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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무정>은 현대소설의 새 장을 연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근대 초기인 1910년대를 배경으로, 일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서구 문화에 대한 충격과 의식의 갈등이 잘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다. 전근대적인 관습에 익숙한 낡은 문화와 서구 문화로 상징되는 새로운 문화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서로 뒤얽혀 공존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잇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전통적인 관습에 기반한 윤리규범과 새로운 현실이 어긋나며, 등장인물들의 이념과 욕망이 서로 부닺히고 갈등하면서 펼쳐지는 과도기적 삶의 양상이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다만 그것이 작가의 이상주의와 지나친 계몽적인 의식으로 인해 참신한 시도에 비해, 문학적 성과는 빈약하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경성학교 영어교사인 이형식은 월급의 일부를 떼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교사로서의 과도한 자부심은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권위적인 학교의 운영 방식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등으로 결국 학생들의 신망을 잃고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 장안의 부호인 김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 개인교습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김장로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딸을 미국으로 유학보내겠다는 생각으로, 김장로가 선형의 남편감으로 점지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그날 저녁 갑자기 형식을 방문한 박영채의 등장으로, 고아였던 자신을 자식처럼 돌봐주었던 박진사와의 인연을 떠올리게 된다. 교육운동에 헌신했던 박진사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형식과 선형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당시 박진사가 형식이 영채의 남편감이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잇던 영채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영채는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기생이 되었고, 그 사실을 안 박진사는 오히려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물들 사이에서 형식과 선형의 결혼이 추진되고, 영채와 형식 모두 과거의 인연으로 방황하는 모습이 그려지게 된다. 아마도 <무정>이라는 작품의 제목은 어떠한 정도 없이 관습과 새로운 문화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저울질하는 형식의 심적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라고 하겠다.
이후에 계월향이라는 기생 신분으로 성폭행의 현장에서 형식에게 구원되는 영채의 모습과 자살소동, 과거의 인연인 영채와 결혼 상대인 선형 사이에서 심적 갈등을 일으키는 형식의 상황이 형상화되고 있다. 형식의 좋지 못한 소문을 듣고서도 이미 선형과 약혼을 했기에, 사회적 체면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겉으로는 대범한 척하는 김장로의 모습 등 전통적 관습과 개인의 욕망이 부딪히는 근대 초기 과도기적 삶의 양상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주인공인 이형식의 인식과 욕망의 갈등이 적절하게 그려지고 있으며, 작품의 조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채와 선형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양상 또한 이러한 과도기적 모순을 보여주는데 일조하고 있다.
전통적인 규범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한 채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새롭게 떠오르는 서구 문물들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당대인들의 모습이 등장인물들에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다만 그러한 갈등이 전개되고 있지만, 이러한 모순을 철저하게 파헤치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헌신과 그 수단으로서의 유학이라는 어정쩡한 계몽주의로 귀결시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 <무정>이 지닌 한계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비록 지금의 시점에서는 구성이 서툴고 성글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현대소설의 새장을 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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