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계절
안유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오래전 해외여행으로 적립된 항공 마일리지 통보를 몇 차례나 받았다. 더 시간이 지나면 아까운 마일리지가 소멸될까 싶어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 하순 아내와 함께 2박 3일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다. 이륙할 때는 잔뜩 흐린 날씨였는데 구름 위에 올라서자 가을 하늘은 그대로 펼쳐있었고,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제주도를 여행할 때는 렌터카가 필수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몇 개의 렌터카 출장소 직원들이 줄지어 있는 창구로 가서 문의했다. 첫 번째 창구담당자는 한참이나 내 주민등록증을 들여다보며 옆 사람과 “80세까지 제―!”라며 얘기를 주고받더니, 주민등록증을 돌려주며 다른 창구에 문의해 보라고 말했다. 옆 창구직원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며칠 전 여행을 계획할 때 인터넷을 통해 문의했던 Y 렌터카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 업소는 운전에 지장이 없는 한 누구나 렌터카가 가능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휴대폰으로 Y 렌터카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청사를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렌터카 하우스’를 찾아갔다. 그곳은 여러 렌터카 업체가 고객을 자기들 회사로 안내하는 셔틀버스 주차장이었다. 제주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30분이었으나 여기저기 문의하다 보니 어느새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 셔틀버스에 올라 15분쯤 기다리자 차가 출발했다. 러시아워에 겹쳐 Y 업체까지는 30분도 더 걸리는 것 같았다.
차례를 기다려 수속을 마치고 쏘나타를 배정받았다. 내 차 기어는 P(주차) R(후진) N(중립) D(주행) 작동이 막대 식인데, 배정받은 차는 신형으로 버튼식이었다. 주차 페달도 밟는 것이 아니라 작은 레버를 당기는 식이며, 내비게이션도 형태가 달라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직원을 불러 사용설명을 듣고 차를 출발시켜 한 시간 넘게 걸려서 내지에 자리한 H 콘도에 도착했다. 숲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주차장에는 승용차가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한참 만에 겨우 빈자리를 찾아 주차했다. 오래전 몇 차례 이용한 적이 있는데도 밤이라서 그런지 대형콘도는 낯설어 보였다.
프런트로 가서 입실 수속을 하고 카드키를 받았다. 방 번호는 ‘603호’였다. 그날은 마침 대전 S 여고생들의 단체 숙박으로 실내는 시끄럽고 혼잡했다. 6층 방으로 올라가서 손잡이 아래에 카드키를 대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하다 프런트에서 적어준 방 번호를 확인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방 번호는 ‘603호’가 아니라 ‘623’호였다. 조그맣게 쓴 글자 ‘2’가 ‘0’으로 보인 것이다. 아무리 돋보기를 끼지 않았기로서니 뜻밖의 실수였다. 콘도 위치가 외딴 지역인 데다 식당 운영 시간도 지나 구내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다 저녁 식사를 대신했다. 방안에서는 취사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집을 떠나니 이래저래 고생이었다.
제주도는 10여 년 전에 아내와 함께 이미 올레길을 완주했고, 그 후에도 방문할 때마다 ‘오름’이나 ‘명소’로 알려진 곳은 거의 둘러보았기에 이번에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발 닿는 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이튿날 오전 10시쯤 어젯밤에 주차했던 곳으로 가서 ‘내차’를 찾았으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차를 찾을 수 없었다. 위치나 길을 찾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했다. 아내는 이리저리 나를 따라다니면서 “차 번호가 몇 번 이예요?” 물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아내는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이 우리 차 번호도 잊었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다시 묻기에 차 번호를 말하려고 하니 나도 ‘내차’ 번호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렌터카 키에 적혀있는 7765번을 확인하면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때까지 나는 ‘감청색 쏘나타 6996번’―, 집에 두고 온 ‘내 차’를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렌터카 색깔이 흰색이란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흰색 차 7765번’을 확인하고 보니 렌트한 차는 5~6미터 앞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습관적으로 집에 두고 온 내 차를 찾고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놀라움과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내는 앙천대소하며 “당신이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는 말과 함께 손가락 몇 개를 펴 보이며 장난조로 비아냥댔다. 나는 변명할 말이 없어 “그래서 나이 들면 비서가 필요한 것이야!”라고 엉뚱한 대답을 끌어냈다. 방 번호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부산에 두고 온 차를 제주도에서 찾다니! 치부를 들킨 것 같지만 산수를 넘기면서 착각의 계절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좋은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