기보따리를 털어놓는 와중에도 손수건을 꺼내 노모의 입술에서 흐르는 침을 연신 닦아준다.
아, 또 하나 사연이 있다. 김미진 간병인의 남편이 죽었으니 세속의 기준으로는 시부모와의 연이 끝난 거지만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 안부를 묻는다는 상큼한 스토리이다. 매달 10만 원씩 보내주며 해마다 명절 때는 따로 선물도 부치고.
그러다가 김규호를 힐끗 바라보더니.
“아저씨, 직업은 뭐예요?”
물으면서 무채처럼 얇게 썰은 사과를 박정아 노모의 입에 넣어주더니 김규호에게는 사과 하나를 통으로 건넨다. 정년퇴임한 선생이라는 말이 선뜻 떨어지지 않아 통으로 받은 사과 한 입만 어리버리 깨무는데, 먼저.
“농사 지으시우?”
그런 말은 이미 수도 없이 들었던 바이므로 아무렇지도 않다. 그게 김규호의 외연이며 눈에 보이는 실체임을 인정하는 중이다. 그랬다. 수십 년 교직생활의 이력에도 그가 중등학교 스승의 패션으로 비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혼술 단골이던 포장마차 아저씨는 ‘도배공이냐’고 물었고 제주도 여행 때 식당 아줌마는.
‘객지에서 밀감 따느라고 고생이 많다.’
도루묵 한 마리를 더 얹어주며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또 있다. 출퇴근길에 만난 시내버스 기사님도 직업을 묻더니.
‘진짜 선생님이냐?’
되풀이하며 묻기에
‘가짜 선생은 아니라오.’
교육청 신분증을 보여줘도 갸우뚱대는 것이다. 김규호는 괜찮다, 괜찮다, 며 사과를 한 입 깨문다. 베어 문 자국이 움푹 선명한 ‘이빨 자국 사과’이다.
성경에서, 모든 악이 사과로부터 온다고 설명했으니 그게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선악과이다. 하느님이 이브에게 산통을 겪게 하고 아담에게는 중노동을 하게 만든 성경 이야기는 각자 해석이 다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늙은 농부의 아내로 변장한 왕비가 준 ‘백설공주의 사과’가 있고 아들의 머리에 올려놓고 화살을 쏜 ‘빌헬름 텔의 사과’도 있다. 그리고 흑사병을 피해 캠브리지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만류 인력을 찾아낸 ‘뉴턴의 사과’로 이어진다.
‘에리스의 사과’도 흥미로운 스토리이다. 데살리아 프티아 국왕인 펠라우스가 데티스와 재혼할 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초대하지 않아 벌어진 사연이다. 에리스가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문구를 써서 연회석에 던지자마자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여신 셋이서 아귀다툼을 벌인 다음 마침내 그 질투가 트로이 전쟁으로 연결되는 긴장 드라마이다.
마지막으로 ‘튜링의 사과’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천재 수학자 튜링이 암호 해독기를 발명해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니, 2차 대전 승리가 영국의 처칠과 튜링 때문이라고 규정할 정도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법원은 튜링에게 동성애 질병을 고치기 위해 성호로몬 주사를 맞으라고 강제한다. 그 결과 발기불능, 유방의 발달, 중추신경 손상 등으로 영혼까지 파멸된다. 그가 결국 청산가리가 주입된 독사과를 먹고 목숨을 끊으니 튜링이 ‘한 입 깨문 사과’는 가둘 수 없는 진실이 된다. 훗날에 스티브잡스가 컴퓨터 이름을 ‘애플’이라고 명명한 이후 지구는 컴퓨터의 포로가 되었다.
다섯째 강소진 간병인(70세)과 5개월을 함께 했으니 가장 가깝게 의지한 셈이다. 언제부터였나, 박정하 노모는 야외 면회 때에도 자식들보다 강소진의 얼굴을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휠체어에 앉아 간병인만 연신 쳐다보는 해맑은 눈빛이 안타까우면서도 일면 다행스러웠다. 또 있다. 간병인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노모의 휠체어를 끌고 나와 김정하 노모를 모시고 등나무 산책로를 휘돌아오는 그 시간이 그나마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300명이 넘기 시작하면서 ‘거리두기’ 강화로 더욱 조이던 즈음이었다. 뉴스에 등장한 정은경 질병청장의 머리카락이 반백으로 변모하면서 ‘저러다가 쓰러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얼핏 스쳤다.
그 재활병원에서도 전원(轉院)을 강요하는 이유는 보호자 김규호의 재활치료 거부 의사가 가장 크다. 94세로 한 살 더 늘어난 노모를 물리치료실에 끌고 가 10여 분 이상 억지로 세워놓는 게 가슴이 아픈 것이다. 솔직히 치료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대학병원에서 수술과 시술을 거부하면 전원을 요구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활병원 역시 재활치료를 거부하면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는 것이며, 또 그게 맞다. 여동생 김규선은 강소진 간병인을 새로 옮기는 요양병원까지 동행하여 여전히 1인 간병인을 고수하고 싶어했다.
“함께 갈 수 있나요?”
“못 가.”
거절하는 강소진의 눈가에 눈시울이 그렁그렁 번지더니.
“지난번 할머니도 6개월 후에 내 눈앞에서 숨이 끊어지더니 몇 달 동안 꿈에 나타나는 거야. 미안해요.”
그러더니 미리 준비한 10만 원 봉투를 내미니 뜨악스럽다.
“환자가 마지막인 걸 알면서 따라가는 게 너무 무서워.”
그렇게 쓸쓸히 결별한 이틀 뒤에 전화가 온 게 마지막 사연이다.
“끝까지 함께 했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게 자신이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이번을 못 넘기고 꼭 돌아가실 것 같아서 무서워. 미안해. 그리고……나도 이제 간병인 그만해야겠어.”
꺼이꺼이 울음을 토하면서 짧은 인연이 끝이 났다. 그래도 노모의 얼굴을 보며 손도 잡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걸 깨달은 건 요양병원으로 옮긴 이후의 이야기이다.
동북부 위성도시인 그 요양병원으로 옮기자마자 모든 면회 시스템이 차단된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700명으로 불어나면서 고령층에서부터 백신 접종이 실시되면서 막연하나마 ‘코로나 종말론’의 기대도 생길 즈음이다. 백신은 고령자 순서를 원칙으로 하되 두 차례 맞아야 효과가 있으나 노약자의 경우 자칫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단다.
문제는 요양병원의 면회구조이다. 그동안 일반병원에서 요리조리 그물망을 피해서 면회를 시도하던 모든 시스템이 사라진 것이다. 딱 한 가지, 월 1회에 한하여 15분 동안 유리창 너머에서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낀 상태로 핸드폰 통화를 하는 게 유일한 소통이다. 그리고 병원 측과 작성한 동의서 내용은.
‘DNR(do not resuscitate 소생술 포기) 동의서는 작성된 상태이나 기본 치료는 할 수 있음.
요양병원에서의 보존치료 기준은 급성기 병원으로 전원하지 않고 증상치료를 하는 것들임. 예를 들면.
폐렴 : 항생제와 영양수액 치료 등.
패혈증 : 중심정맥 내 카테너 삽입, 항생제와 영양 수액치료, 상태에 따라 중환자실 전실 등.
호흡곤란 : 원인에 따라 약물과 산소 투여 등.
인공호흡기 : DNR 동의서를 작성했으므로 치료하지 않음.
그밖의 감염, 출혈, 소화기계 문제 등은 요양병원에서의 보존치료로 함.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의 대책
1. 적극적인 치료를 위해 대학병원으로 전원하지 않는다.
2. 모든 치료는 요양병원에서 한다.(치료비가 증가하지는 않음)
3. 보존치료를 거부할 시는 요양원이나 집으로 옮긴다.
1인 1실은 환자 하나와 간병인 한 사람이 따로 독방을 쓰는 구조로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케이스이다. 그리고 6인 병실에서 각자 개인 간병인을 두는 6인실 개인 간병인 제도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간병인 한 사람이 환자 6인을 모두 보살피는 공동간병시스템 등 여러 선택 사항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병원비 총계는 6500만 원, 두 달 전 노모 통장의 5천만 원이 바닥나면서 그 후 5남매가 1인당 80만 원씩 갹출이 시작되었으니 저마다 형제와 그들 부부끼리 불안증이 낑낑 생길 즈음이다.
또 한 가지, 몇 차례 면담으로 안면이 가까워진 수간호사 한 분이.
“공동간병실로 가세요. 좋은 자리가 나왔어요.”
그렇게 1인 간병인을 피하라는 언질을 받으면서 설핏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코로나 이후 병실 출입이 금지되면서 간병인 센터의 상태 체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된다. 점검이 불가능해지면서 간병인들의 성품에 따라 환자의 환경이 천양지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간병인 쪽으로 선택하려는데.
“얼마 사시지 못할 것 같은데요. 공동간병실로 가면 욕창이 생겨요.”
새로 만난 서성미 간병인(68세)의 그 언질을 들으면서 결심이 깨어졌다. 노모의 생이 진짜 얼마 남지 않으셨다면 경비가 더 들더라도 개인 간병인으로 이어가야겠다는 판단이다. 문제는 6인 병동이 자리가 없어 1인 1실 병동을 사용하니 그 대여로만 하루 5만 원씩 추가가 된다. 게다가 서성미 간병인이.
“11만 원인데요. 휴일 수당을 따로 주셔야 합니다.”
“10만 원만 하지요. 처음 시작할 때는 9만 원이었다가 올 초부터 10만 원으로 올랐고 지금 11만 원이니 저희들의 경비 감당이 쉽지 않네요. 게다가 6인실이 나타날 때까지 개인실 경비만 매일 5만 원씩 추가 요금이 발생해서…….”
실제로 간병인에게 바쳐야 되는 돈이 감당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미가 단호하게.
“아이고-, 할머니가 얼마나 더 산다고 꺾으려 해횻?”
강하게 도리질 쳐서 한발 물러서서 울며 겨자 먹기로.
“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인가요?“
“네 번이요. 모두 수당을 따로 받아야 해요.”
“그러면 월 330만 원에 또 유급휴가 대체 간병인 비용으로 44만 원이 플러스 되는 거네요. 간병비만 한 달에 374만 원을 쓰는 게 도저히 자신이 없네요. 게다가 6인실 자리가 나올 때까지 매일 5만 원씩 병실료를 내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런데 서성미 간병인의 눈빛이 홱 변하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노모를 놓고 돈, 돈, 돈 말씀하는 것도 불효라구요. 길어야 한 달인데.”
그 말이 비수처럼 아파서 얼떨결에 1인실을 수용했지만, 문제는 그 시스템이 연신 이어진다는 점이다. 막내 김규선과 전화할 때마다.
“5만 원을 더 주세요. 휠체어에 태우려면 몸이 무거워 균형을 못 잡아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형 사고예요. 그때마다 남자 간병인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 사람한테 월 5만 원이라도 얹어줘야 낯이 서겠어요.”
그렇게 5만 원을 더 보냈으니 밑 빠진 독의 바닥 구석까지 박박 긁어내는 격이다. 한번은 병원비를 계산하러 갔다가 출구에서 그야말로 우연히 서성미를 마주쳤을 뿐인데.
“세탁비 2만 원이 필요해요. 500원짜리 동전을 두 개씩 넣어야 세탁기가 돌아가거든요.”
‘세탁비 달라는 간병인은 처음인데요’ 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 돈이 만 원밖에 없네요.”
배춧잎 한 장 깎아서 만 원을 아꼈을 뿐이디. 사흘 뒤 병원비 정산하러 갔을 때에도.
“노모 등허리에 물집이 생겨서 연고를 발라줬어. 2만 원이요.”
마찬가지로 ‘물집은 병원에서 치료해주는 거 아닌가요?’라고 대들지 못했다. 그렇게 36일이 되던 어느 날 형제들이 공동간병실로 모시기로 결정한 건 요양병원 수간호사의 메시지도 이유가 된다.
안녕하세요.
박정하 노모의 뇌경색 발병 후 오랜 동안 적극적인 치료에 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요양병원으로 오신 후 점차 편안한 상태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욕창이나 폐렴도 없고 혈액 검사로도 특별히 나쁜 증상은 없습니다. 이제는 노모의 노환 정도를 생각하시며 돌봐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집중적 치료보다는 병원에 월 치료비로 일정액을 들이면서 돌봐드린다는 차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적극적인 치료도 하셨고 현재 보존치료를 하는 상태이므로 개인 간병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방금도 병실에 가봤는데 전반적으로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현재 간병을 잘 하시는 분을 찾아 그쪽 병실이 비었을 때 공동간병실로 바꾸시면 어떨까 해서 문의 드립니다. 지금 가장 중시하는 부분은 욕창과 폐렴입니다. 아직 그런 상황이 보이지 않지만 노모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가장 답답합니다.
면회 신청이 간신히 이루어졌을 때 유리창 안에 나타난 노모의 얼굴이 초록색으로 비친 것이다. 성성함의 상징인 초록빛이 사람의 얼굴에 씌워지는 순간 송장빛 색깔로 비친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때이기도 하다. 그나마 처음 5분가량은 휠체어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으니.
“아이고. 엄마!”
여동생 김규선이 유리창 앞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다. 그 순간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고개를 든 노모가 통유리 저쪽에서 입술 모양을 연신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무슨 내용인 줄 짐작할 방도가 없다. 뭔가 강렬한 SOS였을 거라고 떠올린 것은 나중 얘기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150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밤 8시 이후는 두 사람 이상 모이지 못하던 시국이다.
공동간병인으로 변경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서성미 간병인에게 전화를 했다. 스마트폰을 누르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몇 차례 심호흡도 했다. 마침내 수신음이 떨어지자 김규호가.
“지금까지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노모께서 오랜 시간 동안 행복하고 편안하게 보내셨습니다. 이제 저희들도 경제력으로 힘들기 시작하고 매달 수백만 원 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여기서 마치고 공동간병인을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간신히 두근두근 말을 열었는데.
“별 말씀을요. 이제 그만 하셔야죠.”
뜻밖으로 편안하게 마음을 열어준다. 너무 감사해서.
“이제껏 살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마무리하면서 그 간병인에게 불편했던 선입견을 지우는 중이었다. 저무는 여름, 미루나무 성성한 이파리를 보면서 노모의 모습을 쇠락을 글썽글썽 눈시울도 닦았다. 그런데 20분 후에 받은 전화기 저쪽의 서성미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딴판으로 격앙된 채.
“저는 당신네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서 모셨어요.”
앗 ‘당신이라니요.’라는 대꾸를 죽인 채 일단 듣기만 한다.
“우리 아들도 교수이고 둘째 아들은 변호사예요. 내가 돈이 없어서 이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불쌍한 노인네들 보살피며 도와주고 싶어서 스스로 고생을 자처하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정성을 다했다구요. 밥도 열심히 먹이고.”
‘어머니께선 콧줄식사만 했는데요.’ 그 말을 꾹꾹 누른 채.
“감사합니다. 마지막 남은 몇 시간까지 잘 보살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틀치 간병비를 더 얹어주셔야 마무리가 깨끗해집니다. 일산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고요. 어제 우리 교수 아들이 방문 왔을 때 짐을 얹어 보내지 않아서 택시에 꽉 차게 싣고 가야 해요. 트렁크 세 개를 버스에 태울 수 없잖아요.”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그러셨듯이 마지막 몇 시간까지 어머니 보살피듯 환자를 보살펴주세요.”
“그럴 테니까 택시비 30만 원을 주세요. 빨리.”
그 답변을 회피하며 깍듯한 존칭으로.
“선생님의 감사함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당장 주시고 끝내요. 30만 원.”
그랬다. 노모의 마지막 남은 세 시간이 두근두근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수화기 저쪽에서 고래고래 지르는 또 다른 목소리도 있었으니.
‘뭐가 저렇게 불효한 아들이 있어.’
옆자리 간병인들이 합세하여 지르는 고함소리가 쟁쟁하다.
‘즈이 어미 죽기 직전에 그 정도 효도도 못하나?’
그리고 노모 혼자 그 무시무시한 악담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무섭다. ‘설마 노모를 때리지는 않겠지’ 하면 벌벌 떨면서 좌불안석이다. 90평생 도도한 자존심으로만 살아온 박정하 노모께서 지금 온몸을 꽁꽁 묶인 채 아들에게 가해지는 집중포화를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터지지만 그래도 울컥을 꾹 누르며.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저희가 15개월 동안 1인 간병인을 모셨는데 이제 경비가 바닥이 났고 노모 역시 더 이상 케어를 받을 내용이 거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효한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보살핌을 부탁드립니다.”
코로나 격리만 없으면 당장 쫓아가서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그러나 수화기 저쪽에서는 아까보다 더 강하게.
“이거 보세요. 옆자리 6번 침대는 노모를 7년째 1인 간병인으로만 채용했어요. 부모를 위해 간병비만 3억 이상 들이면서 불만 한 번 터뜨리는 걸 못 봤어요. 배웠다는 분이 그렇게 효심이 약하면 복을 받지 못해.”
더 이상 견디다간 무슨 말이 터질지 몰라 전화기를 슬그머니 내렸다. 그 후 두어 차례 울리는 대포 소리 같은 발신음도 차단시킨 채 견뎌야 했다. 잠시 후 전혀 모르는 번호 하나가 떠서 ‘뭔가’ 하고 받았더니 서성미의 옆자리 간병인이었다.
“여기 서성미 간병인께서 환자를 어머니처럼 보호하고 정성으로 살폈어요. 그런데 헤어질 때 이런 안 좋은 모습이 되었으니 내가 잘 얘기해서 25만 원으로 깎아줄 테니 좋게 헤어지세요.”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마감하겠습니다.”
그날 하루는 어떠한 전화도 받지 않았다. 보호자를 달래고 야단치는 그 여자가 꽁꽁 묶인 노모에게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그미와 작별하니 흐르는 시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매달아도 한 시간은 지나갈 것이다.
그러다가 노모의 사진 한 장과 함께 메시지를 받게 된 게 마지막이다. 겁먹은 푸른빛으로 파들파들 떠는 노모의 사진이 오싹 소름 끼치는데.
‘사진 좀 오래 보라구요. 늙은 부모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구요. 저는 떠나지만 짐은 맡기고 몸만 빠져나왔으니 아직 병실에 들어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다시 병실에 들어갈 기회가 있다는 것도 겁박이다. 이런 때는 아예 대응을 포기한 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튿날 노모의 사진 석 장을 더 보내는 것이다. 빼빼 마른 수수깡 표정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 방법 이외는 없다.
그리고 또 다음날 벙어리장갑으로 포박된 사진 다섯 장을 보냈으니, 그게 이 세상에서 가장 처절힌 음울함이다. 아래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이대로 살다가 죽겠지. 크크크.’
그렇게 노모는 지금 공동 간병실에서 남은 생의 가장 젊은 날을 보내는 중이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맑고 청량한 초가을 햇살’이 솜털처럼 쌓이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