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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이다. 지배계급인 양반과 피지배계급인 상민과 노비로 구성된 구조이다. 양반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배계급으로 인정받지만, 상민과 노비는 쉽게 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과거나 특별한 업적을 인정받으면 한 단계 계급이 상승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선시대 가장 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임진왜란 당시 무능한 조정을 대신해 수많은 이들이 이른바 ‘의병(義兵)’의 기치 아래 왜적과 싸웠고, 전쟁이 끝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난 기록들도 적지 않다. 반면에 허울뿐인 양반의 신분으로 경제적 몰락을 당해 이른바 ‘몰락 양반’으로 전락한 사례들도 발견활 수 있다. 하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 후기에는 이러저러한 조건으로 주어진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상황을 전하는 기록들이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예컨대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인구 분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30~50%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그 비율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불과 20% 내외였던 양반의 비율이 60~70 % 정도로 상승한다. 그리하여 근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제는 모두가 양반의 자손임을 내세운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그만큼 조선 후기의 신분 변동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이 책은 조선시대 호적을 통해서, 노비였던 가족이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으로 자리잡아가던 당시의 상황을 추적한 연구 결과를 담아내고 있다. 대략 3년 만에 호적대장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전하는 과거의 호적을 토대로 그 후손들을 추적하여 신분 변동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노비의 인구를 대략적으로 추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호적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지하듯이 노비는 양반들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상속이나 매매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노비를 보유한 양반들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들의 호적에 올리기도 하고, 반대로 그들의 존재를 굳이 호적에 올리지 않고 활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주인의 집에서 살아야했던 ‘솔거노비’가 있는가 하면, 주인과 독립하여 일정한 ‘신공(身貢)’만을 바치던 ‘외거노비’가 존재했다. 주인이 데리고 사는 ‘솔거노비’는 호적에 올릴 필요성이 그리 많지 않지만, 독립해 사는 ‘외거노비’의 경우 주인임을 내세우기 위해 반드시 호적에 편입하여 기록했다. 그리고 노비의 가족들 역시 독립된 가계로서 별도의 호적을 가져야만 했던 것이다.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고 있듯, 이 책에서는 노비로 편입되었던 인물의 가계에 속했던 구성원들의 이후 호적들을 추적하여 신분 변동에 관한 내용을 밝혀내고 있다. 대략 2백여년 간의 호적을 조사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임을 드러내는 ‘유학(儒學)’이라는 호칭을 얻었는가를 실증적인 작업으로 검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독립된 가계를 이룬 노비들의 경우 경제 활동이 자유로웠기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주인인 양반에게 돈이나 재산을 증여하면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들의 호적을 추적하면서 그 자손들의 호칭이 변화하였음을 탐지하고, 그것이 신분 변동의 구체적 사례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실상 과거의 호적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이끌어내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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