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도현_산山을 닮은 시정신과 인술仁術 그리고 예술혼藝術魂.hwp
산山을 닮은 시정신과 인술仁術 그리고 예술혼藝術魂
야성野城 이도현
(시조시인,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1. 서언序言
인산仁山 허인무許寅茂 선생이 1985년 첫 시조집 『백목련白木蓮을 상재한 후 참으로 오랜만에 시문선집詩文選集을 상재한다. 이번에 간행하는 선집은 시조집 『백목련白木蓮과 그 이후에 쓴 시조작품, 그리고 수필隨筆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간행한다. 구순九旬을 눈앞에 바라보는 노령老齡이심에 더욱 경하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전남 진도珍島에서 낳고 광주에서 의과대학을 졸업, 1969년 소아과전문의로서 경북 김천도립병원 의사로 봉직하면서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1918~2016) 시조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향목회鄕木會’란 문학동인회를 만들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조 문단의 길로 들어선다.
그 후 1973년 대전에 전입하여 ‘허소아과 의원’을 개업하고 의료원장의 소임을 다하면서 문학 활동을 계속한다. 1975년에는 후생일보 창간 8주년 기념 전국의사 수필 공모전에서「의창醫窓에 비친 모성애母性愛」란 작품으로 당선된다.
1977년부터는 시조시인 정훈丁薰 선생을 도와 시조전문 동인회 ‘차령시조문학車嶺時調文學會’를 이끌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이때부터 필자와 인연이 되어 선생과 나는 오늘까지 ‘가람문학회’ ‘대전문인협회’ 등에서 동도同道의 길을 걷고 있다.
백수白水 정완영 시인은 1985년 발간한 시조집 백목련 서문에서 “인산仁山은 시가 전업이 아니다. 인산은 도규계인刀圭界人이요, 그중에도 소아과 의사이다. 인산은 사람도 옥인玉人이러니와 시질詩質도 살결이 곱고 맑다. 작품을 할 때 오브제를 다루는 솜씨도 꼭 어린 아이 다루듯 조심조심 밟아 든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산 형은 의술과 예술을 쌍전雙全하였으니 의사上醫요 선의善醫임에 틀림없다.”고 격려하고 있다.
인산仁山은 그의 아호雅號와 같이 어진 산을 닮은 시조시인이요, 수필가이며 인술仁術을 천업天業으로 세우는 소아과 의사이다. 뿐만 아니라 사화書畫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 1973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문인화文人畵 개인전을 비롯, 국내외 작품전에 참가하여 대상을 수상하는 등 초대작가로 또는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탄탄한 자기 경지를 세워놓고 있다. 그러기에 인산은 의사이면서 시와 산문을 두루 넘나들고, 문인화에 빛나는 예술가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이렇듯 인산처럼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사람 또 있을까? 이제 선생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인자요산仁者樂山, 그리고 모정母情
<가>
넓은 들 맑은 시내/ 한품에 안고 앉아
천년(千年)을 하루같이/ 창창하게 받들었다
높은 봉(峯) 깊은 골 너머엔/ 일월(日月)마저 빗겨 돌고.
한 포기 푸나무도/ 정(情)을 주어 가꾸어서
꽃 피우고 열매 맺어/ 설레는 미풍 갖고
저 멀리 사유(思惟)를 보내/ 물, 구름도 풀어 보고.
소롯이 옷을 벗어/ 찬 겨울 흰 눈 이고
모진 독장(毒瘴) 맞는 데도/ 안으로 다진 인고(忍苦)
무거운 목숨을 안고/ 함묵(含默)마저 잊고 선 임.
한세상 사는 법을/ 임을 두고 배웁니다
넓은 자비 아픈 체념/ 따를 자 그 뉘인가
어진 산仁山 나의 아호(雅號)도/ 인자(仁者)되길 원함인데.
―「산(山)」 전문
<나>
장송(長松) 낙락(落落)함에
산은 더욱 높아오고
산정(山靜) 깨는 물소리에
별빛 피는 멧새소리
저녁놀
빗겨간 산창(山窓)
어스름이 앉는다.
―「산정山靜」 전문
작품<가>는 네 수로 구성한 연시조「산山」전문이요, 작품 <나>는 단수로 된 「산정山靜」전문이다.
작품 <가>에서 첫 수는 넓은 들과 맑은 시내를 한 품에 안는 산의 여유와 포용력을 묘사하고, 둘째 수에서는 꽃피우고 열매 맺어 설레게 하는 산의 미풍과 사유를 보내어 꽃과 구름을 푼다 하였고 셋째 수에서는 겨울에는 차가운 흰 눈을 이고 모진 독장毒瘴(열병을 일으키는 나쁜 기운)을 맞는데도 인고하며 무거운 목숨을 안고 함묵含默마저도 잊고선 임이라 산의 미덕을 칭찬하고, 넷째 수에선 그러한 산의 미덕을 갖춘 인산仁山을 자기 아호雅號로 짓고 사용하면서 인자仁者 되길 원한다고 노래한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라 하였듯이,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 하였다. 인산 허인무 선생은 아호雅號 인산仁山과 같이 산을 닮아 몸가짐이 무겁고, 덕이 두터워 산을 닮은 시를 짓고, 산을 닮은 서화를 그리며, 산을 닮은 인술仁術로 환아患兒를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있는 의사요, 선비이며, 시인이다. 이러한 인자요산 지자요수의 정서가 작품 <나>에서 그 뜻이 한 굽 점층된다.
작품 <나>를 보자.
시조時調는 고려말엽에 그 시형이 정착되면서 단수單首로 출발하였다. 초장, 중장, 종장 곧 3장 6구로 이어진다. 그래서 시조를 ‘3장章 미학美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3이라는 숫자는 동양에서 생명력을 갖는 리듬으로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 삼재三才 곧 하늘, 땅, 사람으로 구성된다.
초장에서 상想의 실마리를 뽑고 중장에서 그것을 이어 종장에서 의미를 반전反轉 또는 비약飛躍시킨다. 시조만이 갖는 내재율內在律, 이것이 시조의 오묘한 작법이요, 보법이다. 짧은 단수 안에 많은 뜻을 함의含意하는 고도의 절제미節制美를 갖는다.
작품 <나>를 보면 초장과 중장에서 산과 물소리를 대조對照시키고 종장에서 ‘저녁놀/ 빗겨간 산창山窓/ 어스름이 앉는다’고 시의 주제 ‘산정山靜’의 고요를 한층 심화시키는 노련한 기법을 썼다. 시조의 운치와 격을 살린 가작佳作을 여기서 만나게 된다.
풀어논 님의 앞섶
부끄리듯 젖 물릴제
잔잔한 눈매 속에
물결인 양 이는 미소
어미품 보듬는 정(情)이
성성(聖像)인 양 높아라.
날로 이는 그 재롱에
붙는 살 느는 사랑
꽃망울 피는 얼굴
꿈결에도 더듬으며
봄하늘 젖어 내리는
실비 같은 그 모정(母情).
―「모정(母情) 1」 전문
두 수로 된 「모정母情」이다. 첫 수는 엄마가 앞섶을 열고 젖을 먹이며 엄마와 아기의 눈이 마주치는 사랑의 교감交感을 묘사하고, 어미가 아기를 보듬는 정을 성성聖像으로 치환換置한다. 둘째 수에선 날로 커가는 아기의 재롱과 불어 오르는 살과 꽃망울 피는 아기 얼굴을 바라보는 엄마의 사랑을 실비 같은 모정母情이라 직유한다.
아기를 사랑하는 곡진한 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정처럼 강하고, 모정처럼 인자하며, 모정처럼 아픈 것 세상에 또 있을까? 소아과 의사로서 아기를 품는 엄마의 세정細情을 봄비처럼 풀어내고 있는 사랑의 진수眞髓를 이 작품에서 본다.
3. 백목련白木蓮과 사군자四君子
찬 겨울 도사린 몸
동토 밟고 홀로 졸다
불현 듯 도툼 가슴
부끄러이 여미더니
어느 결 벙그는 웃음
달무리에 실린다.
고운 빛 향기 속에
아라이 이는 살결
앉은 학鶴 환한 목숨
하마 날을 날개인 듯
나직한 하늘 받들어
그 심령(心靈)을 밝히고….
―「백목련(白木蓮)」 전문
두 수로 구성한 「백목련白木蓮」이다. 이 작품은 시조집 제호로 내세울 만큼 백목련처럼 결하고 밝으며 곱고 맑은 향을 품는다. 첫수에서는 목련 봉오리를 의인화하여 도툼 가슴 부끄러이 여미다가 벙그는 웃음이 달무리에 실린다 하였고, 둘째 수에서는 백목련을 금시 날개를 펴고 하늘로 비상하려는 학의 날개로 환치하고 있다.
작품을 전개한 상想이 곱고 맑으며 그것을 구성한 솜씨가 자연스러워 한 그루 아름다운 백목련의 자태를 눈앞에 보는 듯싶다. 문득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란 송나라의 소동파가 당나라 왕유의 시를 말한 대목이 떠오른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들어 있음이다. 나직한 봄 하늘을 받들고 서 있는 한 그루의 백목련을 그림으로 그려 낸다. 이 백목련은 곧 심령心靈을 밝히고 서있는 시인 자신이 아닐까? 시인의 맑은 심령까지 투영된 맑고 고운 작품이다.
<가>
동토(凍土)에 심은 불씨
마디마디 아픈 뜻을
설야심(雪夜心) 홀로 피어
쌍창(雙窓)에 받쳤더니
가는 달
빈 그리매도
가지에 와 걸렸다.
―「설매(雪梅)」 전문
<나>
엷어진 하늘가에
높이 드는 맑은 향기
빛바랜 향수 속에
먼 생각 고여 들고
조부님
고우신 풍도가
어려 오는 그 모습.
―「황국(黃菊)」 첫수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은 난을 치고 매화를 그렸다. 난과 매화의 향기 속에서 선비의 고결한 자세를 지켜왔다. 또한 그윽한 국향 속에서 그 품격을 지키고 꼿꼿한 대나무의 절의節義를 고수해 왔다.
인산 허인무 시인은 1973년 대전 송아지다실에서 첫 시화전을 개최했으니 그로부터 지금까지 장장 반세기가 넘었다 할까? 평생을 붓과 함께 문인화文人畵에 몰입한 셈이다. 때문에 시조창작엔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서화書畫는 진경眞境의 경지에서 일본, 중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작품<가>를 보자. 눈 속에 핀 설매雪梅를 동토凍土에 심은 불씨로 은유한다. 첫 행부터 독자를 혼절하게 만든 놀라운 표현이다. 통토를 열고 싹이 트는 매화의 아픈 뜻을 불씨로 보고 분에 심어 쌍창에 받쳐 놓으니 가는 달, 빈 그림자가 매화가지에 걸린다고 하였다. 놀라운 묘사요 상상이다.
필경 시인은 이 정경을 붓을 들어 서화로 그렸을 것이다. 앞에서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듯이 멋진 문인화 한 폭이 담겨 있다. 아니 그림을 먼저 그리고 시를 나중에 썼는지 모를 일이다. 시가 그림이요, 그림이 시가 아니던가?
작품 <나>「황국黃菊」에선 가을 국화를 먼먼 조부님 고우신 풍도風道를 상상하고 고절한 선비의 자세로 격格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터치의 기법은 전형적인 남도예술南道藝術의 진면목이 아닐까? 여기서 인산仁山의 예술혼藝術魂을 본다. 이 밖에도 사군자를 소재로 한 작품 「석란石蘭」과 「청죽靑竹」 등이 눈길을 끈다.
4. 세진世塵을 헐어버린 삶
<가>
하늘은 내려앉아
햇살은 매서운데
산과 들 나무숲은
숨죽인 듯 눈을 감고
눈부신 햇살 속에서
솔가지 받쳐 든 눈꽃.
흰 달빛 흰 눈에
흰 빛으로 옷을 입고
화들짝 반긴다
우리네 가슴속에
더럽게 쌓인 세진(世塵)을
말끔히 헐어버린다.
―「서설(瑞雪)」 전문
<나>
세월은 해를 먹고
해는 날(日)을 먹는다
불타는 탐욕 속에
허무해진 인생길
호수 속 가라앉은 황금알
엘도라도 망상의 꿈.
백주(白酒)에 얼굴 붉고
황금에 마음 검어
과욕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데
자적(自適)의 여울목 길에
무지갯빛 생명의 삶.
―「엘도라도 망상」 전문
위의 두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내용보다 그 궤를 달리한다. 따라서 두 작품은 종교적 안목眼目으로 걸러진 작품이다.
작품 <가> 「서설瑞雪」은 풍진風塵으로 물든 세상을 서설로 바꿔놓은 희고 애애한 신비의 세계를 예찬한다. 세상에 흰 눈이 내려 산과 들 나무숲은 숨죽인 듯 눈을 감고 눈부신 햇살 속에서 성자聖者인 양 솔가지 받쳐 들고 우리들 모두의 가슴속에 더럽게 쌓인 세진世塵(더러운 먼지)을 헐어버리고 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담았다.
작품 <나> 「엘도라도 망상」은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황금에 눈이 어두운 헛된 꿈의 전설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탐욕은 곧 멸망한다는 진리를 성경 말씀(야고보서 1;15-과욕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음을 본다.
인산은 기독교에 귀의歸依하여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살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아세阿世하지 않으며 성경 말씀을 실천하면서 구원의 삶을 지향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투영된 작품이라 하겠다.
5. 의창醫窓에 비친 모성애母性愛
다음엔 인산仁山의 수필 작품을 살펴보자. 인산은 1973년 ‘향목회鄕木會’ 동인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시조와 수필을 함께 썼다. 1967년에 후생일보 창간 12주년 기념 전국의사 수필공모에 「의창醫窓에 비친 모성애母性愛」 작품이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전략> 그래서인지 나도 하는 수 없이 그 지극한 사랑과 구슬 같은 눈물 앞에는 굴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엄한 병원규칙을 범하면서 그 어머니의 애원을 전면 받아들였다. 그리고 야간 간호사에게 특별히 잘 부탁하고 나는 돌아갔다. <중략> “우리 애기를 선생님이 꼭 살려야 됩니다. 정말 정말 부탁입니다.” 하며 내 손을 꼭 잡는 그 어머니의 손이 벌벌 떨렸고 또 두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그 순간 나도 눈이 캄캄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콱 막혔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이 지극한 모성애! 어떻게 하든지 이 모성애의 보답으로 꼭 아기를 완쾌시켜야겠다고….
생후 5개월 된 어린이 중병 환아患兒의 입원치료 이야기다. 야간에도 병실에 함께 있게 해달라는 엄마의 곡진한 애원을 거절할 수 없어 병원 규칙을 어기면서 까지 함께 입원시켜 완쾌시킨 사례를 쓴 실천수기이다. 사랑이 없이 어찌 환아를 치유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의술을 인술仁術이라 하지 않는가? 이처럼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표출할 때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수필가 피천득皮千得은 그의 글「수필」에서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중략>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도 산만散漫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優雅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라고 표현한다. 이 글이야말로 수필이 지닌 특성과 문학적 품위를 일목요연하게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인산仁山 허인무 선생의 수필도 이 경지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또 담배 전래에 흔히 따라다니는 일화〮는 윌터 로리경이 처음으로 런던에 가서 어느 날 파이프를 꺼내어 자랑스럽게 담배를 피워 물었더니 담배 피우는 것을 처음 본 식모가 주인 배 속에 불이 난 것으로 생각하고 머리 위에 양동이 물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중략>
담배와 관련된 이야기로 생각나는 것은 킹사이즈 궐련이다. 어느 죄인에게 사형대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 소원을 물었다.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내 사랑하는 아내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면 좋으니 궐련 한 개비 피울 동안만 면회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리웠던 아내를 앞에 두고 담배 한 개비 피워 입에 물고 그 담뱃불이 사라지는 동안 마지막 면회를 마쳤다. 그러고 나서 또 다시 법관은 그 죄수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무거운 입을 열어 조금 전에 피웠던 담배 길이가 너무 짧으니 앞으로는 좀 담배 길이를 길게 해주라는 부탁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유언에 따라 킹사이즈 담배가 만들어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윗글은 수필 「담배 연기 철학哲學」의 일부 인용문이다. 유머와 위트가 담겨 있어 재미있게 읽히고 있다. 좋은 수필은 위에서와 같이 멋과 위트가 넘쳐흘러야 한다. 그래서 독자에게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
6. 아기 예찬禮讚과 동심童心
<가>
그 잠든 어린 천사의 얼굴을 보라. 어디 한 구석에 먼지만큼의 티나 손톱자국만큼의 구김이 있는가? 아니 어디에 물방울 하나만큼의 얼룩진 곳이나 일그러진 곳이 있는가? <중략> 그래서 누군가는 여기서 우리가 종래 상상만 해오던 영적인 하느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아기 예찬 」 일부
<나>
어느 날 내가 퇴근길에 아이들 주려고 과자 한 봉지를 사왔다. 뜰에서 놀고 있던 애들이 아빠 과자 사왔다고 우-하고 아우성치며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다섯 살 난 우리 아이 친구도 와 있었다. 그래서 몇 개씩 모두 나누어 주고 나서 그 이웃집 애기도 몇 개 주니 부러운 눈초리로 가만히 받아 들었다. 그러자 우리 아이가 그 애 앞에 가서 우리 아버지가 사왔다 하며 자랑해대니 그 애 하는 말이 “니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를 바꿨으면 좋겠다.”며 가냘프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우리 애는 “안 해, 안 해 , 우리 아버지 안 바꿔, 안 바꿔.” 하면서 나한테 달려들어 두 어깨를 활짝 펴고 나를 못 가게 막았다.
―「동심(童心)… 다섯 ─ 우리 아버지 안 바꿔요」 일부
작품 <가>는 아기의 잠든 얼굴을 어린 천사의 얼굴로, 영적인 하느님의 얼굴로 묘사한다. 아기의 잠든 얼굴이 얼마나 천진하기에 천사의 얼굴, 영적인 하느님의 얼굴로 비유했을까?
작품<나>는 꼬마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다주고 그들의 동심을 관찰하고 사실묘사 한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다섯 살 난 꼬마 아들이 아들의 친구, 이웃집 아이에게 우리 아빠가 과자를 사왔다고 자랑하니 이웃집 아이가 “니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를 바꿨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때 아들은 우리 아버지와 안 바꾼다는 대화를 그대로 직접화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자 한 봉지에 아버지를 바꾸고 싶다는 동심과 바꾸지 않겠다는 동심의 갈등 묘사를 이렇게 그려 낼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뭉클하게 전해오는, 아니 깊은 사유의 늪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동심을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한참동안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조선 중기 유학자 이율곡李栗谷은 일찍이 그의 저서『성학집요聖學輯要』의 서문에서 문학의 최고 단계를 ‘선명善鳴’이라 했다. 문학은 선한 울림 곧 좋은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글은 발표하고자 하는 주제가 선명할 때, 솔직함과 진실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될 때, 착상이나 표현이 기발하거나 뛰어날 때 잔잔한 충격이나 감동을 안겨 준다.
수필 「불신병不信病」에선 오늘날 사회 요소요소에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아니 병들어가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음을 안타가워하고 있으며, 심지어 시인이 종사하는 의료계까지 이 불신풍조가 만연되어가고 있음을 몹시 개탄하고 있다.
이 외에도 「안경眼鏡과 인생人生」 「바이올린과 나」 「가을의 감각感覺」 「봄 동산의 따뜻한 미소微笑」 「비의 낭만浪漫과 비애悲哀」 등 읽을 만한 수필을 지면 관계로 언급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수필가인 몽테뉴는 그의 유명한 『수상록隨想錄의 서문序文에서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성실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 모두들 여기 내 생긴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것 아닌 나를 보아주기 바란다.” 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산仁山의 수필에서도 선생의 평소 삶의 이야기가 꾸밈없이 진솔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수필은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진솔하게 그려낼 때 감동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수필의 본령이 아닐까?
7. 결어結語
지금까지 인산仁山 허인무 선생의 간략한 생애生涯와 그의 시와 수필세계를 살펴보았다. 그의 시 속엔 그림이 들어 있고, 산을 닮아 장중한 자태를 품는다. 백목련白木蓮처럼 깨끗하고 담백하며 어린이를 닮아 사랑스럽고, 인자한 모성애母性愛로 세상을 감싼다. 매향梅香을 닮아 때로는 꼿꼿하고 그윽하며, 서설瑞雪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는 종교적 안목을 갖는다.
그의 수필은 청자연적으로 거짓 없이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선명善鳴, 착한 감동’ 그 것이었다.
인산仁山은 소아과 의사요, 시인이면서 수필가 그리고 문인화文人畵로 널리 알려진 작가요 예술가였다. 환아患兒를 살피고 치유하는 바쁜 시간을 나누어 틈틈이 시를 쓰고, 난을 치며, 예술혼을 빚고 있는 거룩한 생애는 우리 모두의 귀감龜鑑으로 우뚝 선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건강하신 연세에 그만한 과업을 쌓으신 분 또 있을까? 참으로 존경스럽다. 평생을 인술仁術로 살아오신 자애로운 경륜과 산을 닮은 중후한 시정신詩精神, 그리고 사군자四君子의 선비정신으로 예술혼藝術魂을 사르고 있는 선생의 삶은 한마디로 빛나는 탑塔이었다.
남은 하늘 봄길 위에 더 멋진 운치韻致로 천수天壽를 다 하시기를 빌어 드린다.
2018 봄
초록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