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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애도방식
박지영(시인)
1. 애도
“이 주일 동안 나는 여기서 끊임없이 미망을 생각했고 그녀의 죽음을 괴로워했다.”, “모든 것들이 아주 잘 굴러간다. -그런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다. 버림받은 사람처럼” “두 번 다시 볼 수 없구나,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구나!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니! 이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어떤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롤랑바르트,『애도일기』중에서.
롤랑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부터 이렇게 애도일기를 간단히 쪽지에 써서 케이스에 모아두었다. 바르트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그 글들을 모아 묶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한 걸음씩 가고 있다. 설국열차는 아니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탑승하게 된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탯줄도 끊지 못하고 죽음의 열차에 타는 신생아부터 생의 에너지를 다 태우고 노년에 접어들어 숨을 할딱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머무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남아 있는 자는 먼저 죽은 자를 그리워하고 슬퍼하게 된다. 애도의 한자어가 슬퍼할 哀자와 슬퍼하는 것이 悼에 가깝다는 도가 합성된 단어 哀悼이다. 최초의 애도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최초의 애도는 어머니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의미한다. 애도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그 상실에 대한 심리적 태도와 그것을 소화해내는 과정 자체다. 이번 호에는 죽음에 관한 시편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죽이고 싶은 살의와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주체의 연민까지 두루 살펴보았다.
박후기 시인은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점집을 찾아가는 어머니의 애도방식을 그려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생각나면 울면서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占집으로 간다.
엄마는 울면서
점을 치러 갔다
살다가 살다가
겨우 살아질 무렵,
남 몰래 울면서
점을 치러 갔다
거꾸로 서는 쌀만 보면 서글퍼져서,
배고파 울고 있다는 죽은 아들 생각에
거꾸로 서는
쌀만 보면 서글퍼져서,
엄마는 죽은 아들에게
울면서 지폐를 쥐어주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부자와 가난뱅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남몰래 다녀간다는,
언덕 위 작고 붉은 집
-「占집」 박후기, 2013, [현대시] 7월호
화자의 어머니는 인생의 힘든 고비를 벗어나 살만 하니까 먼저 간 아들이 눈에 밟힌다.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아들의 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점집을 찾는다. 점집을 찾아가는 이 행위는 일종의 애도 작업의 일환이다.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점집에 가서 아들을 불러낸다. 정신없이 먹고 사느라 잊은 줄 알았는데 살만 하니까 새록새록 더 생각난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던가.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잊은 게 아니라 사는 것이 급급해 잠시 밀쳐놓았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으면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속으로 삭이고 지나간다. 가족 중 누군가의 죽음은 남은 자에게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풀어내야만 살아남은 자가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 시인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에게 가 있던 리비도를 ‘나’에게 선회해 옮겨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기 위한 방편으로 점집을 찾는다. 무속인이 쌀을 상 위에 흩뿌릴 때 쌀이 거꾸로 서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죽은 아들이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배고파 울고 있기 때문이라는 무속인의 말에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또 운다. 죽은 아들에게 노잣돈으로 쓰라고 돈을 쥐어 주고 나온다. 그것으로 어머니는 어느 정도 위안을 삼는다. 어머니는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스런 기억을 잊기 위해 점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을 되살리려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행위는 자식 잃은 화자의 어머니의 애도의 한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정신과 상담을 하기보다 손쉽게 점집을 찾는다. 너나 할 것 없이 남몰래 다녀가는 점집이 정신과의 상담을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으니 다시 그 상황이 반복되면 또 다시 점집을 찾아 순례를 한다. 세상이 어둡고 불안하면 사이비 종교나 점집이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이즈음 주역이나 역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경향도 현실 도피의 한 방편이 아닌가 싶다. 주영중 시인의 「박수무당」을 살펴보자.
이곳과 저곳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란
남의 운명을 가만히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란
불편한 응시
기운이 이끄는
힘의 자장을 몸으로 정녕
무심히, 누군가
운명을 잠시 손으로 만지고 간 것처럼, 누군가
눈으로 운명을 응시하고 간 것처럼
심장이 뛴다
멀리를 내다보는 일이란, 어쩌면 허망한
어쩌면 무섭거나 소름끼치는
아주 멀리에서
심장과 잠시 조우하는 일이란
운명이 잠시 겹쳐지는 일이란
불가해하고도 멀 고 먼
-「박수무당」, 주영중, 2013, [현대시] 7월호
주영중 시인의 시도 점집의 박수무당에 대해 말하고 있다. ‘占집’이 애도의 작업을 드러냈다면 박수무당의 화자는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드러냈다. “남의 운명을 가만히 물끄러미/바라보는 일이란” 불편한 응시라고 한다.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 내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런데 박수무당 앞에 앉아 있으니 더욱 불편하다. “내 운명을 손으로 만지고 간 것처럼” “응시하고 간 것처럼” 심장이 뛴다고 한다. 또한 멀리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무섭거나 소름끼치는 일이라고 한다.
무속인이 하는 말을 두고 운명을 잠시 손으로 만지고 간 것이고, 운명을 응시하고 간 것이라는 표현이 아주 감각적이고 신선하다. 그런 일은 심장이 뛰고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이라 했다. 그렇게 무속인의 말과 운명이 겹쳐지는 일이란 불가해하고도 멀고 먼 것이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 한다. 불가해하기에 더욱 더 미래에 대해 궁금하고 호기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은 신들만의 권한이었다. 신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사랑의 대가로써 여인을 유혹하기도 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면서 미래가 불안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욱 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의중을 읽어 내지는 못한다. 독심술을 익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 사람들은 속을 들킨 것 같아 불편해 한다. 그 심리는 큰타자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타자란 아버지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전지전능한 신에 가깝다. 시인은 박수무당이 나를 보는 것은 운명이 잠시 겹쳐지는 일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운명이 무속인이 하는 말과 겹쳐진다고 믿는 것은 성격이 운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무당의 말을 듣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다. 아예 모르면 좋았을 것을 무속인의 말에 귀가 쏠려 버리니 그 말이 화근이 된다. 그래서 무섭고 소름 끼친다고 했나 보다.
2. 죽음을 마주보다
최호림 시인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거역할 수없는 죽음과 그에 따른 비애를 담담히 그려냈다.
수척한 그림자가 하나같이 닮았다
꽃 진 대궁의 노을빛이 닮았고
뒷모습의 쓸쓸함이 닮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이 닮았다
구성진 가락으로 뽑는 노래가 닮았고
굽이굽이 바람에 부대끼는 외로움이 닮았다
사랑과 미움이 마주치는 눈빛이
풍기는 냄새가 닮았다
행복한 표정도 불행의 흔적도 형제처럼 닮았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
나사 풀린 말솜씨가 닮았다
닮지 않고는 절대로
저 문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지름길로 숨 가쁘게 왔든 넓은 길로 넉넉하게 왔든
또는 좁은 길로 거칠게 왔든
통로는 하나뿐이다
마지막 순간 들이켜는 숨이 가장 닮았다
-「귀로」, 최호림, 2013, [시인정신] 여름호
이 시에는 늙음에서 오는 비애와 슬픔이 진하게 배어있다. 사람은 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쌍둥이도 다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 시에는 노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이 잘 드러나 있다. 젊어서는 제가 잘났다고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지만 인생의 노년기를 맞으면 모든 게 같아진다는 말이 있다. 학력 평준화, 외모 평준화, 경제력 평준화의 시기가 온다고 한다. 배웠건 못 배웠건, 잘났건 못났건, 돈이 있건 없건 마찬가지라는 거다. 제목도 귀로이다. 귀로의 뜻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다. 태아의 모습이 비슷하듯이 늙어서 갈 때가 되면 같은 모습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인은 수척한 그림자, 노을빛, 뒷모습의 쓸쓸함, 발걸음, 구성진 노래, 외로움에 떠는 눈빛과 풍기는 냄새까지도 닮았다고 한다. 행복해 하는 표정도, 불행한 모습도 다 닮았고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과 나사 풀린 말솜씨까지도 닮았다고 한다. 시인은 이렇게 닮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고 한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마음이 가난해져야 가는 문이다. 그 통로는 같이 갈 수도 없고 혼자만이 가야 하는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이렇게 닮아져야 갈 수 있는 것이다. 기억까지도 다 내려놓고 들어가야 하는 문이다. 그 문턱을 넘어 갈 때의 마지막 깔딱 숨까지 모두가 닮았다. 인간이 늙어 저 세상으로 건너 갈 때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들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저 문을 지나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겪어 보지도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문을 지나가야 하는 운명도 있다.
봄 햇살 사이로 젖 빠는 힘 다해 솜털머리 고물고물
지구보다 무거운 하늘 밀어 올리는 애송이들
탯줄 자르기 전에
양수도 마르기 전에
싹둑!
미처 눈에 담아 보지도 못한 파란 하늘 아래
단두되어 나뒹구는 모습
푸른 피 한 방울 마를 틈 없이
날 선 칼날에 외마디 비명조차
건조한 유언으로도 남기지 못한 애筍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침묵의 봄이 장송된다.
-「애筍」, 신표균, 2013, [시인정신] 여름호
언젠가 미혼모가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탯줄도 끊지 않은 채 검은 비닐봉지에 싸서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버렸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또한 마을 앞 쓰레기더미에서도 검은 비닐봉지 속의 태아가 죽어 있었다는 사건도 접했다. 시인은 그 죽음을 예사로이 넘기지 않고 애筍이라는 시로 형상화해 놓았다.
시인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지구보다 무거운 하늘을 밀어 올린다”고 했다. 맞다.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순간의 힘과 맞먹는 힘이라고 한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받는 고통을 아기와 산모 둘을 비교하면 아기가 산모의 고통보다 천배 더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 아기는 어머니의 산도를 지나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지구보다 무거운 하늘을 밀어 올리는 것과 다름없다. 2연에서는 “싹둑!”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한 행에 처리했다. 새싹을 내밀자마자 잘려나간 것처럼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그래서 3연에서 싹둑과 연관지어 “푸른 피” 라는 말을 끌어냈다. ‘애송이들 - 싹둑 – 푸른 피’로 봄과 애순의 연상이 잘 이루어졌다. 애순은 나무나 풀의 새로 돋아나는 어린 싹, 어린순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시에서 조금 욕심을 내보자면 “애송이”라는 말의 어감이 강해 조금 부드러운 말이었으면 싶다.
이시는 세상에 태어나 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제 어미에 의해 비닐종지에서 싸여 죽은 태아에 대한 레퀴엠이다. 그래서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아기를 낳자마자 어린 생명을 검은 비닐봉지에 싸서 버린 어린 미혼모에게 모성은 무리인가?
3. 심리적 殺意
정미 시인의 「이방인의 햇살」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있고 시의 내용에도 카뮈를 거론해서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 모르겠다”로 담담하게 남의 이야기처럼 시작하는 이방인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뫼르소는 어느 날 양로원에 있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어렵게 시간을 내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간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배를 태우고 밥도 먹는다. 돌아와선 태양이 내리쬐는 탓에 더위를 피해 바닷가로 갔다가 아랍인을 살해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문제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지 얼마 안 되었다 것이다. 그래서 뫼르소에게 패륜아라는 화살이 쏟아진다. 어떻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애인과 놀아나고 바닷가에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부도덕한 패륜아에 살인자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 몰린 뫼르소는 사형언도를 받는다.
봄 대낮에, 중년의 사내가
전철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봄 햇살이 흔들릴 때마다
비대한 사내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흘리는 침의 길이만큼씩
입이 벌어진다
........................
사내의 게트림에
식은땀이 난다
참을 수없는 존재의 모호함?
로봇처럼 굳은 몸에서 눈알만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
생각의 끝자락에서 달랑거리던 허연 지방이 떨어진다
철길 밑 한강으로 툭
밀어버려?
덜컹
혼비백산하는 햇살
사내를 쳐다보는 순간
터널이 전차와 햇살을 한 입에 삼키고 입맛을 다신다
카뮈를 움켜쥐고 갈가리 칼질하던
내 시신경이 궁싯거린다
유리창에 부딪는 눈부신 불빛에 칼침을 당한다
-「이방인의 햇살」, 정 미, 2013, [시인정신] 여름호
이 시는 봄볕이 내리쬐는 나른한 오후의 전철 안 풍경이다. 화자의 옆에 앉은 사내가 졸고 있다. 고개가 옆에 앉은 화자의 어깨 위로 기울어져 기대온다. 비대한 사내의 머리가 몸에 닿는 것도 불쾌한데 거기다 침까지 흘리고 있다. 침은 마치 허연 지방, 비곗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불결하고 더럽게 느껴지고, 사내의 게트림에 식은땀이 나고 비위가 상해 견딜 수 없다. 이때에 전철이 한강다리를 지나가게 된다. 불쑥 시인의 머릿속으로 자신에게 머리를 기댄 사내를 창밖 강물 속으로 밀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살해충동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화자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섬뜩하고 놀라 “혼비백산하는 햇살”이라고, 햇살이 더 놀랐다고 햇살에게 덮어씌우는 표현이 재미있다. 화자는 그런 순간 강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바닷가에서의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가 떠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사로잡힌 ‘나’는 유리창에 부딪쳐오는 햇살에 칼침을 당한다고 했다. 화자는 심리적인 살해를 느낀 것만으로도 바로 죄의식을 갖는다. 하루에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순간순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죄를 수없이 짓고 산다. 정미 시인은 살의殺意를 느낀 그 순간을 세밀하게 포착해냈다.
뫼르소의 살해 동기는 “쏟아지는 햇살이 강렬해서 햇볕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그냥 스쳐지나갈 수가 없다. 정말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을까?
“하늘에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빛이 쏟아졌다. 아스팔트가 눅진눅진 발밑에서 녹아내렸다…… 바닷가에는 햇볕과 침묵만이 있었다. 모든 것이 붉게 일렁였다. 햇볕에 머리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 내리쬐던 것과 똑같은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했다. 바다는 뜨겁고도 무거운 바람을 실어 보냈고 하늘에서는 눈부신 불의 칼날이 쏟아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피부가 따가웠다. 태양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 때 내리쬐던 것과 똑같은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했다.”는 구절에 눈길이 가 멎었다. 이 구절 하나로 뫼르소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강렬해서 햇볕을 향해 총을 쏜 것”이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뫼르소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는 너무나 갑자기 당한 어머니의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동안 어머니를 잊고 지낸 자신이 못마땅하고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아랍인을 죽인 날의 쏟아지는 태양 빛은 어머니의 장례식 때와 똑 같이 작열한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의 숨 막혔던 그 순간이 떠오르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뫼르소는 리비도를 다른 대상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슬픔을 자기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형 언도를 받으면 반발하고 항소하고 재심을 청구하지만 뫼르소는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고는 죽음을 앞두고 “눈을 뜬다. 별이 보인다. 바깥세상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밤의 냄새, 흙의 냄새가 시원했다. 여름밤의 평화로움이 내 속으로 흘러들러온다.”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무관심했던 세상에 마음을 연 것이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사형언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뫼르소는 애도의 단계에서 병적인 단계를 지나 멜랑콜리의 단계인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정상적으로 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4. 정상적인 애도
‘애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사례로 내세워도 될 것 같은 정상적인 애도의 방법을 공영구 시인의 「대각선으로 떨어지다」가 있다. 친구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문상 가서 있었던 일을 진솔하게 표현한 시를 읽어 보자
신문 방송 특종보다 더 놀라운 친구 부음 소식
왠지 성실한 놈부터 먼저 가서 불안하다
자주 보지는 못해도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보고
가끔 전화하던 사이인데 죽었다는 소식에 머리카락이 선다
중장비 운전하던 멀쩡한 친구 병원 간 지 이틀 만에 사망
자식 취송담하면 그만인가, 마누라는 어쩌라고
처음 보는 친구 마누라 내 손 잡고 엉엉 울 때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 보니 눈물이 절로 나더라
요새는 내 마음 속에 이상한 괴물이 있는지
자칫하면 실수할 정도로 눈물이 마냥 흐른다
오늘은 정말 잘 흘렀다
다른 문상객 오니 곡소리 들리고 그 소리 맞춰
나는 돼지고기 한 점 또 꾸역꾸역 씹는다
죽은 놈 죽더라도 산 놈은 살아야지
상복 입은 친구 마누라 내 손 잡고 하는 말 ‘지발 건강하이소’
언제 또 영안실 찾아올지 두려운 마음으로 활짝 핀 벚꽃 보니
꽃샘바람에 꽃잎마저 대각선으로 떨어진다.
-「대각선으로 떨어진다」, 공영구, 2013년, [시인정신] 여름호
장례문화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척도다. 인간이 문명의 세계로 들어서는 최초의 표시라고 한다. 공영구 시인은 친구의 상가에 문상객으로 가서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술회했다. 그의 시에는 트릭이나 제스처가 없다. 솔직 담백하다. 그의 심상이 솔직 담백하기 때문이리라. 건강하던 친구가 병원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죽었다는 사실은 시인에게는 신문기사의 특종보다 더 놀랄 일이다. 아직 저세상으로 불려갈 때가 아닌데 말이다. 가족의 죽음 다음으로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친구나 지인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인은 “성실한 놈부터 먼저 가서 불안하다”는 의중을 드러낸다.
시인은 친구의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 보니 눈물이 절로 나” 마냥 울었다고, 오늘은 정말 눈물을 잘 흘렸다고 한다. 시인은 문상객으로 가서 왜 울었을까? 그 친구의 죽음이 서러워서, 그 친구의 부인이 혼자 남게 되어서, 자식들이 불쌍해 보여서 아니다. 그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시인은 부음을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철렁했다. 불안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선다고 했다. 건강하던 친구도 저렇게 죽는데 하는 생각 뒤에 ‘나도 언젠가는 죽는구나. 다음은 내 차례인가’ 싶어서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선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기 연민 때문에 그렇게 마냥 울었던 것이다. 하지만 울음에는 카타르시스효과가 있다. 눈물을 실컷 홀리고 났을 때 느껴지는 후련함이 있다.
화자는 울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불안하던 감정이 많이 사라지게 된다. 그는 옆으로 돌아 앉아 다른 사람들의 울음을 들으며 “돼지고기를 꾸역꾸역 씹는다”. 속으로 “죽은 놈은 죽더라도 산 놈은 살아야지” 하면서 먹는다. 이는 대상에게 가 있던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로 나르시시즘이 선회해 자기보존 본능이 되살아 난 것이다. 이 시에서는 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 정상적인 애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운명은 직선으로 오지 않고 대각선으로 떨어지기에 어디에 떨어질지 알 수가 없다.
-시인정신 201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