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그는 언제나 맨발이었다 - 안유환
내가 문 목사의 부음을 접한 것은 8월 초순 갈멜산 기도원에서였다. 월요일 오전 사무실에 등록하고 목양관 방을 배정 받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기도원 마당에 까지 승용차와 승합차들이 빼곡히 들어차는데 넓은 주차장에만 차들이 가득했다. 오후 1시쯤 되자 낮 집회를 마친 성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는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평소 여러 교단 목회자들을 만날 수 있는 휴게실에 그날은 아무도 없었다. 공중파 채널은 어디에서나 국내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잇달아 보도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감염되는 메르스가 온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올 여름은 우리교회도 참으로 분주했다. 지난 3월 착공한 교회당 신축공사가 80%의 공정에 이르렀고,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등 행사도 거의 다 마쳤다. 마무리 단계의 건축공사에는 담임목사가 가까이서 늘 신경을 써야 하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특히 영적인 허기를 가눌 길 없었다. 나는 내년의 목회계획도 준비할 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원으로 올라갔다.
예년에 비하면 올해 여름집회는 눈에 띄게 성도들이 줄어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메르스 감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종편 채널에서도 메르스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안이한 초기 대응에서부터 빚어진 갖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눈을 돌려 탁자위에 쌓여있는 지난 신문들을 들춰보았다. 교계신문들은 점점 과열되어가는 올가을 총회장 선거대책을 1면에 보도하고 있다. 선거가 끝나면 언제나 불법선거운동의 뒷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해마다 총회 부총회장 선거에 수억대의 금품이 들어가야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공공연히 오고 갔다. 그러다보니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당선자도 낙선자도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기독합동신보> 3면의 목회자 동정·부음 난에서는 뜻밖에 문 목사의 이름이 눈에 띠었다. −「문경준 목사(주명한교회)가 지난달 15일 별세해 대전 을지대 병원에서 장례식을 가졌다. 향년 58세. 유족으로는 부인 신예린 여사와 1남 1녀가 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도 충격이지만 그가 별세한지 달포가 지난 뒤에 이렇게 늦게 보도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교회가 지역사회나 교단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나 미래의 총회장 후보로 거론되는 비중으로 보아도 1단짜리 짤막한 부음은 너무나 모양세가 걸맞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별세했는지 그 원인도 궁금했다. 급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간혹 간경화나 암 같은 난치병으로 쓰러지거나 오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문 목사는 지난 5월 모교 개교기념식에서 만났을 때도 평소의 건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날도 행사 후에 바로 이사회 모임이 있었지만 틈을 내어 나를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동기생이면서도 나보다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그는 언제나 나에게 각별했다. 새해가 되면 교계 지도급 목회자들은 의례적인 인사와 서명까지 인쇄된 카드나 연하장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내게 만은 친필로 인사를 하며 때로는 신학교 시절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했다. 나에 대한 그의 관심이 이처럼 끈끈한 것은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신학교는 학부생을 포함한 전교생 2500명에 비해 기숙사 시설은 태부족이었다. 반지하인 1층을 포함해 3층인 기숙사는 학부생을 포함해 150명밖에 수용할 수 없었다. 목회자 최종과정인 신학대학원생도 250명 가운데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만 등록 순으로 기숙사 방이 배정되었다.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등교시간이 두 시간이 훨씬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도 기숙사에 입사할 수 없었다. 기숙사생들은 집에서 다니는 학생들에 비하면 공부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정신없이 바쁜 학교생활에도 틈틈이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기숙사에 입사하지 못한 학생들은 학교 주변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 기숙사에 입사한 것은 특별한 은총이었다. 그래서 룸메이트들은 친밀감이 더했던 것 같다. 네 사람이 들어가는 5평 정도의 기숙사 방은 2층 침대 2개와 출입구 양쪽에 2개의 붙박이 옷장이 있고, 철골로 틀을 짠 침대 바닥엔 나무판자 조각을 마루판처럼 잇대어 깔았다. 회벽으로 마감된 방 한가운데는 특별히 제작된 대형책상 두 개를 맞붙여놓아 운신하기조차 힘 드는 좁은 공간이었다. 한겨울엔 맨손으로 가방을 들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서울추위에도 온수는 아침 저녁 한 시간씩만 나왔고 난방시설은 연탄 두 개짜리 난로가 고작이었다. 환기는 미들창 두 개에 의지하지만 혹한에는 아예 열지를 못했다. 창문 손잡이에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크게 고드름이 달라붙는다. 공동 세면장과 화장실은 한 층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기에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아무도 불평은 늘어놓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선지동산에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신학교는 특수공간이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연령대와 직업들이 다양했다. 목회자 지망 신대원생들 가운데는 이제 막 일반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사회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초중고 전직 교사들과 공무원을 비롯해 회사원, 자영업자, 건축업자, 그리고 해직된 대학교수와 언론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에서는 장로나 집사의 직분으로 봉사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나름대로 신학교를 지망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다. 난치병을 고쳐주면 복음전도자가 되겠다고 서원한 사람도 여럿 있었고, 한 사람은 의사의 사망판정이 난지 24시간이 지나 다시 살아나 남은 생을 하나님께 바쳐 살기로 다짐하고 선지동산에 올라왔다고 간증했다. 어떤 이들은 경영하는 일들이 실패를 거듭하자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30여 년 전의 기숙사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내가 해직기자로 신학교 문을 두드릴 때는 81년 ‘서울의 봄’이 역류하여 신군부 세력이 정세를 장악하고 다시 꽁꽁 얼어붙던 살벌한 시대였다.
신학교 입학식을 끝낸 그다음 주간 수유리 영락기도원에서 가졌던 첫 신앙수련회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주제는「네 발의 신을 벗으라」였다. 이것은 모세를 부르시던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제자의 발걸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어야 했다. 3박4일 일정으로 진행된 수련회 기간 동안 밤 집회가 끝나면 우리는 담요 한 장씩을 껴안고 뒷산으로 올라가 자욱이 쌓인 낙엽에 비박을 하듯 몸을 묻고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마음에 무거움을 더한 것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16:24)는 말씀이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될 수 없었다. 가장 목마른 것이 ‘성령 충만’이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늘 두려워 떨었지만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부터는 담대히 복음을 들고 외치며 나설 수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수련회 중에 방언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는 영적체험을 하기도 했다. 목회자 지망생은 죽어져가는 영혼들을 건져내기에 앞서 자기의 문제를 먼저 해결 받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사흘 밤이나 그런 체험을 해보기 위해 저녁 한 끼씩을 금식하고 목이 잠기도록 울부짖었지만 방언을 받거나 다른 영적 체험을 하지는 못했다.
“문 전도사 혹시 방언을 할 줄 아는가?”
기숙사로 돌아온 날 저녁 이번 신앙수련회의 소감도 나눌 겸 내가 먼저 물었다. 우리는 선배의 지도를 따라 입학 후 며칠 지나면서부터 서로를 ‘전도사’로 불렀다. 실제로 일찍이 교육전도사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예, 받기는 했습니다만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방언을 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문은 조심스럽게 사양했다.
“나도 이번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고 싶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어.”
“저는 교회의 고등부 학생수련회 때 받았습니다.”
“조금만 들려주면 안 되겠나? 이것은 자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그가 방언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나의 간청에 문은 책상에 앉은 채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낯선 언어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 ? ?”
내게는 그 소리가 흡사 일본말 같이 들렸다. 그러나 정확히 어느 나라 말인지는 구분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였다. 문은 잠시 방언을 하고는 멈췄다.
“자기가 하는 방언의 뜻을 본인도 알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뜻을 알지는 못합니다. 통역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방언기도를 하면 마음에 한없는 평안이 깃들고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방언을 들으면서 나는 문 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신앙인이 반드시 방언을 해야 참 믿음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 교수들 가운데도 방언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방언기도를 하는 동료와 한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맘속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문 전도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많은 도움을 입었다. 한 주일에 한두 건씩 제출해야하는 리포트를 위해서는 신학 원서를 참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 전도사는 그때마다 원서를 번역하여 같은 학습 조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문 전도사는 1학기도 끝나기 전에 2천명이 넘게 모이는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청빙되었다. 교회에서 돌아올 때는 잊지 않고 빵이나 과일을 사들고 와서 주일 저녁이면 우리 방은 작은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신학생들 가운데는 식권을 구입할 돈이 없어 밥을 굶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점심시간이 되면 남몰래 수돗물을 들이킨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어떤 이는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입술주변이 부스럼투성이가 되었다. 문 전도사는 이런 학생들에게 자기의 식권을 5장씩 10장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남자 네 사람이 이용하는 방은 한 번씩 청소를 하지만 늘 지저분하고 책상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일 때가 많았다. 문 전도사는 자주 세면장에서 대걸레를 가져와 시멘트 바닥을 닦아내고 책상위에 꽂힌 책들도 수시로 정돈했다. 교육전도사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2학년이 되면서 문 전도사가 봉사하는 교회의 고등부를 맡아 지도하게 되었다. 그가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오후시간 내내 문 목사의 별세 소식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교통사고였을까? 내가 알지 못한 지병을 갖고 있었을까? 문 목사의 부음은 왜 그렇게 늦게 알려졌을까? 두 달이나 지난 지금 교회로 전화를 걸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닌 뜬금없는 일처럼 보였다. 나는 궁금증을 떨어버릴 수 없어 서울의 K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문 목사의 소식을 물었다. 그는 내 말에 오히려 놀라며 호주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엊그제 귀국해서 국내의 소식은 아직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몇몇 동기들에게 전화로 물어 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거나 통화가 된 사람도 지난주간에 보도된 부음소식보다 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저녁집회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나는 휴게실을 나와 기도원 뒷산으로 올라갔다. 숲속 여기저기에 자리를 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방언으로 크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큰 멍석만한 너럭바위에 4,50대 여인들이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메르스 때문에 큰일이야. 어제는 12명이 감염되었다고 하던데······.”
“더 사망자는 나오지 않아야 할 텐데, 그렇게 전염력이 강한 질병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
“어떻게 감염되었는지 원인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으니 두려움이 더하지.”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할랄 식품을 들여온데 대한 하나님의 진노인지도 몰라.”
‘할랄(Halal)’은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라는 뜻이며 이슬람 율법이 허용한 무슬림(Muslim)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전국의 메르스 감염자는 186명에 달하고, 사망자는 36명으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감염자 가운데 140명은 완치가 되었으나 한때는 격리 수용자 수가 5~6천명에 달하기도 했다. 증상은 갑자기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메르스는 환자의 기침이나 콧물 등 호흡기 분비물에 의해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메르스 환자를 진료한 의사도 감염되어 의료진들을 당황하게 했다. 메르스 감염환자 가운데는 어느 날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기도원의 저녁집회는 밤11시가 넘어서 마쳤다. 집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산 기도를 간다. 이날도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갔지만 나는 내 방으로 들어오는 길에 목양관 앞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밀려왔다.
오늘 저녁 강사는 원인 모르게 확산되는 메르스 사태는 일천만 기독교인들이 있는 국가에서 할랄 식품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의 활동을 방조하는데 대한 하나님의 재앙이라고 주장했다. 이슬람의 전통도축방식인 ‘다비하’(dhabihah)에선 칼로 동물의 목을 긋고 피가 다 빠져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방치한다. 전문가들은 이슬람의 율법을 준수하는 할랄 식품 산업은 동물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포를 겪는 상태에서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게 하는 아주 잔인한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기독교계는 이슬람의 잔인성, 폭력성, 비인격성의 국내유입 교두보가 될 할랄 식품 산업을 유치하는데 대해 격한 반응을 나타냈다. 정부의 이번 처사는 우리민족을 철저한 종교적 분쟁의 늪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 우리나라에 할랄 식품 바람이 불게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 1일~8일까지 중동 4개국을 순방할 때 아랍에미리트(UAE)와의 정상회담에서 ‘할랄 식품 양해각서’를 체결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앞으로 한국 내 할랄 푸드 테마파크 조성도 공동 추진키로 했다”면서 “17억 명에 달하는 무슬림을 향한 산업은 우리 경제의 미래를 견인할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여 지난 3월초에는 한국 식품 연구원에 할랄 식품 사업단을 설치하고, 한국 이슬람 중앙회(KMF)와 할랄 식품 산업발전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농림축산 식품부에서는 할랄 식품 긴급 연구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해수부에서는 할랄 수산식품 기술 지원센터를 잇달아 개소했다. 그 후 농림축산 식품부는 할랄 식품 분야의 협력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추진해왔고, 멀지 않아 전용도축장을 강원도와 전라도 지역에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때를 같이하여 메르스는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지도 못한 채 급속도로 확산되어갔다. 그러다보니 온갖 루머가 나돌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샤워부터 했다. 내가 갈멜산 기도원을 애용하는 것은 어느 기도원보다도 목회자들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1인 1실인 목양관 방에는 책장이 붙은 책상과 형광등 스탠드가 따로 놓여있고 싱글 침대와 타워 팬 선풍기도 비치되어 있다. 겨울철엔 방이 너무 뜨거울 정도로 난방시설도 잘되어 있다. 실내 세면장에는 언제나 온수를 이용할 수 있었다. 30년 전 신학교 기숙사에 비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있는 시설이다.
3월5일 입학식 하루전날 우리는 기숙사에 모두 입사했다. 마음 맞는 사람과 짝을 맞추거나 같은 지방 사람끼리 한방에 들 수도 없었다. 방은 등록순서대로 배정되었고 각 방에는 1년이나 2년 선배 한사람 씩 끼어졌다. 그것은 후배들이 학교 분위기를 익히는데 도움을 주고 먼저 경험한 선배들에게 신앙상담도 가능하게 한 배려였다. 서울의 지리에 밝지 못한 나는 우리 방에서 맨 먼저 학교에 도착했고, 얼마 후 전주의 최가 내 뒤를 이어 들어왔다. 대전에 사는 문은 그날 맨 늦게 도착했다. 그는 큰 캐리어를 끌고 한쪽 손에는 커다란 케이크상자를 들고 왔다. 서로가 낯선 얼굴들이지만 우리는 곧 오랜 친구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와 동년배인 최는 오랫동안 YMCA 간사로 일하다 신학교에 들어왔기에 그는 이미 교계에 이름 있는 목회자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아래인 문은 좀 사정이 달랐다. 그는 수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고등학교 때까지 시골에서 자랐다. 요즘처럼 애완동물을 많이 기르지 않았을 때 문 목사의 아버지는 읍사무소나 면소재지에서 근무하며 인근 지역의 가축 예방접종이나 방역에 관여했다. 문은 고등학교에서는 전교 1~2등의 성적을 유지했다. 한창 사춘기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지만 문은 여학생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신앙이 깊어지고 방언을 하면서 이성과 교제하는 것은 외도하는 것만큼 죄인 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끌리는 여학생 생각이 떠오르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는 말씀이 떠올라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건강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그는 남녀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것조차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탐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친구들의 부탁을 받고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은 자주 있었다. 편지를 부탁한 남학생과 대신 써준 편지를 받은 여학생은 그 편지로 인해 사귐이 시작되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왜냐하면 여학생에 비해 남학생은 대필된 편지내용 만큼 말주변이나 글재주가 없는 것이 들통 났기 때문이었다. 잘생긴 문은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여교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는 여교사들이 편지를 보내거나 만남을 제안 해도 응하거나 답장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애당’이란 말로 교회가 세상의 비난을 받는데 한 교회 안에서 남녀의 사귐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다 눈에 띄는 주간지나 성에 관한 책들은 들쳐보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서의 믿음을 지켜가고 싶었다.
문은 일찍부터 이런 마음바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릴 적 엄마가 새벽기도회에 갈 때면 꼭 따라 가보고 싶었다. 처음 새벽기도회에 나갔던 것은 송구영신예배 때였다. 담임목사는 온가족이 참여할 것을 독려했고 특별히 어린 아이들을 강단에 불러올려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문은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는 것이 좋았고, 일 년에 한차례 부흥집회 때도 권사인 어머니의 부탁으로 강사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리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날마다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손가락에 감아쥐고 잠들었다. 문은 주일학교에 가는 것뿐만 아니라 어른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을 따라 부르는 것이 재미있었다. 미션스쿨을 나온 어머니는 교회 일에 앞장서서 봉사했고 헌금도 많이 하는 가정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의 장래 목표는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로 추수감사절에 한 번씩 교회에 출석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신학교에 가는 것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문은 K대학을 졸업하고 S기업에서 5년간 일했다. 셀폰 시리즈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했던 문은 팀(team)이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었다. 소프트웨어 연구는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 팀을 이루어 함께 만들어 가는 특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IT개발의 자질은 기본기를 잘 길러야 했다. 모든 업무가 기본을 토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공부는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원서를 비롯한 다양한 독서를 통해 폭넓은 이해력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신입사원들에게는 “전문가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공부하면 그 분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문은 신앙인의 본분을 지키며 최선을 다했으나 갈등은 커져만 갔다. 아무리 다양한 공부로 실력을 쌓아도 팀 내에서 자기의 재량을 마음껏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끊임없는 감시의 눈길이 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도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승진을 위한 경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 팀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언젠가 팀장은 “신제품 출시를 위해 빠른 변화에 대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바빠지기도 하지만 일하는 기계는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차츰 회사에 적응해가면서 그 말이 ‘일만하는 기계에 틀림없다’는 것을 입증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교회에는 소홀해지고 예배에 빠지는 것도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문은 기계처럼 일하는 의미 없는 인생이 두려워 소명에 응하는 결단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기숙사의 첫날밤은 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벽1시를 넘겼다. 신군부의 무자비한 언론통제에 대한 나의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신학대학원 2학년이 된 봄이었다. 당시 L총장은 할 수 있으면 신학교는 수도원처럼 전교생을 기숙사에 입사시켜 손색없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성해보려는 꿈을 한창 피력하고 있었다. 이사회는 광나루 좁은 캠퍼스를 경기도의 넓은 지역으로 옮겨보려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 Y교회 C권사가 경기도 용인의 땅 20만평을 신학교에 헌납하기로 약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학생들과 일부 교수들은 수도원 식 교육에는 찬동하면서도 앞으로 우수한 교수 초빙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학교가 서울을 벗어나면 2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캠퍼스 이전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면서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반대투쟁에 열을 올렸다. 4월 한 달 동안은 데모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문전도사는 대전으로 자주 부모의 호출을 받았다. 몇 차례 오르내리고 나서는 결혼 일자가 잡혔다고 말했다. 혼처는 이웃교회 장로의 딸로 지난해부터 혼담이 오갔지만 1학년 과정을 마치기까지 미뤄졌던 것이었다. 그의 결혼은 전적으로 부모님이 주선한 것이었다. 문 전도사는 5월 셋째 주간 석가탄일을 전후한 일주일 동안에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왔다.
“문전도사, 첫날밤은 어떻게 지냈어?”
짓궂은 한 친구가 새신랑에게 첫날밤의 소감을 물었다. 문 전도사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른 방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에 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부가 막, 울어서 혼났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
“무얼 몰랐다는 거야?”
나와 최 전도사가 이구동성으로 내뱉은 말이다.
“2박3일 신혼여행을 다녀왔지만 우리는 첫날밤을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습니다.”
이성 관계에는 지나치게 순진했던 문 전도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밤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체위’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신부는 얌전히 누워 다음 동작을 기다렸으나 신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리 애써도 궁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신앙생활에 철저했던 두 사람은 모두 부부관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을 마치고도 처녀총각의 레테르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기숙사 내에 조용히 퍼져갔다.
그 다음날 밤 문 전도사는 우리방과 대각선 위치에 있는 방으로 초대를 받았다. 언제나 사생들을 잘 웃기는 P전도사 방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10여명의 사생들이 2층 침대위에까지 자리를 잡고 모여 앉아있었다. 문 전도사를 위한 두 사람의 체위시연이 시작되었다. P가 여자를 다루는 동작은 마치 ‘문화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문 전도사는 신앙이 깊어지면서 남자가 여자를 생각하는 것을 언제나 부정한 것으로 여겼고, 성에 대한 책을 보는 것조차도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 그런 웃지 못 할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인간의 깊은 생각이 본능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문은 그날 밤 체위시연을 보고 부부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배웠다. 그 다음주일에 집에 다녀온 문 전도사는 희색이 만면했다. 사전지식을 갖지 못해 도무지 생소했던 문제가 해결되자 그의 앞에 다른 걸림돌은 없었다. 과목마다 A+를 받던 그는 졸업논문 상을 수상했고 수석졸업의 영광도 누릴 수 있었다.
그동안 신학생들을 전원 기숙사에 입사시켜 온전한 신학교육을 도모하려던 학교 이전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대신 현재의 좁은 캠퍼스를 확장하고 기숙사 시설도 확충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학교를 이전하면 현재의 전망 좋은 한강변 요지를 매각하고 용인에 새로운 캠퍼스를 조성하고도 남을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학교 이전이 무산되면서 현 캠퍼스의 전반적인 확장 증축은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신대원 졸업 후 2년이 지나 문전도사는 섬기던 교회에서 부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내가 부산에서 안수를 받고 시무한 교회는 25년을 담임하던 목사가 원로로 은퇴한 교회였다. 건물도 낡았고 회집하는 교인 수도 200명이 못되었다. 다행히 내가 목회를 이어받고 나서 젊은 부부들이 늘어났고 청년회도 활기를 더해갔다. 교인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새 교회당을 짓는 것이었다. 건축기금은 예산액의 절반정도 모아져 있었다. 믿음을 갖고 용기를 냈다면 오래전에 건축이 가능했을 것이지만 전임목사는 모험을 하려하지 않았다. 흔히 목회자들이 예배당이나 교육관 신축을 자기의 업적으로 생각하며 서두르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데 비하면 전임자의 자세가 옳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러한 뜻을 따라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이제야 교회당 신축을 시작했던 것이다.
문 목사는 서울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5년을 시무했을 때 대전의 주명한교회로 청빙을 받았다. 장년 회집이 1000명이 넘고 교회학교까지 합하면 1600명이나 되는 지방에서는 대형교회였다. 문 목사가 부임하면서 이때까지 500원씩 받던 주일날 점심식사를 완전 무료배식으로 바꾸었다. 지역이름을 따라 지어진 ‘용전교회’ 란 당시 명칭도 ‘주명한 교회’로 변경했다. 이 이름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씀대로 행하라’고 명령한 <여호수아1:9>에서 따왔다. 몇 년 후 장소를 옮겨 교회당을 신축할 때는 담장은 아예 없애버리고 교회마당을 아담한 공원으로 조성했다. 교회는 언제나 시민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주일날 외에는 주차장도 개방하여 운전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현재 장년만 50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다. 당시 주명한 교회 위치는 지금의 용전동 홈플러스 앞이지만 그때는 변두리로 허허벌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나환자들이 거주하며 닭과 돼지를 치고 있었다. 마을은 온통 가축우리에서 나는 악취로 가득했고 일반인들은 지나다니기조차 꺼리는 곳이었다. 주거단지 내에는 나환자들을 위한 조그만 교회가 있었다. 문 목사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눈을 돌렸다. 경로당과 마을회관을 세워주고 본 교회 의사들을 동원해 분기별로 의료사역을 펼쳤다. 주명한 교회 교인들이 문 목사를 따라 그 교회에 예배하러 갈 때면 예배 후에 과일과 삶은 달걀로 대접을 받았다. 음식을 들고 온 그들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손이 오그라졌거나 아예 손가락이 없는 경우도 있어 교인들은 속으로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문 목사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악수도 하고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지금은 도심의 확충으로 정착촌이 교외로 옮겨졌지만 문 목사는 나환자촌 교회와의 교류를 끊지 않았다.
이밖에도 주명한 교회는 농촌지역의 영세한 교회들과 자매결연을 하여 지원을 계속해왔다. 년1회씩 농촌교역자들을 본교회로 초청, 대접하고 위로하며 세미나를 통해 목회를 격려했다. 또한 농어촌 교회들과 자매결연을 하고 생산물 직거래를 통해 농어민들의 수익을 높여주었다. 이런 소식들은 <기독합동신보>를 통해 서도 널리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내가 지난해 3월 제직세미나 강사로 갔을 때 교인들과 당회원들로부터 그간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우리교회 건축 얘기를 듣고 주명한 교회는 많은 건축헌금을 해주었다. 그 교회의 선교는 교단을 초월하여 이루어졌다. 가톨릭의 이태석 신부가 선교하던 남 수단 의료선교에도 매년 상당한 선교비를 지원했다. 문 목사는 그의 교회가 가지 못하는 지역에 보내는 선교사의 책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펼쳐온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환이었다.
보건당국은 메르스 예방대책의 하나로 사람들의 왕래를 자제하도록 당부하고 있었지만 문 목사 교회에 대한 최근 소식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월요일 모든 것을 제쳐놓고 아침 7시 KTX편으로 대전으로 향했다. 주명한교회 본당은 그대로지만 교육관 건물이 새로 세워졌고 교회 옆 빈터와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주차장은 엄청나게 확장되어 있었다. 사무실은 잠겨있고 큰 교회는 빈집처럼 조용했다. 나는 로비에 비치된 주보를 보고 관리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그는 목회자실로 나를 안내하고 선임인 H장로에게 연락을 했다. 20여명의 부교역자들이 일하는 그 방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길로 출애굽 하는 대형 유화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시 후에 H장로가 들어왔다.
“장로님,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인사도 차리기 전에 궁금증부터 털어놓았다.
“메르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윗 같은 목자를 잃은 것도 큰 슬픔인데, 장례까지 제대로 치르지 못해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H장로는 나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문 목사가 별세한지 두 달이 지났지만 교회는 아직도 초상집 분위기 같았다.
“사모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도착해서 댁으로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안 되던데요.”
나는 유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사모님은 격리에서 해제되고 나서도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병원에 계십니다.”
H장로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교회 교인 가운데 홀로 계시는 할머님의 외아들이 메르스에 감염되어 서울 삼성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주일날 듣게 되었습니다. 그다음날인 월요일은 6월1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직접 할머니를 모시고 삼성병원에서 제공한 개인보호 장비(마스크, 장갑, 고글, 보호복)를 착용하고 환자를 문병하고 돌아왔습니다. 할머니는 별 일이 없었는데 목사님은 감기몸살처럼 근육통을 호소하고 고열과 기침이 시작되었습니다. 3일간 집에 계시다가 호흡곤란 증상으로 을지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지요. 가족은 격리되어 있었고, 부교역자 등 극소수의 사람만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목사님을 문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일주일 뒤인 9일 전국에서 89번째 메르스 확진 환자로 판정받은 뒤 이튿날 돌아가셨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모님과 따님까지 감염증상이 나타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미혼인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H장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는 자를 일찍 데려가시는 것인가? 비닐로 감싼 시체는 염을 하지도 못한 채 누출방지(leak-proof) 시체 백에 담겨 봉인되었다. 임종 예배도 장례식도 갖지 못하고 시신은 바로 화장되었다. 화장장에는 보건소 직원 2명과 유족을 대신해 H장로 한사람이 문 목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날 오후 교회는 한줌의 재로 변한 유골을 받고 오열했다. 교회는 누구에게도 부고를 내거나 장례절차도 갖지 못하고 멘붕 상태에 빠졌다.
“······목사님은 병상에서도 삼성병원에 입원중인 할머니 아들을 염려했습니다. 산소호흡기 너머로 보이던 목사님의 얼굴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없이 평안하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한 생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는 말씀으로 자주 설교하셨습니다. 나환자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고, 어떤 임종의 환자라도 목사님은 그를 찾아 손을 잡고 기도하며 마지막 배웅을 했습니다. 삼성병원에서의 메르스 감염도 아마 보호 장구 밖으로 할머니 아들의 손을 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볼 뿐입니다.”
H장로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장로님, 사모님 병원심방 출발합니다.’ 옆에서도 그 음성이 들렸다. 여전도사와 권사들이 함께 심방을 가는 것이었다. H장로는 다녀오라고 말하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푸른 풀밭 같던 주명한 교회는 오늘 황량한 터전으로 비쳤다. 나는 맞은 편 벽면의 출애굽 그림을 쳐다보았다. 큰 무리를 이끌고 광야 길을 걸어가는 모세와 같은 사람! 문 목사는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따라 언제나 맨발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 일꾼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내 발이 부끄럽고 살아있음이 오히려 죄송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