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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감성과 못다 부른 정한(情恨)의 노래
- 황옥례 시인, 『괜찮아, 괜찮아!』의 시적 대응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신문예』고문)
1. 비논리의 세계와 몽환적 감응
그 어느 시간대보다 각별한 배려와 분별력이 맞물린 ‘더불어 함께(inter-being)’라는 공동체 의식이 절실히 요청되기에「따뜻한 감성과 못다 부른 정한(情恨)의 노래-황옥례 시인, 『괜찮아, 괜찮아!』의 시적 대응」으로 전제한 정신적 창조물은 정체성의 빛남이다. 특히 그 자신이 추구한 시적 내용물을 기본 골격으로 삼아 삶의 구조와 엄숙한 생명감의 관점에서 시적 형상화로 변형한 제4 시집 『괜찮아, 괜찮아!』(책나라, 2025)는, 그 삶의 일상에서 ‘자기 특유의 음성과 색깔, 느낌으로 채색되어 한순간의 격정도 평정’시켜줄뿐더러, 「비논리의 세계와 몽환적 감응」을 확인시켜주기에 거부감이 없다. 그렇다. 타자 간의 자존감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격랑의 시간대를 그 나름으로 만보(漫步) 하며 세세한 바람의 선율을 자유로운 영혼의 울림으로 깊은 트라우마(trauma) 또한 치유하는 시적 작위(作爲)는 따뜻한 감성의 맞물림이다.
까닭에 추상화의 선구자인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초 장르적으로 회화를 음악과 결부시켜 “영혼은 수많은 현을 가진 피아노, 화가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영혼을 울리는 손이다.”라고 역설하였듯 그의 시편에서 이채로운 몽환적인 색조(色調)와 아름다운 선율이 감지되어 못내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대다수 문인에 견주어 그만의 존재감이 빛나는 시인·수필가·화가로 다양하게 활동하며 한국신문예문학회 8대 회장을 역임한 황옥례 시인이 자신의 표지화에 담아 출간하는 제4 시집의 서문에서 “누구나 공감하는 시를 쓰고 싶지만 새 시집을 발표할 때마다 부끄럽다. 2019년『목어의 눈』 이후에 4번째 시집『괜찮아! 괜찮아!』를 발표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불온한 사회현상으로 상처투성이인 사람들, 그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괜찮아!’라는 말로 모두에게 위안이 되고 싶다...줄임...하늘나라로 여행가신 남편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에는 비장감이 묻어있다.
특히 시집의 편집 구도는 「 ‖책을 내며‖, 제1부(15편), 제2부(14편), 제3부(14편), 제4부(14편), 제5부(14편), 제6부(13편), 시집 해설」로 결(結) 고운 옷감처럼 84편의 시편이 날줄과 씨줄로 결부 맺은 그 매듭은 살아온 세월의 연륜만큼 한결 부드러운 감촉이다. 여기서 개념상 ‘네모’는 창문, 색종이, 책, 바지, 스마트폰, 식탁, 지갑 등 실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뿐더러 사각형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당위성이 요청될 것이다. 짐짓 ‘네모 세상에서 소외된 아내는 그의 뒤를 쫓아가 손을 잡는 시 심리의 정황에서’ 그 자신이 지상에 갈 앉은 낮은 음조로 “네모난 핸드폰 보며/네모 식탁에서 식사 후/네모 가방을 들고/네모 현관문을 향해 출근한다(네모 부부)”의 일면은 물론이고 주제 시격(詩格)인 「괜찮아, 괜찮아」에서 화자의 의중이 명백하게 표출되어 그 존재감이 빛난다. 까닭에 절절한 외로움과 고독에 자위하며 생존하는 인간의 형상을 진솔하게 그려낸 시편은 간결함에도 독자의 감응을 자극하는 정조다.
요즈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씁쓸한 여주 차를 마시며/내가 나에게 묻는다//
주말이면 핸드폰 벨도 휴가 중/찾아온다고 약속한 사람 없지만/혹시 현관 벨 소리에 귀 기울인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영산홍 꽃 빛깔도 참 고운데/함께 즐길 사람 떠났으니/그 사람 더욱 그리워진다//
홀로 의자에 앉아/하늘을 날고 있는 구름 떼를 보며/무한한 자유가 숙성된다//
홀로 남는다는 것은/지독히 슬프고 외롭지만/괜찮아, 괜찮아/내가 나를 위로한다//
- <괜찮아, 괜찮아> 전문
인용한 시편에서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세계고(世界苦)를 겪는 동시대의 독자에게 ‘함께 꿈꾸고 만들어갈 깨끗한 세상, 따뜻한 감성의 자유와 통섭 읊조리며, 다독이는 손길은 끝내 이상적인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여 신선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따라서 “끝 모를 계곡 속에 숨어 있어도/다가가면 그 속에 길이 있다네(산, 길을 열다)”라는 지혜로운 삶의 일깨움은 화자가 일상에서 체득하였듯 ‘산들이 겹쳐 있듯이 삶도 쓰디쓴 고난일 것이나 참고 넘어 헤쳐나가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이치를 삶의 잠언으로 일깨워주기에 의미심장하다. 까닭에 시편「사월이 지는 오후」는 ‘진달래 개나리 피고 지고 목련꽃 하얀 새 같고 보라색 수수꽃다리 향기로워 코를 유혹하는데 벚꽃, 살구꽃, 배꽃’에 맞물린 ‘아가들 웃음소리 까르르’의 반전으로 ‘하늘의 별, 지상에는 꽃, 그리고 마음에 시(詩)라’는 그 순수서정성은 신선한 감동이다.
또 한편 푸른 식물성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그 자신이 ‘햇살 음덕으로 가지마다 꽃불 켜고’ 있는 「벚꽃」에서 서술형 종결어미 ‘-지요’를 반복적으로 처리하여 “배고픈 서러움 달래려고/하루에도 몇 번씩 쳐다보며(배롱나무꽃)”에서 메르헨(Märchen)의 시적 정조는 끝내 다정다감이다. 그같이 ‘영혼이 자유로운 바람처럼 내 마음은 그 자리에 머문 채 함께했던 시간 속을 떠도는’ 현상에서도 담담히 묵언으로 지켜보며 “하늘은 청자 빛/끝없이 출렁이는 바닷물결/내 마음속은 여전히/그리움의 물결로 파도친다(바람 속에 서서)”의 시격(詩格)은 정중동(靜中動)의 시 심리로 ‘추억을 반추(反芻)하되 자맥질’하는 양상이다. 차제에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인 남북이 대처한 현실적 상황을 ‘감나무꽃 필 무렵 산까치와 고양이 영역 싸움이 벌어졌다’에 빗대어 “마음을 내려놓아라!/세상에서 존귀한 존재가 사람이니/지구상에서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놓아라, 놓아 버려라)”라는 그 일체감은 위기감이 묻어나는 형국이다.
2. 초월적 시학과 상상력의 의미망
그렇다. ‘한 편의 시란,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기도이기’에 시의 본질인 일상의 서정성에 일체의 거부감 없이 고독한 고뇌도 이겨내고 평상심은 회복할 사안이다. 따라서 저토록 목숨의 바다 위로 비상하는 새처럼 무한 경쟁의 시간대에서도 역사적 소임을 온전히 수행하는 강인한 시적 차별성은 새삼 역동적이다. 이처럼 삶의 일상에서 초조와 긴장감을 지탱할지라도 그 나름으로 생명 외경심의 존엄성을 자의적 은폐(隱蔽)로 수용하되 지극히 즉물적인 소재와 대상을 시적 질료로 따뜻한 서정성에 결합하여 그 자신의 절제된 감정으로 풀어내려는 진위(眞僞)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모처럼 삶의 일상에서도 ‘순간의 강렬한 찰나인 것을’ 새삼 확증하듯 “홀연히 흐르는 물의 알갱이들/아래로 흘러야만 착지점을 찾을 수 있는가/종착점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순간/수직 절벽 사이에 흰 거품들(폭포)”의 일례나 또 대조적으로 ‘무위(無爲)의 세계가 기다리니 어서 푸르른 숲으로 가거라’라는 각별한 관심 뒤 “혹시 짝사랑했던 황진이 잊지 못해/목이 메어 울지도 못하고/기웃거리고 동태를 살피는 거니(왜, 안 울어)”라는 문제의 제기는 거듭 유의미하다. 그렇다. ‘지금도 그의 눈빛, 목소리 기억하는’ 그 자신의 삶은 맑은 영혼에 투사(透寫)되어 “점심 후 산책길/팔장끼고 걸었네(쓸쓸한 길 위에서)”라는 아쉬움이 남을지라도 묵언으로 응시하며 ‘앙증맞은 제비꽃을 무연히 보고 있는’ 시적 형상화로 “왜! 혼자 왔어요?/묻지 마세요!/내 반쪽이 멀리 떠났어요(강가에서 만난 얼굴)”라며 앞서 사별(死別)한 남편을 회상하며 ‘지금도 그의 눈빛, 목소리 기억하는’ 삶의 일상은 저토록 뜨거운 눈물에 젖어있다.
까닭에 ‘한 줄 인생 일기가 되다’라며 그 자신이 체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로운 잠언으로 “다행히 5주 만에 실금은 사라졌으나/깁스를 풀면 바로 걸을 줄 알았는데/재활 치료가 기다리고 있다(찬란한 오월에 울고 있다)”라는 공감(共感)은 끝내 방울방울 한 맺힌 눈물이다. 따라서 아득히 지나쳐온 삶을 가늠하며 단조로운 호흡에 담아 ‘그때도 첫눈 내리는 날이었지’라며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낸 아쉬운 심사(心事)로 “꼭 한 번만 만나 달라던/눈빛이 강렬했던 사람//첫사랑이라고 고백했던 그 사람/지금도 가끔 애절한 눈빛 기억나네(첫사랑)”의 보기에서나 여기서 상세히 기술한「작가 연보」를 재차 논할 점은 아니나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응당 작품을 가지고 말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며 건축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불후(不朽)의 명화「최후의 만찬」’은 8년간에 무려 2천 번의 스케치를 통해 완성한 작품임’을 고려할 때 직물 대상을 시적 질료로 형사(形似)한 그 존재감은 자못 미덥다.
어디까지나 ‘파도치는 포말 속에서 셀카를 찍고 싶다’를 살아온 연륜과는 상이하게도 이같이 격정적으로 추측 보조어간 ‘겠’을 활용하며 “운 좋으면 별 같은 솔방울들/어깨에 마구 떨어지면 더 행복하겠다(포말 속에서)”도 그렇거니와 종종 ‘떠도는 꽃잎들을 보며 물멍*에 빠지는’ “내 어깨 머리 위에 앉는다/나도 정물이 된다//갑자기 수많은 물고기처럼/칠궁의 여인들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경회루와 칠궁)”라는 그 애틋한 정회(情懷)의 시 심리는 매우 느껍다. 한편 ‘꽃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오후’「다시 봄」에 맞물려 ‘꽃의 시인이라 일컬어도 지나침’은 없다. 아울러 그 자신은 시첩에 푸른 식물성 언어를 즐겨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꽃향기,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면 뿌려 드릴래요’의 기대감은 지대하다. 하여 “보고 싶은 사람 벚꽃 속에 있어요/꽃잎이 휘날릴 때 함께/화르르 날리고 싶거든요(또다시 벚꽃)”도 그렇거니와 산 위에 배 모형의 호텔인 썬쿠르즈를 휘돌아 평자의 향리(鄕里)로 ‘헌화가(獻花歌)의 그 꽃비 나리는’ 정동진 부채길의 선명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정동진의 고요한 아침/낯선 여행객들에게/꿈과 여유와 낭만을 선물하는 곳(정동진의 아침 1)”에서 언어 망(網)에 잇닿은 ‘한 송이 바람꽃의 시인’의 그 존재감은 서정성의 빛남이다.
차제에 또 다른 시편「푸른 봄비」에서 “봄비 내리고 꽃이 진다는 것은 초록 세상이/온다는 신호이고 초록 세상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라는 시 의미의 합리적 해법은 푸른 생명감이 묻어날 것이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정원에 무리지어 핀 꽃을 보고 유추했으리라는 추이(推移)로 “노랗게 핀 수선화 보고/‘수선화 마음의 눈에 나타나/축복 같은 고독에 반짝이네’(수선화)”도 짐짓 이채롭거니와 단조로운 호흡으로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로, 언어예술이라는 기존 시의 범주(範疇)를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예술’인 디카시(digital camera 詩)의 기법을 수용하고 시 의미를 응축시켜 선명하게 처리한 다음 시편은 또 하나의 신선한 충동이다.
가버린 버스/되돌아오지 않고//
식은 커피/맛없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 전문
보편적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향수, 만유의 본체인 자연을 축으로 하여 자연 회귀성을 새롭게 조명한 그의 정신작업은 본래의 나를 인식하면서 현실 속에 안주하며 시대의 아픔을 절감하기에 이른다. 그 같은 맥락에서 어느 날 ‘행주산성 강가 나 홀로 찾아온 그 같은 정황’에서 “강바람에 코스모스 갈대들/조용한 흔들림으로 가을을 알리고//강가 수양버들 아래 앉아/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의 역동을 보네(산책길)”에서 짐짓 ‘강물의 묵시적 교훈’을 가늠키 위해 자신을 해체하고 창조행위를 반복하는 그의 시편에 동양적인 숙명관(宿命觀)이 시적 토양으로 자리해 있다. 이같이 그 자신은 담백한 품격의 소유자로서 꽃말이 ‘고귀함, 숭고함,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목련꽃을 시적 질료로 삼아 “소복하고 보퉁이 가슴에 안고/고개 떨구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속울음 울며 떠나던 뒷모습/질곡의 세월을 어찌 살았을까?(하얀 목련꽃 지던 날 2)”라는 진지한 물음 앞에서 반복되는 물음표(?)를 통해 지극한 관심사도 그렇거니와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인류에게 가장 큰 죄악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라는 역설은 인용한 시편에서도 한 번쯤은 분별할 점이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자신이 분망(奔忙)한 일상에서도 시적 공간 만들기를 위해 몰두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음도 놀랍거니와 극적인 열망으로 견고한 고독 앞에서도 밤잠을 설치는 미적 공유의식은 ‘편 가르기의 구조가 아니라, 화합과 용서의 하나 되기’라는 본질적 의미망의 확장이기에 삶의 영역은 예술적 기쁨을 안겨주는 지극선(至極善)의 심성에 맞물려 있다. 모처럼 영국의 스펜더(Spender)가 기억력은 “특정한 감각적 인상으로 시인의 천부적인 재능이며 상상력과 결부된다.”라고 지적하였듯, 단순한 정신적인 재현작업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생산된 창조적 기억의 변형으로 생명력을 지닌 예술 행위는 더없이 경이롭다.
모처럼 그 자신의 시편에서 ‘출렁이는 말의 부조화이지만 어머니의 철학이 지금도 출렁이며 들린다’라는 자아 성찰에 “몇 년이 지나고 그때 왜 칭찬은 안하고/화를 내셨냐고 묻자/“여자가 손끝이 야물면 고생이다”/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했다.(손끝 철학)”라는 과거 회감(懷感)에 침묵할지라도, 아득한 기억 떠올리면 아직도 지상의 유일한 분단국으로 한국전쟁(The KOREA War)의 상흔(傷痕) 깊게 자리한 “강대국의 대립 싸움질에 골탕 먹은 우리 국민/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고 말았다/우리 민족은 무슨 죄로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인천 상륙작전 때 생긴 일)”라는 물음 앞에서 다소 호흡이 긴 서사시로 풀어낸 조국의 현상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남다른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저토록 가슴 졸이는 화자의 심정은 더없이 처연(悽然)하다.
각론하고 세계동포주의 일면이나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양상(樣相)에서 또 성별이나 과 나이와 별개로 그 자신이 인식하듯 우주의 항성 중 하나인 지구별은 ‘아름답고 다양한 물질로 가득하여 인류의 낙원’이었지만,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전쟁, 그리고 오염의 결과로 빚어진 참혹한 현상 앞에서 “울고 있는 농민들 아시나요?/갈 곳이 없어 학교체육관, 마을회관에서 생활하는/이재민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지구가 아파요)”라는 그만의 절규(絶叫)는 낮은 통곡(痛哭)이랄까? 이처럼 격정적이다. 또 한편 안타깝게도 ‘삶의 본원(本源)인 가정마저 뿌리 체 흔들리는 현상’에서 다양한 삶의 체험을 현대적 사유를 통한 응축된 낯익은 언어들이기에 모호성이나 현학성(玄學性)이 드러나지 아니한다. 그렇다. 시적 감응은 동시다발적으로 교감이 될 것임에 마치「숫타니파타(Sutta Nipāta)」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풀이처럼 바람의 미감은 풍요의 숨결을 뜻하기에, 가슴이 저며오는 고통이 따를지라도 풀꽃의 향을 풍겨내는 감미로운 삶의 여적(餘滴)은 끊임없이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3. 미적 주권과 내밀한 언약(言約)
무엇보다 조금은 ‘느리게 삶을 관조하며 언어예술’로 직조해낸 그 자신의 순수서정시는 깊은 사유와 자기성찰의 통로를 거쳐 빚어진 정신적 생산물로 따뜻한 감성이 수용된 시적 형상화다. 모처럼 황옥례 시인의 육체가 다소 피로감에 지쳐 있을지라도 금화처럼 짤랑거리는 내면 인식에 투영된 정신풍경은 각질화된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고 있다. 한편 20세기 레바논계 미국의 신비주의 시인이며 화가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이 그 자신의 시편인「참된 아름다움」에서 “사랑을 품고 있는 영혼만이/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일면처럼 동시대의 그 어느 시인보다 겸허한 심성의 소유자로 ‘비움의 시학’에 익숙하기에 그 묵언의 응시는 거듭 분별할 점이다.
비록 그 자신의 시 심리가 대립 구도로 변형되어도 합리적이되 상호보완적 공존의 양상은, “공간은 사회적 산물이다.”라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역설처럼 ‘눈앞에 전개되는 온갖 형상과 그리움’이 확증될뿐더러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정에서 그 생동감은 친화력을 작동해 창조된 결과물을 빚어낸다. 따라서 그 자신이 미수(米壽)를 넘보는 삶의 시간대에서도 「첫눈」이나 「경회루와 벚꽃」에서 메르헨(Märchen)의 설렘이나 ‘존재의 뿌리인 가정’을 축(軸)으로 그 구성원인 부모님에 관한 사모(思慕)의 정은 못내 각별하다. 까닭에 ‘두 손으로 월급봉투를 내밀자 아버지는 소리 없이 웃으셨다’를 막연히 떠올리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서/삼 년여 동안 직장생활하면서/봉투를 뜯지도 않고 매달 드렸다(나의 아버지)”의 일면이나 ‘이 지상의 가장 위대한 이름, 어머니!’를 나직이 부르며, 자화상(自畵像)에 빗대어 ‘흰옷을 즐겨 입던 어머니 곱고 단아했어요’를 몇 번인가의 회감(懷感)한 뒤, “하얀 찔래꽃 피는 요즈음/어머니 사진 가끔 꺼내 봅니다(나의 어머니)”에서 지극한 시적 서정성의 느낌은 못내 다정다감해 눈물겹다.
특히 그 자신이 온전한 평화주의자로서 인류의 자유와 화평을 소망하는 일체감은 「성탄절 메시지」를 통한 서사구조(敍事構造)에서 극명하게 확증되거니와 이 지상의 가시적인 모든 대상은 끝내 소멸(消滅)되는 것이 자연의 이법(理法)이듯 사랑하는 만유(萬有)의 일체도 그렇기에 ‘두 손으로 그이의 얼굴을 감싸고 볼에다 살포시 마지막 이별 입맞춤을…’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아/사는 동안 당신 사랑했고 행복했었다고/그의 귀에 속삭였다//잘 가시오! 잘 가세요!(마지막 이별)”의 뒤에 그 자신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아 나직한 통곡(痛哭)이다.
모름지기 불확실한 삶의 시간대에서 비록 고통이 주어져도 동시대의 그 어느 시인에 견주어 ‘그래도 詩를 쓸 줄 알아서 시 쓰는 재미로 살고 있다.’라는 절대 의지는 이처럼 외경스럽다. 한편 시집 끝에 수록한 시편 「나도 그렇다」에서 “소중하고 사랑하는 자식들/함께 만나면 좋고/자식들이 내 곁을 지켜주고/보살펴주니 축복이며 행복하네”라고 스스럼없이 확정하고 ‘인생은 돌고 도는 바람개비 같은 것’으로 담담히 자위(自慰)함은 지켜볼 바다. 이처럼 시의 틀을 받쳐주는 아득히 흘려버린 세월에 회감(會減) 또한 적당한 속도와 거리를 지탱하는 정조는 놀랍다. 까닭에 영국의 시인 오웬(Wilfred Edward Salter Owen)의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의 깨어있음과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념은 경건하다.
결론적으로 그 자신이 내면 인식의 정신풍경화로 채색한 시적 수사의 단순성은 깊은 영혼의 상처로 고통받는 소외된 타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거부감이 없다. 모처럼 차별성을 지닌 ‘마지막 못다 부른 정한(情恨)의 노래’는 순수한 영혼을 위한 구도에 이끌려 결(結) 고운 언어의 그물망으로 건져 올린 소박한 결과물이기에 ‘개성과 느낌, 그리고 체취’로 채색된 자애로운 모성(母性)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울림은 가일층 새로운 일체감(一切感)으로 평자의 소박한 기대감이다. 모쪼록 우리 현대 시문학사에 켜켜이 자신의 존재감을 지켜내며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에 도전하는 그 충만한 생명감에 거듭 축하와 격려의 뜻을 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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