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문고발東山文稿跋
배달(倍達) 기원 72년 무진년(1928) 봄에 동산(東山) 류선생(柳先生)이 돌아가셔서 사회장으로 예장(禮葬)하였고 그 후 38년이 지나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동산문고》를 간행하게 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선생을 경모함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쇠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아! 선생은 국사(國士)이다. 이 세상에 살아 계셨던 64년 동안 처음에는 유림의 준재였다가 종국에는 사회의 영수가 되었으니 앞뒤가 둘로 나누어지는 듯하지만 그 귀결은 한가지이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때에 대세를 통찰하여 국가가 어떻게 망하였으며 백성이 어떻게 멸하게 된 것인지를 알고 혁신을 앞장서서 부르짖어 의연하게 세도의 책임을 자임하여, 입술이 타고 혀가 닳도록 역설하며 온몸을 던져 혼신의 노력을 다하면서도 그칠 줄 몰랐다. 좁은 소견에 국한된 선비들이 떼 지어 일어나 배척하였고, 동족이 저지하고 방해함이 외적의 폭력과 억압보다도 심하여 앞뒤로 공격 받는 형국이 거의 남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미리 통찰하는 명철함은 촛불이 밝게 비추고 거북점을 치는 듯했으며, 마음가짐의 곧음은 화살이 곧고 쇠가 단단한 듯하였다. 꾸짖고 비방하는 말이 산과 바다 같이 넓고 깊더라도 심상하게 바라보았으며, 맹문(孟門)과 구당(瞿塘)을 평지와 같이 밟았다. 이 백성을 물과 불 가운데서 구원하여 조국을 반석같이 편안한 데 두려고 기약하여 몸소 힘써서 수고로움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다. 아! 선각자가 아니었으면 누가 우리를 열어 주었겠는가? 하늘이 선생을 낳은 뜻이 어찌 우연일 뿐이겠는가? 선생을 융성한 시대에 나지 않고 이 말세에 나게 한 것은 또한 어찌 선생의 불행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대개 그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남들이 도달하지 못할 점이 네 가지가 있다. 봉건시대에 태어나 완고한 곳에 처했으면서도 용감히 구시대의 전철을 고쳐서 혁명의 선구자가 된 것이 그 첫 번째이다. 재앙의 그물이 하늘에 가득차서 몸을 용납할 곳이 없었으니 해외 활약은 오히려 할 수 있었지만 국내 혈투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계책을 세워 기밀을 누설하지 않고 위험과 욕됨을 두루 겪으면서도 조금도 좌절하지 않은 것이 그 두 번째이다. 대사가 지지부진하자 화복에 겁을 내어 처음에는 민족의 전열에 섰다가 결국 마음을 바꾼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30년 동안 평이할 때나 험할 때나 한결같은 절개를 죽도록 변치 않았던 것이 그 세 번째이다. 대인 선생이 유림에서 스승의 자리에 있었기에 가정의 가르침에 받들고 순종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지성으로 즐겁게 해 드려서 어버이를 어기지 않고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그 네 번째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평소에 독서하고 강론한 나머지에서 얻은 것이고 정성스럽게 나라를 근심하고 사랑하는 떳떳한 충정에서 한결같이 나왔다. 때를 따르는 의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제창한 것에 다방면으로 말한 것이 일찍이 성현의 가르침을 벗어나 별도로 이설을 말한 것이 있지 않았으니, 앞뒤가 둘로 나누어진 것 같았던 것은 본래 갈라져서 둘이 된 것이 아니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때를 따라 변하여 도를 따른다.[隨時變易 以從道]”라고 하였으니, 선생은 《주역》의 이치를 잘 응용하였을 것이다. 날은 저무는데 길은 멀고 몸은 약한데 책임은 무겁고 세도가 회복되기를 아득히 기약할 수 없는데 사람의 수명이 갑자기 다하게 되니, 비록 선생이라 하더라도 때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밝은 하늘이 회복되고 나라의 치욕이 씻겨 지난날 선생을 비난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찬양하고 우러르니, 선생의 마음과 사업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으로 갈라진 산하가 그늘에 가려져 아직 개이지 못했으니 선생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아! 우리 민족 전체가 선생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나라가 새로 흥성해짐을 곧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선생의 유문을 길이 전하는데 급급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 문고를 읽고 그 마음을 터득하게 하려는 것이지, 다만 선생의 은혜에 대한 작은 보답일 뿐만이 아니다. 문장은 선생이 일찍이 마음을 둔 바가 아니었지만 천부적 자질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붓을 대기만 하면 문장을 이루어서 쨍그랑 금석이 울리고 힘차게 강하가 터진 듯하여 넉넉히 작가의 경지에 들었다. 유신(維新) 이전 문자는 내실이 없는 헛된 말이라고 여겨서 모두 손수 불태워 버렸고, 중년과 만년 이후에 지은 것을 3책으로 엮었는데 경인년(1950) 동란에 잃어버렸다. 지금 다시 수습한 것은 거의 반도 되지 않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 조각 말씀과 하나의 글자도 피 끓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 아님이 없으니 초수(楚囚)의 슬픔과 연시(燕市)의 노래는 대개 근심과 상심이 격렬한 말이 많다. 그러나 재앙의 기색이 장차 닥치려는데 정신을 잃고 혼미하게 잠든 사람들을 불러일으킴에 그 소리를 어찌 크고 빠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치와 학술의 부패를 논하여 마땅히 개혁해야 한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당시의 병통에 절실하게 적중한 것이어서 나라를 고치는 좋은 거울이 되니, 이 문고를 잘 읽는 사람은 이전의 실패를 교훈삼아 훗날을 조심해야 할 것을 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백세(百世)가 앞에 있고 천세(千歲)가 뒤에 있으니, 이 책이 존재하여 선생의 환히 빛나는 단심(丹心)의 칠분진상(七分眞相)이 영원히 마멸되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저술한 《동사(東史)》 13권과 《시사(詩史)》 2권은 이어서 장차 간행할 것이라고 한다.
동산(東山) 류선생(柳先生) : 류인식(柳寅植, 1865∼1928)을 말한다.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1841∼1924)의 아들이다.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의 문인이다. 서구의 근대 사상과 학문을 접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대한협회를 발기하고 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유진태(兪鎭泰) 등과 조선교육협회의 주동적 발기인이 되어 활동하고,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동산문고(東山文稿)》, 《대동사(大東史)》, 《대동시사(大東詩史)》 등이 있다.
맹문(孟門)과 구당(瞿塘) : 위태한 곳을 말한다. 맹문은 중국 산서성(山西省)의 험지(險地)이다. 구당은 중국의 장강(長江) 삼협(三峽)의 하나로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에 있는데, 양쪽 강 언덕이 가파르게 높이 치솟은 데다 이 가운데 염여퇴(灩澦堆)라는 큰 바위가 서 있기 때문에 강물 흐름이 매우 사납고 험하여 지나는 배들이 전복되는 경우가 많다.
대인 선생 : 동산의 부친 류필영(柳必永, 1841∼1924)을 말한다. 자는 경달(景達), 호는 서파(西坡)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서파집》이 있다.
초수(楚囚) : 초(楚)나라 포로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귀양지나 감옥에서의 고초를 뜻한다. 서진(西晉) 말년에 중원이 함락되자 강남으로 피난을 갔는데, 신정(新亭)에서 술자리를 베풀었을 때 신하들이 서로 마주 보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자, 승상 왕도(王導)가 “함께 힘을 합쳐서 중원을 회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찌하여 초나라 죄수들처럼 서로 마주 보며 눈물만 흘리는가?[何至作楚囚相對]”라고 꾸짖은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연시(燕市) : 전국 시대 위(衛)나라 자객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을 위해 진시황(秦始皇)을 살해할 목적으로 진나라에 갈 무렵 서로 작별한 곳이다. 이때에 태자와 빈객들이 모두 흰 의관을 하고 역수(易水) 가에 이르러 전별했는데 형가가 노래하기를,
바람이 소소하고 역수가 차니 風蕭蕭兮易水寒
장사가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壯士一去兮不復還
라고 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