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 안병태
한국동란, 그 고약한 것이 터지던 해 팔월 스무 여드렛날. 그날 새벽 인시에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그 순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총알이 날고 포탄이 쏟아지던 와중에도 우리 집 사립문엔 금줄이 쳐지고 붉은 고추가 매달렸다. 그날이 오늘이다.
역전 꽃가게에서 국화 한 다발을 샀다.
“어머님 만나러 가시게요? 벌써 일 년이네….”
해마다 이맘때면 국화 한 다발씩 사러 오는 우체국 아저씨. 초롱꽃처럼 생긴 꽃가게 주인이 내 생일을 기억해 낸다. 엄마는 내 생일을 열세 번만 챙겨주고 서른여덟에 요절하셨다.
세상사 모두 뒷전으로 돌려두고 365일 중 하루를 똑 떼어내 북도 400리 엄마를 만나러 간다. 국화 다발을 안고 중앙선 상행열차를 기다리는 중년 사나이. 대합실 여객 모두 꽃다발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무슨 사연의 꽃일까 상상하는 눈치들이다.
완행열차는 고향을 향해 기적을 울린다. 눈을 감고 지나온 궤적을 돌아본다. 그사이 밥을 66.000그릇이나 먹었구나. 벌써 22.000번이나 해가 떴다 졌구나. 구름사이로 간간이 반짝 햇살이 비친 순간들도 있었지만 장마에 보릿단 말리듯 눅눅하고 후줄근한 세월이었다.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고, 석가는 탄신하자마자 걸어 다니며 중얼거렸고, 박혁거세는 일에서 깨어났고, 김알지는 금궤짝 속에서 나왔단다. 특별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오는 방법도 특별한 모양이다. 총알이 날고 포탄이 쏟아지는 피난길에 정신없이 ‘귀가 빠진’ 탓인가? 그래서 내 인생행로는 늘 어수선한가보다. 맞은편에 앉아 이것저것 쉼 없이 먹고 있는 저 아주머니는 아마 그의 모친이 무얼 먹다가 낳았나보다. 아무도 모르게 엄마 만나러 가는 길. 호젓하게 가고 싶다. 그 여인 화장실 간 사이에 의자를 반대편으로 돌려놓아버렸다.
세 사간이면 고향 역에 내릴 것을 몇 만 리라도 되는 양 살아왔다. 고향 역 측백나무 울타리는 변할 줄도 모른다. 녹슨 레일, 철로 자갈 틈새 강아지풀, 화장실 모퉁이의 향나무, 고향 역은 늙지도 않는다. 정거장 하늘을 맴도는 고추잠자리만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택시를 탔다. 산 돌아 들 돌아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꽃다발이 무색하다. 코스모스, 억새, 구절초, 쑥부쟁이… 소박한 풀꽃다발이면 어떠냐. 내년부터는 가을꽃을 직접 꺾어다 바치리라.
사주 여덟 글자가 인간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단다. 태어난 시가 인시에서 묘시로 바뀌었다면? 태어난 날을 하루만 당겼거나 미뤘다면? 지금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엄마에게 속내를 들킨 것 같다.
“힘들어, 엄마….”
“이순을 이마에 붙이고도 아직 엄마냐?”
“어머니라고 불러본 일이 없어서….”
“그도 그렇구나.”“답답해, 엄마.”
“땅속은 더 답답하단다.”
“앞길도 어둡고.”
“땅속은 더 캄캄하단다.”
“세상이 차가워.”
“개똥밭에 굴러도 거기가 낫다. 땅속은 더 차!”
“지칠 때마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출발점엔 언제나 엄마 요절이 기다리고 있데.”“거슬러 올라오지 마라. 미안하구나.”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아직 모르겠어.”
“아둔하구나. 반환점을 돈 지가 언젠데 아직 해매고 있느냐.”
“나이를 포개갈수록 잃는 게 많아.”
“연연해 하지마라. 어차피 다 버리고 올 것들 아니냐. 내 널 세상에 내놓을 때도 알몸이었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나도 다시 태어나려고 땅속에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단다.”
심청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었고, 금아 선생은 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다. 그나마 나는 열다섯에 엄마와 헤어졌건만 그래도 엄마에 대한 불평이 많아 찾아올 때마다 투정이다.
엄마 발치 아래 구절초 밭을 내려다본다. 슬퍼서 아름다운 이 세상. 그 소풍 끝나면 돌아오려고 일찌감치 맡아놓은 내 자리다.
산 아래에서 택시가 경적을 울린다. 한 시간 뒤에 오랬더니 벌써 왔나보다.
“하마 왔는가? 약속시간이 아직 멀었구만.”
“한 가고 가다렸니더.”
“안 가? 한 시간 까먹으면 손해가 얼만데.”
“내려갔다가 시간 맞춰 다시 올라오기도 만만찮고, 내려가 봤자 시골 읍내 손님도 있을 것 같잖고….”
그래서 나른한 가을볕에 한참 자버렸다며 씨익 웃는다. 봉화 초등학교 54회란다. 칠년 후배다. 내 친구들 안부를 물어봤다. 술꾼은 아직 술꾼, 구두쇠는 아직 구두쇠, 여전들 하단다. 그 사이 세상을 등진 놈도 더러 있고….
고추잠자리 맴도는 봉화역에서 다시 열차를 탄다. 잠시 고향 산천에 안겼다가, 잠시 엄마 품에 안겼다가 되짚어 봉화를 떠난다. 고향 역에 내렸다 다시 하행열차에 승차하기까지 여유는 두 시간. 도둑고양이처럼 다녀가기엔 안성맞춤이다. 황금벌판을 가로질러, 낙동강 백사장 건너 열차는 남으로, 남으로 경주를 행해 고행에서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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