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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글마루문학회 여러분 지난 4월 8일에 있었던 글마루 정기모임에 대하여 보고 드립니다. 이 날은 중국 동포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김 훈 작가를 모시고 <중국문단 이야기> 의 주제로 특강이 있었습니다. 3대에 걸친 김 훈 작가의 가족사를 통해 조선인이 겪은 역동의 역사, 작가로서의 삶, 동부아시아 작가포럼 회의에서 산정한 주제 토론내용들을 소개 및 조선족 작가들의 활동과 문단상황들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던 매우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글마루를 위해 특강을 해 주신 김 훈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래는 김 훈 작가의 약력과 강의 내용입니다. 약력: <김 훈 > 1955년 5월 18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1976년, 1991년 선후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와 북경영화대학 시나리오학부 졸업.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예창작실 전직 작가, 주임, 연변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 길림성연극가협회 부주석, 연변연극가협회 부주석, 연변청년연합회 부주석, 연변방송텔레비죤방송사업국 부총편집, 연변텔레비전방송국 부국장 역임. 출간작:소설집《청춘의 활무대》,《어머니의 비밀》, 《수도권의 촌놈들》, 《아,동년!》, 《또하나의 나》,연극집《김훈연극집》,대형연극《시름거리웃음거리》, 《청춘소야곡》,《망각된인간들》,대형무용극《백두산천지선녀》,TV예술영화 《민들레꽃》,《어머니시름놓으세요》,TV드라마《갈꽃》,특집방송프로 《추석의 보름달》,기행문《조선반도명승순례》,《미국견문록》,《김훈문집》 출간수상:《길림성장백산대상》,중국소수민족문학상,중국연극진흥상, 중국소수민족텔레비전문학상, 전국무용극창작상, 민족문학상, 중국방송대상 《무지개상》 등 전국상 수상. 현재:중국작가협회회원,중국연극가협회회원,중국소수민족연극가학회 이사,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상무이사,중국영화문학학회이사.중국작가협회작가자격심사위원, 중국,일본,한국 3국작가정기포럼운영위원,국가1급작가,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칼럼니스트로 활약.
강의 필기- 미국을 방문하면서 작가정신으로 투철한 문단이 있어 무척 감동받았다. 중국은 현재 문단이 많이 사라진 상태다. 중국문단은 미국 내 문단의 활성화에 대해 매우 부러운 심정이다.
나는 이민 3세이다. 할아버지는 울산 시에서 일본 배를 만나 일본으로 건너가 선원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는 집안끼리 정략결혼한 사이였는데 할머니를 두고 떠났다. 할머니가 21살이 되자 남장을 해서 일본 시모노세키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몇 달에 한 번 들어오는 할아버지는 선술집에서 주로 술만 마시다 다시 바다로 나갔다. 할아버지 고향은 전라남도 곡성 입면 삼오리 시골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대만으로 건너가서 돈을 벌어 땅을 사고 자리를 잡은 다음 다시 중국의 길림성으로 갔다. 그러나 길림성으로 가는 도중 짐짝을 모두 다 도둑맞고 알거지가 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국민당과 공산당끼리 내전 중이었는데 그 중 국민당은 조선족들의 씨종자를 말려 죽이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은 심심산골에 숨어들어가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6.25 전쟁이 터진 후 아버님은 중국군으로 참전하였다. 아버지는 학식이 있어 처음엔 대장의 통역을 했다. 얼마 후엔 지원군 대표 무용수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러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가 소속된 공연단의 소속부대가 전멸했고 아버지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난 후엔 동북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하게 된다. 그 당시 아버지는 시를 좋아했다. 참군해서 조선에 나갔다가 미군 비행기가 폭격하여 어떤 집이 불이 탔는데 타다 남은 북한 시인 조 기천 시인의 시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공군 후퇴 후 조 기천 시인을 직접 만나게 된다. 중공군이 압록강에서 궤멸당한 상태에서 북조선군 부대를 만났는데 그 중 조 기천 시인이 있었다. 그 만남을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다. 53년도 매일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문예판을 만들었고 그 이후 아버지는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어머니는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외할아버지는 김 좌진 장군의 부대장이었다. 한 파벌은 간도에 남아 항의를 하자 ,한 패는 시베리아 소련으로 들어가자는 상황에서 외할아버지는 그냥 남았다. 이 후 외할아버지는 농사를 짓다 유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은 동부아시아의 네 곳이 고향이다. 태어난 곳도 고향이고 눌러 산 곳도 고향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시모노세키인데 아버지의 시 속에는 우리 민족 한반도의 고향 정서만 있다. 일본의 시노모세키는 없다. 장소라는 것은 애착이 가고 정이 가는 고향이야말로 작가의 고향이다. 왜 그런가? 할아버지가 출항하고 나면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 암기력이 대단하여 들은 것 그대로를 동네 분들에게 얘기해주고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매일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태어난 곳은 시모노세키이지만 보고 들은 것은 우리의 고향 한반도였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기를 좋아했다. 아버지의 책장에는 시집이 많았다. 소련의 문학 등 고향, 사랑에 관한 유명한 시집이 많았다. 당시 아버지는 내가 어린아이라서 어른들의 책을 읽지 못하게 하셨다. 그 때 아버지는 내게 음악가가 되라고 했다. 가수나 작곡가가 되길 원했다. 음대요소를 반시간을 공부하고 연습해야만 밥을 먹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음악을 연습하는 것이 싫었다. 이후에는 내게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간첩으로 몰려 잡혀갔다. 그 때 나는 소를 키웠고 온 밤을 앉아 일기를 쓰는 것이 내 일과였다. 그 내용은 소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중국어 절 반, 우리말 절반의 문장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때 내 첫 시집이 나왔다. 당시는 모두 모택통을 칭송하는 이야기였는데 나는 소를 잘 먹여서 돌보는 내용으로 하여 혁명을 하자는 특이한 내용의 처녀 시집을 내 놓게 되었다. 그 때 아버지는 너 죽어도 작가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나라에서 작가가 되는 것은 멸망의 길이라고 하셨다. 당시 나는 작가가 꼭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대학을 진학하여 국문학과로 들어가자 다시 책을 대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세월이 차차 좋아지겠지 너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독려해 주셨다. 그러나 세간의 소문에는 아버지가 책을 낼 자격이 안 되니 아들을 시켜 책을 내게 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가 쓴 적이 없는 연극을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는 아버지가 써 준 것이 아니다는 인정을 받고 오해를 씻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이신 아버지의 처녀작은 소설이고 소설가인 나의 처녀작은 시이다. 아버지가 손을 대지 않은 분야로 가려고 하다 보니 시를 안 쓰게 되었다. 사회활동가로 아버지는 활동하고 계시지만 김 철은 시인으로 남는다고 말씀하신다.
*.시인 김철은 1932년 일본 시모노세끼 출생으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주석, 연변문련 주석 등 직을 맡아하다가1982년 중국작가협회로 전근,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월간지 주필을 력임했다.
2008년 작가 진흥 위원회 포럼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한국의 작가와 중국작가의 문단 성격은 다르며, 후원이 필요하다. 한국 측에서 중국의 문단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다. 한국 측은 조선족 작가를 중국작가가 아닌 것으로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작가 포럼회는 주체국가에서 꼭 주제를 낸다. <상급 작가들이 어떤 것에 신경을 쓰고, 또 그들의 글 쓰는 흐름은 무엇인가> 란 주제를 제시한다. 문학의 고향. 인터넷 시대의 작가의 영향 등 주제를 설정한다. <동아시아의 문학은 어디로 향하는가?> 는 일본 포럼에서는 제시한 주제이다. 또 <빈부와 욕망>, 사랑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영원한 주제로 꼽았다. <작가로서의 장소와 상상력은 어디에 있는가?> 란 문제는 내가 제시하였다. 최근 <연애와 문학>을 내용으로 토론하는 작가들은 80년대 이 후 출생들이었다.
한 작가가 말하길 연애소설을 쓰기가 매우 어려운 이유가 동물적 열정과 충격이, 성욕과 연계된 연애감정은 불합리하다고 하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의견에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작가들은 빈부와 욕망은 이 욕망들이 상반될수록 국가가 위기로 몰린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작가는 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영토가 있다. 그 고유한 영토가 있어야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포럼에서 세 나라의 작가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작가는 나라나 집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로를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사명이다. 작가는 국경이 없는 사람이다. 작가는 정치집단이든 충돌을 하지 못 하도록 만드는 보험적인 존재라는 말이 모아졌다. 이 세 나라가 어떻게 가든지 지역을 벗어나 작가는 작가끼리 나오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고 나라를 떠나서 사랑을 나누고 인간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약속되었다. 제 3차는 중국에서 하게 되었는데 일본과의 (조도)섬 분쟁 때문에 포럼을 열수 있도록 다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무한정 연기가 되었다. 작가는 정치적 분쟁에서 자유롭자고 했는데 연기된 것이 매우 아쉽다. <작가의 영감> 부분에서 작가는 어디서 영감을 얻어서 글을 쓰는가? 이 주제는 세세대대로 내려오는 고루한 화제지만 이것을 되묻는 과정에서 아주 엉뚱한 역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이기에 작가의 영감에 대해서 쓰기에는 무척 어려운 주제였다. <문학과 사회, 가정> 문학이 사회에 주는 영향력, 사회가 가정에 주는 영향력, 가정에서 읽혀지는 문학 등 상관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주제들이 작가포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회의이다.
질문>> 심 언-중국 노벨학자의 정치관에 대해 매우 비난이 많았다. 우리 조선족들은 어느 정치적 성향을 띄나? 어느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지 궁금하다. 답변> 조선족 작가들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다. 연변이 구심점이 되어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많다. 하지만 조선족의 정체성은 학술분야에서 많이 거론되고 있다. 조선족을 조선족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다 같은 한 국민인데 그것부터가 문제이다. 이 문제가 이상하게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에서는 그냥 조선인 한 국적이었다. 38선이 생기면서 고향에도 못 돌아가고 북에도 1953년 민족의 국적을 가르는 정책을 펴는 바람에 조선 국적이나 중국국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었다. 중국국적을 가진 한국인이 조선족이다. 풍속 세태 ,역사 등 작가들이 조선족 이민사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현시대 조선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다. 조선족은 5개의 이민단계를 거쳤다. 민족의 대이동1차 조선합병 후 만주로 옮긴 개척기 청나라시기-광복 후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2차 대이동-60년대 중국에서 3년 동안 큰 재해가 들었다. 몇 백만 명이 굶어죽는 가뭄이 들었었다. 당시 북한은 풍요롭게 잘 살고 있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갔었다.- 4차는 88올림픽으로 대한민국실체가 알려지면서 남한으로 대거 이동했다.- 조선족 인구 200만에서 약 50만이 대한민국으로 나갔다.- 제 5차 이동은 자식들이 커서 한국으로 기술을 배우러 들어가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재 창업 한 인구 외에 연해지구, 상해, 광주, 대련 등 부모들이 도시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땅을 버리고 그곳으로 갔다. 이제 조선족의 작가들도 이제는 너무 광활하게 넓어진 생활상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아직 미국생활을 담은 작품은 없다. 미국 쪽은 미개척분야이다. 노벨수상자인 모옌은 내 친구이다. 중국 문화부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희극, 공연 위주 각 장르가 다양한 예술 학원의 문화원 원장이다. 중국작가들은 노벨상수상에 대해 정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많았다. 그 전 중국작가의 노벨 평화수상자는 감옥에 있다. 노벨상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왜 판이하게 다른가? 그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옌이 매우 글을 잘 쓰는 작가로 생각한다. 1980년대에까지는 글의 검열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국가이므로 금기사항은 있으나 이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에는 쓸 수 있으나 정치적 반대 입장은 아직도 쓸 수 없다는 점이 작가로서의 비애다.
서 미단 질문> 모옌의 책을 읽었는데 매우 잔인했다. 이것이 요즘 중국작가나 작품의 성향인가? 답변> 그렇지는 않다. 특이한 이야기가 잘 팔리기 때문에 그렇다. 그의 이야기 중 매우 잔혹한 부분도 많다. 한 예로 아내가 비둘기를 이용해 정부와 편지를 주고 받는 사실을 알고 그 비둘기를 죽여 아내에게 요리해서 먹이는 남자의 보복을 아주 지독한 수단으로 표현하는 글을 썼지만 실제 모옌의 성격은 매우 친절하고 조용하다. 그의 이야기의 배경엔 그의 할머니 영향이 중요했다. 중국 전통으로 내려오는 귀신이야기를 오늘의 이야기로 잘 꾸며서 잘 썼다. 모옌은 천하의 이야기꾼이다.
유 지애 질문> 작가로서의 영감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듣고 싶다. 답변> 내가 아버지께 물었다. 시는 시적인 특성을 어떻게 얻는가? 그러자 아버지는 남다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남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가? 묻자 추억에서는 내가 백만장자다. 하지만 사색에서는 가난뱅이다. 사색에서는 백만장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를 비추어 보아 시는 많은 사색에서 와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이것 역시 기가 막히는 질문이다. 작가는 이런 사람이다. 꼭 집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인류 인문의 공동사이다 란 거창한 말도 있지만 작가는 누구하고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심지어 컵, 꽃, 이슬. 사물과 대화하고 더 나아가서 우주하고도 대화가 가능한 것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뭐든지 대화를 통해 자기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 작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혼 세계를 치유하는 그런 거창한 언사보다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작가이다.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시인은 현실생활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하늘을 날고 싶은 데 하늘에는 못 올라갔다. 그렇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것이 시인이다. 소설가는 머리를 숙이고 밭길을 가는 농부이다. 그냥 열심히 걷는 것이 소설가이다. 그런 농부도 꿈이 있다. 농부의 꿈은 가을이다. 머리를 숙이고 밭길을 걷지만 풍성한 가을을 꿈꾼다. 작가의 영감에서 역시 묵묵히 밭길을 가는 농부이다. 작가는 묵묵히 사색하고 체험하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젠가 자신의 창작의 가을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이 삶의 장소는 작가적인 장소이다. 여러분들도 작가적인 공간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을 기대해 주시고 열매를 맺기 바란다.
손 진봉 질문>작가적 장소란 구체적인 설명은 무엇인가? 몸담고 있는 환경인가 작가 나름의 정신적 장소인지 헛갈린다. 답변> 작가로서의 장소는 애정이 들어가고 상상력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뜻한다. 크게 예를 들면 고향이다. 살아가는 현장에 그치고 마는 장소는 그저 장소일 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만우 질문>작가님은 조선족, 한국인 중 어느 사람들과 더 많이 교류하나? 답변> 어디를 가든 한국인 조선족이 있다. 어디를 가든 한국인이 있으면 그 다음은 조선족이 따라 들어온다. 조선족들과도 만나지만 대개는 한인들과 많이 어울린다. 미국에도 문학애호가들, 사업가들인 조선족 문단이 있다. 그러나 지금 문단의 문제로 이어져 조선족들 중에는 이제 독자층이 없어졌다.
심언 질문> 작가님이 생각하는 마음의 고향은 어디인가? 답변> 연변이다. 그러나 전라남도 곡성에 갔을 때 감나무를 보는 순간 늘 곶감을 주시던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곶감은 할아버지가 내게 먹여준 고향의 맛이었다. 시모노세키에 갔을 때는 할머니께 들은 얘기로 아무리 흔적을 찾아보아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향의 감나무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이상입니다.
<참가인원:김 훈, 정해정, 안선혜, 서미단, 박계상, 최익철, 김동찬, 이정호, 손진봉, 이만우, 박신아, 이선자, 심 언, 유지애, 홍동식, 이일초 16명>
글마루문학회 서기 이 일초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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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일초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처럼 많은 말을 했던가요? 허허허, 정리한 글을 즐거운 추억을 곁들인 소중한 자료로 소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해정 회장님과 김동찬 선생님, 이선자 선생님을 비롯한 글마루문학회 여러분들에게도 정중히 머리숙여 인사 올립니다. 이달 18일 귀국합니다. 다음해 또다시 여러분들을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강의를 듣는 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심취했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 많이 궁금해졌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라며 다시 뵙게 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로써 또한 교포 3세로써 많은 일들을 겪으시고
한 중 일 포럼등을 주관하시고 많은 일들 하시면서도, 겸손하시고 소탈하신 모습.
무엇보다 문학기행을 통하여 진솔한 모습 뵈올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하시며 지켜온 귀한 정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또한 가장 감동적이였던 것은 고향에 대한 정의, 작가의 장소에 대해 할아버지의 곳감과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의 감나무를 보면서
감동으로 다가오셨다고 고백해 주신 이야기였어요. 저희들이 좀처럼 접하기 쉽지 않은 중국문단과 조선족문단과 삶에 대해 나눠주신 점도 좋았습니다
아주 특한 환경을 갖게되신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일들이 전개 되었지만,
무엇보다 국제적인 작가로써 인정받고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성장하신 선생님을 미국에서 뵈올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제 귀국하신다니 다시 한번 감사를 올리오며, 우리 글마루를 사랑해 주심에 고맙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시고 건강하소서.
김훈 작가님; 강의 내용 지상 강좌를 통해 잘 읽었습니다. 그 날은 집에 서울서 손님이 와서 부득히 참여하지 못했슴을 양해바랍니다. 만나자 이별이군요.
빠른 시일내에 다시 오살 것을 기대하며 계속 문운이 함께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여러분들의 과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귀국 전 작별인사로 글 두 편을 "오늘의 글"에 올립니다. 마냥 건강하시고 행운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김훈 드림
(블로그 주소: 김훈의 쉼터: http://blog.naver.com/usahunkim
아버님 블로그 주소: 김철-추억의 백만장자 http://blog.naver.com/bjjinz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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