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의사소통의 일종이다
우리에게 문학이란 '의사소통'의 일종이다 - 라는 나의 의도된 답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라는 말의 지시적 공동성을 확인해야 하며,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메타물음('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무엇인가)을 물어야 한다.
사람은 삶에 대한 '되뇌임'을 하는 내면의 동공이 있다. 즉 '마음'의 움직임들이 있다. 이 움직임이 몸짓, 소리, 색, 글자 등의 매개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와 기호로 눌려'졌을 때, 그 기호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똑같이, 비슷하게, 혹은 전혀 반대로 의심하고……떠올리고……느낀다. '나'와 '다른 사람'은 뭔가 서로 통했다. 여기서, 기호에 대한 사회적 규약의 바탕 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간주관성'(間主觀性)이 전제된다. "다른 사람을 지각함으로써 나는 또 다른 나 자신과 관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그는 원칙적으로 그런 것처럼 동일한 진리에 열려 있으며, 내가 그런 것처럼 동일한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나의 주관성의 심층으로부터 나는 동등한 권리로 투입된 또 다른 주관성을 본다"(메를로 퐁티《지각의 우위》) 이러한 '또 다른 나 자신', '또 다른 주관성'의 존재에 의해 다른 사람과 뭔가 통하는 것을 메를로 퐁티는 '원초적 의사소통'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그러한 간주관성이 있기 때문에 의사 소통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의사 소통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가 전제되었다고 보여진다.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했을 때의 '우리'는 원초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러한 간주관적인 자장권을 가리킨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말하자면 '의미 공동체'이다. '우리'는 동일한 사회적 사건, 동일한 행동 양식, 동일한 역사 안에 있는 유적(類的)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로 고쳐서 묻게 될 때, '문학'의 함의는 앞에서 말한 '우리'의 의미 공동체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시적(共時的)(지금·여기의) 정의에 접맥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할 수 없음도 문학의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를 정의한 것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문학이 M.바이츠가 생각한 것처럼 '열린 개념'이기 때문에 정의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린 개념이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 각 시대마다 새로운 정의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의의 타당성도 그 정의를 부화한 공동체의 품에 품어져 있다. '문학'의 개념은 당대의 의미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쿤이 말한 '패러다임'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문학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은 그때그때마다 무엇이 문학으로 통용되고 있는지 그 '범주'의 문제로 넘겨진다. 문제를 '범주'의 축으로 돌릴 때 '문학'은 '문학적인 것'의 문제로 적분된다.
시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텍스트와 콘텍스트로 되어있다. 우리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의 기화된 어떤 상태, 어떤 마성을 띤 뽀얀 에테르 상태의 콘텍스트를 통과한다. '시적인 것'은 이같은 에테르 상태를 경험하면서 겪게 되는 의식의 화학적 변화에 의해 주어진다.
나는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시적인 것'은 '어느 때나, 어디에도' 있다. 낮게낮게 엎드려 다가가 나는 본다. 그것들의 관계를 나는 응시한다. 이발소 그림도 어떻게 보면 '시적'이다. 여공들의 자취방에 걸린 '생활이 비록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쉬킨의 시도 보기에 따라서 지극히 시적이다. 요컨대 나에게 시는 '시적인 것'의 '보기'(창조가 아니다!)에 의해 얻어진다. 시를 통해서 우리는 하마터면 못 보았을 것을 본다. 시적인 것을 '보면서 보여 주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시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확정적 기술'에 의해 답할 수 없다. 그것은 그때그때 시 속에 있다. 모든 시는 임재해 있는 '시적인 것'의 테를 그때그때 긋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어떻게' 쓰고자 하는가 하는 문제에 우리는 걸려들 필요가 있다. '시적인 것'의 포착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까지의 포착이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형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때그때의 내용이 그때그때의 형식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정말로 까다로운 문제는 '시적인 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이다. 시가 자기표현, 즉 자기 노출로써 얻어졌던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적인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낀 성질'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보다 주관적일수록 그것은 보다 독창적인 것으로 인정해 주었다. 개성은 사유재산의 예술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시적인 것'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속사정을 자세히 보면 '시적인 것'의 개념 자체가 주관과 주관 사이에 열려있는 '공통 감각', 즉 상식(칸트 용어)의 배관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혹은 느끼고 표현했는데 읽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 실패한 시들이 대개 그렇다. 어느 경우든 '시적인 것'은 극단적으로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주관성, 진정한 객관성의 다른 이름인 '간주관성'의 역장(力場) 속에 있다. '시적인 것'은 인간의 내부에만 있지도 않고 외부에만 있지도 않다. 즉 '내면의 외부'에 있고 '외면의 내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진, 간주관적이고 간인간적인 문화적 성층에 있다. 좀 거칠게 말하면 이 성층은 제도다. 다만 이 제도는 끊임없이 자가발생하기 때문에 그 테두리가 불분명하고 흐물흐물하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이 테두리에 자력처럼 흐르고 있는 힘을 받는다. 깜짝 놀랐을 때의 무의식적인 몸짓, 억양, 방언, 음식맛에 우리는 이미 물들어 있다. '시적인 것'도 이처럼 제도적이다. 즉 그때그때 시를 읽고 쓰는 사람들이 '시적인 것'의 자격을 부여하는 틀이 생기면 이 틀에 준해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심지어 이 틀을 갈아 끼우려는 노력도 틀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시적인 것'의 자격 부여와 그 틀의 형성이 시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의미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은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
문학의 이해에 있어서 텍스트 자체를 강조하느냐, 쓴 사람의 의도를 강조하느냐, 간주관적인 관계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1) 쓴 사람의 의도, 생애를 완전히 배제한 텍스트 분석에만 치중한, 골드만이 말한 '실증주의적' 방법. 2) 쓴 사람의 의도를 포함하여 그의 성장 과정, 좌절, 트로마, 콤플렉스의 추적에 의해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는 심리주의적인 방법 3)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쓴 사람, 읽는 사람의 간주관적인 콘텍스트 내에서 '문학적' 메시지의 주고받음을 중시하는 해석학적 변증법적 방법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관계다.
텍스트만의 분석은 뉴크리티시즘의 논리적 근거가 그렇듯이, 쓰려는 의도와 씌어진 작품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작품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쓰려는 의도와 씌어진 작품 사이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씌어진 작품과 읽혀진 의미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서 일어난다. 오히려 쓴 사람은 단수이고 읽는 사람은 복수라는 점에서 뒤에 차이가 앞의 차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리고 의도와 작품 사이의 차이도 '읽기'에 의해 노정된 것이다. 아무리 실증주의적으로 작품 분석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읽기'에 따라서 의미는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 문학은 '해석의 자궁'으로부터 비로소 탄생한다. 그런 뜻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해석될 수 있고 스스로 해석하게 하는 텍스트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친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또 한편, 쓴 사람의 의도만을 강조한다면 작품을 작가의 속마음의 유아론적인 폐쇄회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할 위험이 크다. 작가의 의도는 언제나 그의 텍스트보다 우위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의도대로 쓰다가도 씌어진 텍스트에 의해 그 의도를 수정하거나 포기해야 할 때를 만나기도 한다. '글쓰기'는 역으로 진행되고 있는 '글읽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쓰고 있는 텍스트에 대한 독자로서 쓰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를 정확하게 분석한다는 것은 문학의 이해에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충분한 문학 이해는 씌어진 작품의 분석과 쓰려는 의도에 대한 연구가 쓴 사람, 읽는 사람의 간주관적인 맥락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포괄될 때 이루어진다. 나는 이 '변증법적으로'라는 말에서 문학이 작가와 독자가 서로를 인정, 부정하는 대화적 기능으로 움직인다는 의미가 떠올랐으면 한다. 인간 특성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공동사회성(딜타이 용어)이 그들의 언어, 대화, 이해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기적적으로 언어가 있고 그래서 대화를 하고 이해를 한다. 따라서 문학적 언어 행위가 성립하려면 먼저 말하는 이(작가)가 그의 언어 행위의 필수 조건인 듣는 이(독자)와의 간주관적인 관계가 정립되어 있어야 하며, 그의 언어 행위는 듣는 이에게, 최소한 이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랬을 때 그의 언어 행위는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나아가서 행동을 유도하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가 없다면 문학적 언어 행위가 성립되지 않는, 문학의 없어서는 안될 묘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에 대한 인식은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문학적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기준 설정에도 관여한다. 문학은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
문학은 이미 현실에 참여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카타르시스'나 '대리만족'을 위해 작품을 생산하고 발표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제기해야지 그것을 심리적으로 쏟아 버리려(설사!)해서는 안된다. 또 작가는 문학 자체를 위해서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니다. '문학을 위한 문학'은 일종의 자폐증이다. 의사 소통이 안되는 문학, 즉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도려내어 버린 '무의미를 위한 문학' 이른바 지난 세대가 '순수문학'이라고 불렀던 문학은 구조적으로 현실을 반영하게 되어 있는 문학의 정치적 긴장을 회피하려는 하나의 방어 수단으로서 자율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방어적인 개념으로 취해진 순수문학의 비정치성('문학은 권력이나 정치 개념의 시녀가 아니다'-이어령)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서구 형식주의 미학이 발생했던 동기와는 반대로,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그들의 순수는 '도금'이었다.
어느 경우든, 문학은 현실에 이미 참여되어 있다. 현실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에게 문학은 사회적 행동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창조적 자아'가 따로 있고 '사회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의 첨예한 의식의 작동을 통해 생산되는 문학이 사회적 행동과 결합되는 방식은 자유로울 수 있다. 반영이냐? 해방이냐?
문학이 의사소통의 진정한 양식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느낌과 확신을 내적, 외적 억압을 받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담화 상황의 보장을 먼저 필요로 한다. 이 점에서 문학은 어쩔 수 없이 정치와 대응된다. 무엇보다도 문학과 정치는 동시대의 말을 공유하고 있다. 양자의 언어 사용은 그 목적은 달라도 듣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행동하게 하는, 말의 '감염력'에 크게 기대고 있다. 문학이 갖는 바로 이러한 잠재력(프로파갠더의 잠재력)이 정치와의 불가피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 말해서는 안되는 금기 사항들이 많은 억압적인 사회에서 문학은 그래서 당대의 유언비어에 해당한다. 그런 사회일수록 매스컴은 대형화되고 특히 전파 매체는 국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직접 감독하에 놓여있게 된다. 매스컴은 反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어떻게 보면 좀 무정할 정도로 정직한 의사 소통의 전형인 문학은 따라서, 진실을 알려야 할 상황을 무화시키고 있는 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 못 하게 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것에의 도전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까? 어떻게 침묵에 사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
나는 시에서, 말하는 양식의 파괴와 파괴된 이 양식을 보여주는 새로운 효과의 창출을 통해 이 침묵에 접근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텍스트를 눈에 보이지 않는 콘텍스트 속에 잡아 넣어 우리에게 낯익었던 것들, 이르테면 신문의 일기예보나 해외토픽, 碑銘, 전보, 연보, 광고문안, 공소장, 예비군 통지서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트콜들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주 '낯설게' 느끼도록 하는 효과에 나는 치중한다. 이런 고리타분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시 특유의 고상하고 고결하고 고요한 영역을 점유했을 때 독자들이 받으리라고 기대되는 당혹감, 불쾌감을 나는 노리고 있다. 놀라워하기를 나는 바란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즉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 현실을 의문부호로 놓음으로써, 침묵에 쌓인 현실의 꼴을 더듬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연극에서 시도했던 '소격효과'와 유사하다. 그가 주장하듯 '모든 주어진 것들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려면……낯선 안목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 '낯선 응시'에 의해 시에 '시적인 것'을 기화시키는 콘텍스트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갓난 송아지가 세계를 보듯 물끄러미 보아야 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을 갑자기 낯선 현실로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생기는 '시적인 것'의 콘텍스트는, 그러므로 현실해방의 의미를 갖는다. 즉 '이 현실 말고 또 다른 현실이 있으리라는,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현실이 그 현실로 바꿔졌으면 좋겠다는 기대, 소망과 닿아있다.' 이런 기대와 소망이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적 꿈이라면 모든 시, 모든 예술은 크든 작든 현실 해방을 예시하는 방식으로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적 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다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세계 변화의 잠재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자기 노출의 대가이며 그것은 약간 '철딱서니없는' 천진성의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문학의 현실 인식이 사회과학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과 조금 다르게 현실 인식을 다져간다는 점에서 그 몫이 남는다. '모든 문학적 현상들은 경제적 의미를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또 경제적 의미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마찬가지로 시는 경제를 초월하지도 않고 경제에 환원되지도 않는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그 징후를 예시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래서 독자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징후의 내적 의미를 '자발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해방을 예시하는 방식이다.
나는 70년대와 80년대에서 질적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오직 같은 문제가 더욱 심화, 악화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문학적으로 요구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종류의 삶, 소재, 주제의 표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표현일 것이다. 나는 암중모색 중이다. 전망은 훨씬 후에 생길 것이다.
세계는 모순의 신호들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