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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를) 보면 칠척(七尺)의 육신(肉身)을 가벼이 하고 생명을 홍모(鴻毛)같이 버리고 의리를 태산(泰山)같이 무겁게 하라”는 전해오는 대표적인 김녕김씨 가훈이다.
김녕김씨 관조 김시흥(金時興) 묘.
단종복위 꿈꾸던 충신들의 서글픈 역사와 은거
개성 송악산 관조묘 확인할 길 없어 가묘 설치
나라를 위한 충절의 가문..역사교육 현장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는 김씨이고 김씨는 가야계열 김수로왕 후손과 신라계열 김알지(金閼智) 후손으로 나뉜다.
김수로왕 후손은 김해김씨를 비롯해 김해허씨, 인천이씨, 양산이씨 등으로 이들은 ‘가락중앙종친회’를 조직해 유대를 다지고 있다.
김알지(金閼智) 후손은 경주김씨를 비롯해 광산, 김녕, 안동, 의성 등 본이 다른 50여개 김씨와 안동권씨, 광산이씨, 강릉왕씨, 수성최씨, 곡산연씨, 철원궁씨, 태안사씨, 감천문씨 등 아예 성이 다른 7개 성씨가 있다.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보면 신라 탈해왕 4년에 경주 계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신하를 보내 살펴보니 금궤 안에 총명하게 생긴 아이가 울고 있어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과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한다.
경주김씨측이 1958년에 편찬한 <김씨대종사>에서는 김알지의 후손이 신라-고려-조선에 걸쳐 전후 600여 본관으로 분종(分宗)됐고, 그 중 266본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비교적 가문세계가 분명한 종파로 김성(金姓) 50여본과 동원이성(同源異姓) 7성씨를 들고 있다.
이 50여본 중에서도 헌강왕계인 광산김씨와 무열왕계인 강릉김씨. 신문왕계인 영동김씨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경순왕의 후손이고, 경순왕 후손 중에는 경주김씨-김녕김씨-안동김씨-의성김씨 순으로 후손들이 많다.
충절의 가문 김녕김씨의 복잡한 가계도
경순왕 후손 중에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김녕김씨의 관조(貫祖)는 김시흥(金時興)이다. 김녕김씨의 인구는 지난 2000년 통계 기준으로 16만2000가구에 51만3000여명에 이른다.
김시흥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927~935)의 8세손으로 고려 인종 때 묘청과 조위총의 난을 평정해 금녕군(金寧君, 현재의 김해)에 봉해졌고, 벼슬은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녕김씨의 가계도가 복잡한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효와 충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가문의 전통이 깊게 깃들어 있는 탓에 역사 속에서 부침이 많았다.
“의(義를) 보면 칠척(七尺)의 육신(肉身)을 가벼이 하고 생명을 홍모(鴻毛)같이 버리고 의리를 태산(泰山)같이 무겁게 하라”는 전해오는 대표적인 김녕김씨 가훈이다.
김녕김씨는 김알지 후손이지만, 가락국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같은 지명인 ‘김해’를 본관으로 삼고 있어 조선말까지는 김해김씨를 선김(先金), 김녕김씨를 후김(後金)으로 불렀다.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지명이 금관-금주-금녕 등으로 부르다가 고려말에 김해로 개칭된다. 조선말 고종 2년에 김녕김씨 후손들이 상소를 올려 드디어 1865년 왕명으로 본관을 금녕(金寧)로 확정했다가 1971년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면서 ‘김녕’으로 결정해 부르고 있다.
하지만, 조선말 당시에는 교통과 소식이 원활하지 못해 김시흥의 후손들 모두가 본관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김해김씨 법흥파, 북청파, 백촌공파, 경주김씨 백촌공파처럼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을 정도로 통합은 쉽지 않았다.
고려말 충절로 절의 지켜내다
김녕김씨 후손들은 조선이 창건되자, 충절로 절의를 지켰다. 김시흥의 증손자 김중원(金重源)은 고려말 형부시랑을 거쳐 아부상서에 증직됐지만, 고려가 멸망하자, 단식으로 순절했고, 김중원의 손자 김광저(金光儲)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버렸고, 태종 이방원이 이조판서를 내려 회유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이어 호조판서를 지낸 김광저의 아들 김순(金順)도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충북 옥천에 낙향해 망국의 한을 달랬다. 김순의 장남이 김관(金觀)이고, 김관의 장남이 계유정난으로 가문을 위기로 몰았던 김문기이다.
반면에 김인찬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조선 개국 일등공신이 됐고, 익화군(현재의 양평)에 봉해져 좌찬성(종1품)까지 지냈다. 그 후손들이 경주김씨 익화군파, 김해김씨 북청파, 양근김씨 등으로 이어졌다.
단종 복위 꾀하다 가문 위기
김녕김씨 가문의 최대 위기는 조선 세조 때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단종 복위를 꾀한 계유정난 때 멸문의 화를 입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진다.
1455년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였던 백촌 김문기(金文起)가 박팽년,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를 위한 비밀결사를 지휘했고, 군대동원을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거사는 김질의 밀고로 무산됐고, 모의 가담자들은 모진 고문 속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사육신이 됐다.
당시 영월군수였던 김문기의 아들 김현석(金玄錫)도 함께 참수를 당했고, 그의 손자 김충주(金忠柱)와 증손 김현남(金玄南), 5세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로 가문을 빛내 ‘오세충효정문(五世忠孝旌門)’이 세워졌다.
하지만 부인과 딸, 며느리 등은 공신들의 노비로 넘겨졌고, 일가들은 유배를 가거나, 역적의 누명을 쓰고 본관마저 숨기며 살아야 했다.
그 후 김문기는 275년이 지난 영조7년(1731년)에 복권되고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게 돼 충의공파 파조가 된다. 하지만 김문기를 파조(또는 관조)로 하는 가문은 김녕김씨 충의공파를 비롯해 경주김씨 백촌공파, 김해김씨 백촌공파로 나뉘져 있고, 적통시비가 법정으로 이어진 적도 있을 정도로 복잡하다.
당시 10대 종손인 김준(金遵, 1409~?)은 조선 왕실 친척들을 관리하던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정1품)를 지내다가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종손 김준 가문보존 위해 고흥에 은거
김준은 광주유수(廣州留守, 정2품)를 지낸 김현의 아들로 세종 때 집현전대제학과 좌참찬, 병조판서 등을 지낸 문숙공 안숭선의 제자이자, 사위였고, 천문, 지리, 실학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김문기는 종손인 김준의 사종숙(四從叔, 10촌)으로 단종복위라는 거사를 앞두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절친한 지인인 전라도 흥양현감에게 김준의 은거를 부탁한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김준은 종숙인 김문기의 “가문을 지키라”는 뜻에 따라 서울 필동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현재의 고흥군 과역면 가산마을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당시 흥양현감은 정1품 벼슬을 지낸 김준의 은거를 위해 풍수지리상 터가 좋은 이곳 월악산 기슭인 가산마을로 정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지원했다.
김병우(82, 고흥군 과역면) 김녕김씨 영돈령공파종회장은 “당시 흥양현감은 한양에서 내려온 김준 공을 위해 마을 앞에 만지정(晩池亭)이란 정자를 세워주고 그 앞에 연못까지 만들어 마을주민들에게 고기를 잡아 넣어주도록 해 낚시로 시름을 달래도록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자는 현재 콘크리트 위에 기와를 얹은 정자로 변했고, 연못은 메워져 논으로 사용되고 있다.
은거 중이던 김준은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가 있던 단종이 결국 죽임을 당하자, 마을 뒷산인 월악산 정상 봉우리에 올라가 영월 땅을 향해 통곡하며, 3년 복상을 스스로 치른 충신이었다. 그 후 이곳에 뿌리를 내린 김준은 김녕김씨 영돈령공파의 파조가 된다.
세조는 정권이 안정되자, 영돈령부사를 지낸 김준에게 좌의정을 하사하며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자제들과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에만 전념했다.
임진난 등 위기마다 목숨 바친 충신 배출
하지만, 김준의 손자 김원경(金元慶)은 사헌부 지평(정5품)을 지냈고, 증손인 김구룡(金九龍)은 이조정랑, 병조참판(資憲大夫行兵參判)을 지냈다. 또 그는 남이 장군과 함께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전라도에 정착한 김준의 후손들은 임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김준의 5세손인 김광협(金光鋏)은 무예가 뛰어나 행주대첩과 수원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휘하에서 고금도해전,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2등훈(宣武原從二等勳)에 추서됐다.
그밖에도 팔공산싸움에서 전사한 김유부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두 아들,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나주 충장사에 배향된 순천부사 김언공, 항일투쟁에서 김도현, 김한종, 김재용 의사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바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무엇보다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김녕김씨 가문에서 배출됐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신정권의 종말을 고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3당 합당으로 문민시대를 연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그 외에도 김녕김씨 주요 인사로는 김석수 전 총리, 김명규ㆍ김진재ㆍ김광일ㆍ김문원 전 국회의원, 김운용 전 대한체육회장, 김진표ㆍ김세연 현 국회의원 등이 있다.
충정공파 후손인 YS의 3대조 때 고흥군 두원면 관덕마을에서 거제도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정공파의 파조인 김준영(金俊榮)은 임난 당시 선조의 의주 피난길과 한양 환도 때 어가호위를 한 공으로 호종공신 분성군에 봉해졌고, 숙종 때 충정이라 시호를 추서받았다.
이 충정공 후손인 김오룡이 병자호란 때 충남 천안에서 남하해 고흥군 두원면 관덕마을로 입향해 그 후손만 14대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뒷산인 직금산이 선조들의 묘지가 조성돼 있다.
이곳에서 바로 YS 선조들의 시제를 지내는 등 깊은 관련이 있지만, YS가 이곳을 방문한 적도 없었고, 대통령 재임시에도 특별히 챙기거나, 신경을 썼다는 흔적은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시흥 관조묘 고흥 가산마을에 봉안
지난 4월 6일 전남 고흥군 과역면 가산마을에서는 김녕김씨 관조인 김시흥의 묘지가 봉안된 가운데 김녕김씨중앙종친회(회장 김종빈 前 검찰총장) 주관으로 전국에서 1000여명의 종친들이 대거 참석해 고유제가 열렸다.
우리나라 주요 성씨 가운데 관조 묘지가 고흥 땅에 봉안된 것은 처음이자,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이날 종친의 일원인 YS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해 결국 참석하지 못했다.
이날 고유제는 강풍이 예고된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김덕룡(72)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을 비롯해 김봉조 전 국회의원(14대), 김재현 전 한국토지공사 사장 등 김녕김씨 주요인사들도 대거 참석했으며, 민주통합당 김승남 국회의원과 박병종 고흥군수, 박금래 고흥군의회 의장 등 지역인사들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원래 관조인 김시흥의 묘지는 황해도 개성 송악산에 있는데, 분단 상황에서 직접 찾아가 시제 등을 지내지 못해왔고, 지난 2012년 김종빈 중앙종친회장 취임 이후 가묘형태의 묘지설치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돼 이날 김녕김씨 종손이자 10세손인 김준의 묘지가 들어서 있고, 영돈령공파 본산인 월악산 기슭에 가묘로 봉안된 것이다.
이곳에 들어선 관조묘 헌성비 비문의 문구는 최근덕 성균관장이 지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다.
이날 김종빈 중앙종친회장은 "관조 묘소가 개성 송악산에 있다고 하나 분단된 현실에서 확인할 길이 없어 제대로 모시지 못해 안타까웠다"면서 "전국의 종인들이 뜻을 모아 고흥 가산마을에 관조묘소를 봉안하게 된 것은 늦은 감이 있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김녕김씨중앙종친회는 매년 4월 전국의 종친들이 고흥 가산마을에 모여 고유제를 지낼 예정이다.
역사가 흐르는 고흥 가산마을
특히 이곳 가산마을에는 김준의 묘지는 물론 김준, 김구룡, 김언량, 김언공, 김광협, 김기추를 모신 사당인 봉암사(鳳岩祀)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봉암사는 현재의 자리에서 우측 위쪽에 있었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폐령 때 철거됐다가 1997년 종친회에서 현재의 장소에 다시 세워 매년 음력 3월 8일에 모신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봉암사 옆에는 ‘이여제(二如齊)’ 라는 오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여제(二如齊)’란 중용에서 “두가지가 같다”는 뜻을 지닌 말로 이 건물은 충무공 이순신의 첫 수군부임지였던 발포진의 동헌건물을 고종 때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건물은 5칸 건물로 동쪽 방은 노인들이 머무는 방이고, 서쪽 방은 젊은 선비들이 글공부를 하던 방이다.
김병우 종회장은 “이 이여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관리 및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아쉽다”며 “마을 앞에 시제답 10마지기(2000평)로 관리인이 모두 관리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고 수리비 등 관리비가 많이 들어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는 봉암사를 중심으로 신도비와 유허비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 신도비는 김준이 서울 필동에서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과정을 새겨놓은 비석이고, 유허비는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생활상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이제 가산마을이 50만이 넘는 김녕김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인 본향으로 거듭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또 마을 골목마다 단종을 향한 충신의 애환이 흐르고 은거생활로 가문의 뿌리를 내려야 했던 어느 가문 종손의 손길이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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