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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색을 주제로 저자의 독서에 대한 식견을 드러내고 있지만, 읽으면서 내용에 대한 공감보다도 다소 공허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생각’과 ‘사색’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생각이 아닌 사색’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생각’과 ‘사색’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 저자 나름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까지도 그에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에는 저자를 뜻하는 주어(나)가 빠져있고, 대부분 괴테를 비롯한 성공한 인물들의 결과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이 책에서는 서문에서부터 스티브 잡스나 괴테와 같은 ‘천재’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사색’이 지닌 위대함을 극찬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업적을 남긴 ‘천재’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일반 독자들에게 천재의 삶과 그들의 성과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나라면, 그들의 삶을 소개하되,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대체로 대다수의 자기계발서로 분류되는 책들이, 위대한 천재들의 업적을 거론하며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서술한 내용에 대해서 공감보다는 공허함을 느꼈던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괴테나 잡스의 삶을 존중하지만, 그들과 다른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때로는 천재들의 특출한 성과를 존중하지만, 그들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다소 무리한 서술이 엿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1만권의 책을 읽었더라도, 삶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단순화하며 자기의 논리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런데 과연 10년 동안 1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10년 전과 같은 생각에 머물러 있을 수가 있을까? 물론 책을 읽는 과정에서 다소 협소한 이해를 전제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10년 동안 방대한 양의 책을 독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서서히 변화해나갔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결코 10년 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지나친 단순화를 전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마도 그러한 단순화를 통해서 자신의 논지를 보다 두드러지게 보이려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리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가운데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적어도 한 가지 일에 1만 시간을 투여하면, 누구라도 전문가의 수준에 오를 수 잇다는 의미이다. 하물며 10년 동안 1만 권의 책을 읽었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글자만 보고 만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괴테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 공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관점은 괴테의 논리 뒤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느껴졌다. 만약 괴테의 저술들이 없었다면 이 책이 성립할 수 있었을까? 이 책에는 전적으로 저자 자신의 논리보다는 괴테와 같은 인물들의 진술에 기대어 논리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로서는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공감보다는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괴테의 논리에 동의한다는 것과 그것을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책에 ‘나’라는 주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 책에서는 모두 16권의 다양한 인물들의 저서를 통해서,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멈추지 않는 성장을 위한 사색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독서 행위의 목표는 결코 ‘성장’이나 ‘성공’만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휴식을 위해서, 때로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위해서 독서가 필요할 경우도 많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루는 16권의 저서를 자신만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주로 성공이나 성장을 염두에 둔 서술의 방향이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나로서는 이 책의 내용들이 대부분 다양한 저자들의 수많은 인용들과, 그에 대한 저자의 주석만이 제시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이 책의 내용들에는 ‘나’라는 주어가 드러나지 않고, 그저 저자는 중계자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던 점이라 여겨진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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