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오가는 새, 동박새
도연 스님
해마다 3월이면 내가 사는 곳에서 볼 수 없는 새들을 보기 위해서 남쪽에 다녀온다. 내가 사는 곳의 봄은 멀었지만 남쪽 해안지방은 꽃다지가 지천으로 피는 따뜻한 봄날이다. ‘겨울나무’는 冬柏(동백),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동백은 차나뭇과에 속하는 상록수로 山茶花(산다화)라고도 부른다.
동백은 겨울에 꽃이 피고 봄이 되면 꽃이 진다. 다른 식물과 반대로 사는 나무가 동백이다. 북쪽에서는 실내와 온실 외에는 거의 꽃구경을 하지 못하는 동백은 남해안 지방 대부분의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아주 오래전 여수 오동도 동백 숲에 처음 가본 느낌을 나는 여태 잊을 수가 없다. 마침 나무들은 검붉은 꽃을 만개한 터여서 멀리서 꽃을 보러 온 나그네의 고단함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동백꽃의 낙화는 꽃송이째 뚝뚝 떨어지는 데 매력이 있다. 부러질망정 구부러지지 않는다던가, 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도 아니면서 동백꽃은 무슨 절개라도 지키려는 듯 떨어져 보는 이가 괜히 안타깝다.
겨울에 피는 동백은 어떻게 가루받이(受粉수분)를 할까. 바로 동백만큼이나 신비로운 동박새가 가루받이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다. 몸길이 11센티미터의 작은 새, 갈색 눈에 하얀 뿔테안경을 썼고 가슴과 옆구리의 갈색만 빼놓고 온통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동박새가 동백꽃이나 매화의 동반자다.
동박새는 꽃이 주는 꿀을 먹느라 부리와 이마에 노란 꽃가루를 묻히고,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면서 식물의 가루받이 역할을 담당한다. 바늘 가는데 실이 없어서야 되겠나, 동백꽃을 본 김에 신비로운 동박새도 보고 싶었다. 동박새가 동백꽃을 좋아하니 꽃이 있는 곳이면 나비가 있듯 당연히 동박새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동백 숲을 한 시간 넘게 걸어도 동박새는 눈에 띄지 않는다. 찾아다니기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조류 탐사의 ABC라는 걸 잊은 것이다. 다리도 쉴 겸 싱싱한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밑에 앉아 새가 어서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새는 사람이 자기를 주목하고 있다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이내 날아가 버렸다. 관광지여서 사람이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빗나갔다.
잠시 후 경계심을 푼 녀석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붉은 동백꽃에 매달려 꿀을 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돌 때마다 녀석은 부리며 이마를 노란 화분으로 칠갑을 했다. 사람 욕심이 끝이 없어서 보는 것으로 족할 줄 모르고 기어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동박새는 친견할 수 있는 은혜에다 더불어 기념촬영까지 허락했다. 동박새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오동도 동백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후 변화가 원인인 듯 동박새는 해안가로부터 제법 떨어진 내륙에서도 관찰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내가 찾아간 곳은 창원 주남저수지에서 멀지 않은 곳, 약수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에 목욕하는 동박새를 훔쳐본 것이다. 동백꽃 사이로 잠깐씩 보이던 귀하신 몸을 불과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다니 하느님 덕분인지 부처님 덕분인지 하여튼 감사할 따름이다.
동박새뿐 아니라 손바닥만 한 목간통에는 검은머리방울새, 곤줄박이, 박새, 쇠박새, 노랑턱멧새, 오목눈이, 붉은머리오목눈이 등 다양한 새들이 몸단장을 위해 찾아왔다. 내가 사는 골짜기에도 여러 종류의 새가 있지만 이처럼 한 장소에서 여러 종의 새들이 목욕하는 장면은 보기 어렵다.
사람들과 어울려 코펠에 라면을 끓여 먹으며 한바탕 새를 촬영하거나 관찰했던 무용담을 듣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다. 낯선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서로 교류하게 하거나 친구를 만들게 하는 중심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양수리 물닭 조승호 선생께서 ‘벌써 산개구리가 울더라.’고 했을 때 이 무렵, 남쪽도 아니고 한강 북쪽에서 벌써 개구리가 울까 싶었는데 오후에 숲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관찰되었다. 수행자들의 동안거 해제 회향에 맞춰 개구리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회향한 것이다. 동박새는 꽃가루 수분을 통해 회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