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재적 비평이란?
분야 | 현대 시 |
목차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꼭 작가가 살았던 삶이나 시대를 알아야 작품을 잘 읽을 수 있나요?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배경 지식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달리 보인다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음미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각도와 방향에 따라서 달리 보이듯이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어느 관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지요. 작품을 창작한 사람의 관점에서 감상할 수도 있고, 작품에서 반영하는 현실을 고려하면서 감상할 수도 있으며, 독자들이 무엇을 느끼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감상하는 방법도 있지요. 물론 작품의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 독자, 현실 세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품 속에 사용된 언어라든가 작품의 구조 자체에만 주목해서 감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작품 자체에만 주목해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감상하는 방법을 ‘내재적 비평’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다른 말로 ‘절대주의적인 관점’이라고도 하지요.
작품 자체에만 주목하라!
내재적 비평은 작품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 독자, 현실 세계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작품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작품을 외부 요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내재적 비평은 시와 소설을 비롯한 모든 문학 작품에서 적용 가능합니다. 시에서는 주로 어조, 운율, 이미지, 수사법, 시상 전개 등의 요소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소설에서는 서술자라든가, 구조, 인물의 유형, 문체, 시점 등을 중심으로 감상합니다. 내재적 비평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짧은 시 한 편을 감상하며 알아보도록 합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위 시는 전체 3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연의 첫 행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반복적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지요. 또한 ‘~리라’라는 어조를 사용하여 화자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 시에서 주목해야 할 이미지로는 ‘이슬’과 ‘노을빛’, ‘소풍’ 등이 있습니다. 모두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지요. 세 가지 시어의 공통점은 모두 ‘잠시’ 동안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인생이 잠시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 시어들은 모두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시적 화자는 인간의 짧은 삶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볼 수 있듯이 시적 화자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아름다웠더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새벽빛 와 닿는 이슬이나 노을빛 등을 소재로 활용한 것도 삶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하려고 동원된 것 같습니다. 시적 화자는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않지요.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겠지만 그 유한성을 깨닫고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시적 화자의 겸허한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볼까요? 방금 시를 감상한 부분에서 혹시 시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나요? 아니면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상과 관련된 언급이 있었나요? 그 어디에서도 작품 외적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의 이미지와 어조, 언어에 대한 탐구만이 있을 뿐이지 어디에도 작가, 현실, 독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지요. 이처럼 작품 자체만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내재적 비평이라고 합니다.
내재적인 관점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나요?
내재적인 관점은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기 때문에 작품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가 필요하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내재적 비평이란?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의 차이?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를 공부할 때 감정이입이라는 말과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둘 다 화자의 정서를 다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라는데 차이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정말 슬픈 건 누구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감정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온갖 정서를 타인과 나누고 싶어 하지요. 타인에게서 공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시에서도 감정을 다른 것과 함께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감정이입이지요. 이 말은 독일의 헤르만 로체가 1858년에 처음 사용한 표현입니다. 시적 화자의 감정을 다른 대상에 이입하여 마치 대상이 화자의 정서를 함께 느끼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 중에서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김소월, 「초혼」 중에서
백석의 「여승」에서 “산꿩도 섧게 울은”이라는 말에서 ‘섧게’는 ‘서럽게’를 줄인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산꿩이 서러워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요. 산꿩은 서러움을 느끼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산꿩이 시 속 상황을 이해하고 서러움에 빠지기는 더욱 힘들겠지요. 따라서 산꿩이 서럽다는 것은 시적 화자가 느끼는 서러움을 산꿩에 이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소월의 「초혼」에서 사슴의 무리가 슬피 운다고 했지만 사슴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간이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슬프다는 감정은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이입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의인법으로 표현된 것들도 감정이 이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객관적 상관물 :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상
자, 이제 감정이입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객관적 상관물’을 살펴봅시다. 객관적 상관물은 20세기 초 영국의 문예비평가이자 시인인 T. S. 엘리어트가 사용했던 말로 그 역사가 감정이입보다는 짧습니다.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주관적으로 바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대상이나 정황에 빗대어 표현할 때, 그 대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슬프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쓰지 않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구슬프게 내리는 비’를 동원할 때 바로 ‘비’가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정이입에 사용된 표현들은 모두 객관적 상관물이 됩니다. 백석의 「여승」에서의 ‘산꿩’과 김소월의 「초혼」에서의 ‘사슴’은 감정이입의 대상이기도 하고 객관적 상관물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 상관물 중에는 감정이입이 아닌 것들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가 어떤 정서를 느끼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대상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화자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갖지 않더라도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라면 객관적 상관물로 볼 수 있지요.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 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중에서
시적 화자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침상도 없이 비참하게 운명하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쓸쓸하고 힘겹고 외로운 정서를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지요. 따라서 풀벌레 소리는 화자의 정서를 직접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화자가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풀벌레 소리에 감정이입이 직접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화자의 정서를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객관적 상관물은 감정이입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감정이입 외에도 화자의 정서에 기여하는 모든 대상이나 정황 들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범주의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감정이입은 슬프다, 기쁘다, 자랑스럽다 등등의 감정을 드러낼 만한 표현이 있는 경우이고, 그런 말이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감정을 일깨우는 대상이나 정황이 존재하면 그것은 객관적 상관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한다는 표현도 가끔 눈에 띄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감정을 절제한다는 건 화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코미디 배우가 무대에서 자신이 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스스로 웃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관객들이 무대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지겠지요. 그래서 배우들은 자기 감정을 절제한 채 공연을 해야 합니다. 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적 화자가 격정적으로 자기 감정을 내세울 때보다 자기 감정을 절제하여 전달할 때가 더욱 감정 전달이 잘 될 수 있으니까요.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더욱 안타까워할 수도 있지요. 정지용의 「유리창 1」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작품이지만 어디 한 군데 슬프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 슬픔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의 차이?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내재적 비평이란?
분야 | 현대 시 |
목차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꼭 작가가 살았던 삶이나 시대를 알아야 작품을 잘 읽을 수 있나요?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배경 지식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달리 보인다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음미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각도와 방향에 따라서 달리 보이듯이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어느 관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지요. 작품을 창작한 사람의 관점에서 감상할 수도 있고, 작품에서 반영하는 현실을 고려하면서 감상할 수도 있으며, 독자들이 무엇을 느끼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감상하는 방법도 있지요. 물론 작품의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 독자, 현실 세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품 속에 사용된 언어라든가 작품의 구조 자체에만 주목해서 감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작품 자체에만 주목해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감상하는 방법을 ‘내재적 비평’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다른 말로 ‘절대주의적인 관점’이라고도 하지요.
작품 자체에만 주목하라!
내재적 비평은 작품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 독자, 현실 세계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작품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작품을 외부 요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내재적 비평은 시와 소설을 비롯한 모든 문학 작품에서 적용 가능합니다. 시에서는 주로 어조, 운율, 이미지, 수사법, 시상 전개 등의 요소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소설에서는 서술자라든가, 구조, 인물의 유형, 문체, 시점 등을 중심으로 감상합니다. 내재적 비평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짧은 시 한 편을 감상하며 알아보도록 합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위 시는 전체 3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연의 첫 행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반복적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지요. 또한 ‘~리라’라는 어조를 사용하여 화자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 시에서 주목해야 할 이미지로는 ‘이슬’과 ‘노을빛’, ‘소풍’ 등이 있습니다. 모두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지요. 세 가지 시어의 공통점은 모두 ‘잠시’ 동안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인생이 잠시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 시어들은 모두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시적 화자는 인간의 짧은 삶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볼 수 있듯이 시적 화자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아름다웠더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새벽빛 와 닿는 이슬이나 노을빛 등을 소재로 활용한 것도 삶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하려고 동원된 것 같습니다. 시적 화자는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않지요.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겠지만 그 유한성을 깨닫고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시적 화자의 겸허한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볼까요? 방금 시를 감상한 부분에서 혹시 시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나요? 아니면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상과 관련된 언급이 있었나요? 그 어디에서도 작품 외적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의 이미지와 어조, 언어에 대한 탐구만이 있을 뿐이지 어디에도 작가, 현실, 독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지요. 이처럼 작품 자체만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내재적 비평이라고 합니다.
내재적인 관점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나요?
내재적인 관점은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기 때문에 작품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가 필요하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내재적 비평이란?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의 차이?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를 공부할 때 감정이입이라는 말과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둘 다 화자의 정서를 다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라는데 차이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정말 슬픈 건 누구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감정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온갖 정서를 타인과 나누고 싶어 하지요. 타인에게서 공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시에서도 감정을 다른 것과 함께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감정이입이지요. 이 말은 독일의 헤르만 로체가 1858년에 처음 사용한 표현입니다. 시적 화자의 감정을 다른 대상에 이입하여 마치 대상이 화자의 정서를 함께 느끼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 중에서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김소월, 「초혼」 중에서
백석의 「여승」에서 “산꿩도 섧게 울은”이라는 말에서 ‘섧게’는 ‘서럽게’를 줄인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산꿩이 서러워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요. 산꿩은 서러움을 느끼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산꿩이 시 속 상황을 이해하고 서러움에 빠지기는 더욱 힘들겠지요. 따라서 산꿩이 서럽다는 것은 시적 화자가 느끼는 서러움을 산꿩에 이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소월의 「초혼」에서 사슴의 무리가 슬피 운다고 했지만 사슴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간이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슬프다는 감정은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이입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의인법으로 표현된 것들도 감정이 이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객관적 상관물 :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상
자, 이제 감정이입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객관적 상관물’을 살펴봅시다. 객관적 상관물은 20세기 초 영국의 문예비평가이자 시인인 T. S. 엘리어트가 사용했던 말로 그 역사가 감정이입보다는 짧습니다.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주관적으로 바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대상이나 정황에 빗대어 표현할 때, 그 대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슬프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쓰지 않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구슬프게 내리는 비’를 동원할 때 바로 ‘비’가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정이입에 사용된 표현들은 모두 객관적 상관물이 됩니다. 백석의 「여승」에서의 ‘산꿩’과 김소월의 「초혼」에서의 ‘사슴’은 감정이입의 대상이기도 하고 객관적 상관물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 상관물 중에는 감정이입이 아닌 것들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가 어떤 정서를 느끼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대상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화자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갖지 않더라도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라면 객관적 상관물로 볼 수 있지요.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 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중에서
시적 화자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침상도 없이 비참하게 운명하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쓸쓸하고 힘겹고 외로운 정서를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지요. 따라서 풀벌레 소리는 화자의 정서를 직접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화자가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풀벌레 소리에 감정이입이 직접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화자의 정서를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객관적 상관물은 감정이입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감정이입 외에도 화자의 정서에 기여하는 모든 대상이나 정황 들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범주의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감정이입은 슬프다, 기쁘다, 자랑스럽다 등등의 감정을 드러낼 만한 표현이 있는 경우이고, 그런 말이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감정을 일깨우는 대상이나 정황이 존재하면 그것은 객관적 상관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한다는 표현도 가끔 눈에 띄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감정을 절제한다는 건 화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코미디 배우가 무대에서 자신이 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스스로 웃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관객들이 무대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지겠지요. 그래서 배우들은 자기 감정을 절제한 채 공연을 해야 합니다. 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적 화자가 격정적으로 자기 감정을 내세울 때보다 자기 감정을 절제하여 전달할 때가 더욱 감정 전달이 잘 될 수 있으니까요.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더욱 안타까워할 수도 있지요. 정지용의 「유리창 1」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작품이지만 어디 한 군데 슬프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 슬픔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의 차이?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