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각장이의 유토피아
박동조
이곳은 발리의 우붓이다. 1920년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부터 원주민의 뛰어난 손재주가 알려주 예술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데사 마스'지역은 목조각이 유명하여 '조각 마을'이라 불린다.
'조각 마을'은 남편이 늘 가슴에 담고 있던 유토피아였다. 어쩌다 화면에서 나무를 깎는 이곳의 장인들이 나오면 눈을 떼지 못했다. 흑단으로 빚은 조각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러움과 찬탄으로 일렁이곤 했다. 물에 가라앉을 만큼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해서 돌처럼 야물다는 흑단으로 갖가지 형상을 자유자재로 빚어내는 우붓의 장인들은 대체 어떤 손을 가졌을까. 남편은 그들이 작업하는 광경과 작품을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 했다.
눈앞에 그득히 진열된 작품을 보고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할까. 흘끗 본 그의 얼굴은 소원을 이루었다고 감격하는 표정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은 평생 만들어도 상점 하나를 다 채우지 못할 거라고 양에서 지레 절망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조각칼 하나로만 형상을 다듬는 남편에게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을 양이다. 데마사스에는 이런 가게들이 셀 수도 없이 이어져 있다.
겨우 몇 군데만 들렀을 뿐인데도 예술성은 차치하고 어마어마한 양에 놀라고 작품의 다양함에 주눅이 든다. 섬세하고 사실적이어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동물에서부터 괴이쩍은 신의 모습까지 없는 것이 없다. 신체 한 부분을 과장하게 표현, 상징성을 강조한 형상도 여럿이다. 이 많은 조각품을 누가 다 만들었을까! 나무를 빚어 사물을 표현하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남편은 목각장이다. 오직 나뭇결과 향기가 좋아서 조각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몇 번 작은 전시회는 가졌지만, 그 바닥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거듭된 작업으로 어깨와 팔이 심하게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제발, 아프다는 소리 하지 말고, 기계 공구로 작업하라고 재우치는 소리를 하면 딱따구리는 오로지 부리 하나로 나무를 쪼아 집을 만든다고 받아친다.
모 연예인이 놉을 사서 그린 그림에 자신이 붓 몇 번 대어 완성한 뒤,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돈을 사는 것이나, 기계의 힘을 빌려 완성한 조각을 자기 작품이라고 하는 조각가나 도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하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바쁘고 다난한 이 시대에 고집을 굽히지 않는 남편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상점 한쪽에서 기계 소리가 시끄럽다. 어라! 이건 또 무슨 풍경인가! 웃통을 벗은 남자가 자동톱으로 나무를 자르더니 자동 공구를 이용하여 조각상의 윤곽을 잡고 있다. 잠깐 사이에 투박한 원목이 코끼리의 형상을 얼추 갖춘다. 그것을 옆 사람에게 넘기자 소리도 요란하게 거칠고 우묵한 부분을 기계로 쓱싹쓱싹 다듬는다.
다른 한쪽에서는 여인 하나가 힌두신의 조각을 사포질하고 있다. 사포질도 윙윙 자동 공구로 한다. 우리를 기함하게 한 것은 작품에 입히는 도색이다. 그들은 우리의 눈앞에서 휘발유에 구두약을 섞어 조각품에 바른다. 비밀이 아니라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기법인 듯하다. 이내 갈색의 나무색이 검은색으로 둔갑한다.
누가 봐도 흑단으로 빚은 조각상이다. 신상은 휘발유 냄새를 사방에 뿌리며 근사하게 바뀐 자태를 자랑하듯 검은빛을 뿌린다. 우리는 그 자리서 얼어붙고 말았다. 텔레비전에서 오로지 조각칼 하나로만 색감과 결을 살려 나무를 깎는다는 해설을 분명히 들었다. 남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런데 아니다.
안내원이 흑단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은 데다 덩치가 큰 것은 구하기가 어려워 구두약을 입혀 흑단을 대신한다고 일러준다. 이국의 손님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물건을 사느냐는 물음에는 셈평을 하는지 모호한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이곳은 여행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시연하는 곳이고,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삼십 명의 인원이 분업 형태로 조각품을 만드는 걸 볼 수 있다고 친절을 보탠다. '원 조각가'가 작품을 설계해서 넘겨주면 나머지는 일꾼들이 알아서 완성한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분업에서 복수 생산이라니! 일순 남편은 무중력 상태에 빠진 듯 허공에 걸린 얼굴이 된다.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정한 영혼으로 빚은 작품을 보겠다고 몇 년을 별러서 머나먼 나라까지 날아왔다. 그동안 꿈꿔왔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맥이 빠지는데 남편의 실망감은 오죽할까.
이제야 알겠다. 시장이나 '데사 마스'상점에 똑같은 상품이 무더기로 나와 있는 까닭을! 오로지 돈을 사기 위하여 찍어내듯 조각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오랜 시간 경외심을 가지고 이곳을 그리워했다. 설사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디자인 따로, 조각 따로, 사포질 따로 분업해서 만들어지는 조각품이 과정을 중시하는 남편의 마음에 맞갖을 리 없다.
수준 높은 현대미를 자랑하는 이곳의 조각이 분업화를 이룬 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일부 유럽의 예술가들이 자신이 설계한 조각을 솜씨 좋은 이곳 원주민에게 하청을 준 것이 분업과 복수 생산의 시초가 된 것이다. 여러 상점에서 똑같은 조각품이 팔려나가기를 기다리느라 먼지를 뒤집어쓴 광경을 보면서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이 설계하여 혼신을 다해 나무를 깎아 작품을 완성하는 조각가가 이곳이라고 왜 없겠는가? 하지만 언어가 다른 우리 깜냥으로 그런 조각가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토바이와 관광객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는 이곳에서 문명에 물들지 않은 오롯한 조각가를 만나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어쩌면 남편이 꿈꾼 유토피아는 자신의 마음 안에 구축해 놓은 '고집의 방'이 아닐까. 나무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인 결과 색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그는 조각칼 하나로 나무를 빚는다. 자기만의 방에서 나무 향기에 묻혀 사람도 만들고 곤충도 만드는 순간이 마냥 행복하다고 한다. 무엇이 예술인지, 어떻게 해야 돈이 되는지 생각조차 아니 하고 나무를 쪼는 사나이, 남편이 찾아온 무구한 조각가는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