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의무 / 박경대
사무실에서 멀지 않는 곳에 강아지를 파는 가게가 몇 군데 있다. 가끔 그 앞을 지나다 귀엽게 놀고 있는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곤 한다. 재롱을 떨고 있는 것을 볼 때면 한 마리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십여 년을 가족처럼 지내던 애견이 몇 해 전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안타까운 그 모습이 생각나 아직은 키울 자신이 없다.
예전, 어렵던 시절에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기에, 애완용으로 동물을 기른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고 키운다고 해봐야 집을 지키기 위한 개와 쥐를 잡으려고 키운 고양이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핵가족화가 시작되자 애완동물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썰렁한 집에서 외로움을 느껴서인지 동물들을 키우는 가정이 늘어났고 종류 또한 다양해졌다.
초기에는 다람쥐가 인기였는데 이제는 토끼에다 거북이, 심지어 앵무새와 햄스터라는 쥐까지 키우는 세상이다. 언제가 애완용으로 뱀을 키우는 가정도 있다고 방송에서 소개를 하였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아지를 선호하고 있다.
동물을 키우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 일에도 책임과 의무는 지켜져야 한다. 강아지와 산책을 나오면서 목줄을 하지 않아 지나가는 어린아이가 자지러지게 놀라는 것을 가끔 본다. 또한 길에다 본 용변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는 견주도 있다. 그런가 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니는 유기견과 고양이들도 자주 보인다. 목줄과 인식표를 하지 않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나 병이 들거나 이사를 가면서 버리는 사람도 있다.
몇 년 전, 뉴욕 도심의 하수구에서 커다란 악어가 발견되어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다. 애완용으로 키우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라자 하수구에 버렸던 것이다. 그 악어가 죽지 않고 쥐 등을 잡아먹으면서 성장을 한 것이었다.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후배로부터 요즘은 이구아나와 원숭이도 진료를 받으러 온다는 말을 들었다. 동물들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나로서는 가정에서 원숭이를 키우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영장류들은 지능지수가 높아 재미가 있을 것 같지만 예측하지 못한 행동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주부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을 흉내 내어 칼을 만지고 가스밸브를 열어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듯 동물 키우기는 생각 밖의 어려움 때문에 그들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몇 년 전, 케냐의 ‘마사이마라’ 동물 보호구역에서 사진을 찍다가 죽은 새끼를 안고 다니는 원숭이를 보았다. 호기심으로 오전시간 내내 지켜보았는데, 어미 원숭이가 죽은 새끼를 살려 보겠다고 젖을 물리고 얼굴도 핥아 주는 등 눈물겨운 행동을 보였다.
귀국하고 우연히 ‘동물 행동학’이라는 책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숭이는 자기 새끼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약 열흘 정도 안고 다니다가 수컷으로 부터 버리지 않는다고 폭행을 당하고 나서야 포기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어미는 한참동안 우울증을 앓는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열흘간 암컷의 심정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수컷의 속마음 또한 신비스러웠다. 이 이야기는 영장류의 우수성을 이야기 할 때면 종종 인용하고 있다.
원숭이도 보호자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하물며 사람들은 동물을 키우고자 한다면 그들이 생을 마칠 때 까지 보살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돌보아줄 자신이 없다면 아예 키우지 않는 것이 나쁜 업(業)을 쌓지 않는 일이리라.
며칠 전, 원숭이 사회에서나 있을법한 충격적인 일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 어느 젊은 부부가 집도 없이 여관 등을 전전하며 지냈는데 남편의 일이 없는 날은 노숙을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 부부가 한 겨울에 7개월 된 미숙아를 여관방에서 출산하였다. 아이의 상태가 나빴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채 한 달여를 버티다가 그만 아이가 사망하고 말았다. 엄마는 아이를 담요에 싸서 20여 일을 안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시민이 신고를 하고 아이를 빼앗아보니 벌써 아기시신은 많이 부패를 하였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경찰조사에서 아이가 사망하자 남편은 묻어 주자고 했지만 아내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품에 안고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그렇게 떠나보낸데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고 하였다. 죽은 아이를 안고 다녔다는 소식은 며칠 동안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과거세의 잘 잘못이 현세에 나타난다는 말이 불가(佛家)에 있다. 이 젊은 부부가 전생에 어떤 업을 지어 이렇게 슬픈 인연을 만났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두 다리로 걸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아기는 20여 일 동안 어미의 진한 사랑을 느끼고 갔으리라. 그 생각이 내 마음을 다소 위로 한다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에는 의무가 있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