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운 인생>
한국적 실용주의 탁석산,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국인이 사는 방식
현세주의
한국인은 논리를 싫어한다. 무슨 말을 논리적으로 하면 “세상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아” 라는 대꾸가 돌아오기 일쑤이다. 한국문화에서 선과 악, 참과 거짓은 별로 영향력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현실세계인 이 세상만이 ‘하나의 세계’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라는 믿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 세계는 ‘유일하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뤄야 하고 모든 것을 마쳐야 한다. 따라서 한국인은 하루하루가 축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에 안 가고 삼삼오오 모여서 회식하고 즐기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이 세계를 넘어서 저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융합’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잘 싸운다. 싸우는 것을 보면 다시는 안 볼 사람들처럼 큰소리를 지르면서 온갖 욕을 하고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들추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한다. 그들은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만난다. 한국인은 열심히 큰소리로 싸우지만, 돌아서면 이 세상이 전부이고 시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다시 잘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인생주의 한국 사람들은 일은 대충대충 하는 면이 있지만 인생을 즐기는 데는 능숙한 사람들이 많다. 밤낮 없이 활기찬 거리, 시끌벅적한 노래방, 싸우는 소리가 가끔 들리는 식당, 소란한 지하철과 버스, 이 모든 것이 역동적이다. 이 역동성은 인생주의의 표현이다. ‘인생을 즐겁게 살자’ ‘일보다 인생이 중요하다’ 일, 회사, 기업보다 소중한 것이 인생을 즐기는 것. 한 번뿐인 인생이니만큼 즐겁게 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쾌락이 한국인이 추구하는 즐거움이다. 그것도 감각적인 쾌락이다. 보는 것, 만지는 것, 느끼는 것, 맛보는 것, 듣는 것 등에서 즐거움을 찾고 이를 극대화하려 한다. 전시장에서 만지지 말라는 표지가 있어도 이를 만지고 본다. 노래방에서는 한 번 잡은 마이크를 좀처럼 놓지 않는다. 식당에서는 배가 터지도록 맘먹고 먹으려 하며, 술을 마시면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통음을 한다. 감각적 쾌락만을 말한다면 오해를 부를 수 있으나, 한국에서는 감각적 즐거움이 지적인 교감을 동반한다. 술을 마시더라도 혼자 마시지 않고 여러 사람과 말을 하면서 어울려서 마신다. 말이란 지적인 행위이다. 인생주의, 한 번뿐인 인생, 즐거우면 됐다.
허무주의 인생무상, 일장춘몽, 공수래공수거. 흔히 듣는 말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한국인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세속적 성취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바닥에는 인생무상의 사고가 자리한다. 결국 인생은 짧은 꿈에 불과하다. 허무주의는 한국인의 삶의 양식을 건강하게 만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허무주의가 어떻게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가? 허무주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원래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살고, 실패를 한다 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운을 넘어서서 인생이 결국 허무한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끔씩 자신을 책망하거나 운을 탓하기도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평안을 유지한다. 능력이 있는 사람, 운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마음의 바닥에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액운이 있으면 그걸 피하려고 자비와 축복을 소원한다. 그런 기원과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허무주의라는 더 견고한 안전판이 있어 한국문화는 건강하다.
이상이 한국문화를 떠받치는 세 기둥이다. 즉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 현세주의와 인생주의가 두 축이지만 허무주의는 이 둘을 건강하게 하는 안전판이다. 한마디로 ‘한 번뿐인 인생, 어차피 허무한 것이니 즐겁게 살다가 가자’ 로 요약할 수 있다. 서양의 과학기술도 한국에 오면 인생의 즐거움을 배증시키는 도구가 된다. 기초과학이 부실하다 해도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초연구야 다른 나라 것을 이용하면 되니까. 또한 자본주의는 현세주의, 인생주의와 결합되어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을 낳았다. 돈이 있으면 인생은 즐거워질 거라는 믿음이 근면한 한국인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돈은 쉽게 벌리지 않으며, 돈에 집착하다보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수가 있다. 이 때 허무주의가 역할을 한다. ‘너무 애쓰지 마라. 결국 빈손으로 가는 거니까’
실용주의가 중심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로 무장한 한국문화는 강하다. 한국 성공의 상당 부분은 이런 특징들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만으로는 한국문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방법론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최근 100여 년간, 위 세 가지 특징 외에 실용주의를 택해 왔다. 실용주의란 한마디로 좋음을 추구하는 삶이다. 한국인은 서양과 같이 진리를 가지고 씨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찾았다. 인생주의는 한국 실용주의의 목적이다. ‘잘 먹고 잘 살자’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유용하고 ‘좋은 것’이다. ‘좋음’이라는 개념은 포착하기 힘든 개념이다. 무엇이 좋다고 말할 때 그 기준은 주관적이고 애매하다. 좋다는 말보다 더 상위의 개념은 찾기 힘들다. ‘좋음’은 진, 선, 미의 상위개념이다. 한국인은 최상위 개념인 좋음과 함께 살고 있다. ‘좋다’는 것은 인생에 좋다는 뜻이다. 실용주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에 쓸모 있는 것은 좋다’, ‘∼에 유용한 것은 좋다’ 는 구조이다. 최근 100년 간 ‘인생의 즐거움에 유용한 것은 좋다’는 구조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에’에 들어가는 말은 꼭 ‘인생의 즐거움’만은 아니다. 가령 ‘영혼의 정화’라든가 ‘영혼의 정화를 위한 수행이나 고행’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실용주의를 택한 데는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이다. 위 세 가지 사상이 실용주의를 키워낸 배경이다. 한 번뿐인 세상,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 인생이 허무한 것이다. 그렇다면 즐겁게 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실용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인생의 즐거움에 유용한 것은 좋다’
(2014.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