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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글마루 문학회 여러분!
봄이 생동하는 4월입니다.
그 봄기운과 더불어 문학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지난 4월 23일에는 글마루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날은 안경라 시인, 문무웅 수필가, 이혜숙 시인이 참여하여 작품을 낭송해주셨습니다.
*사회-이 선자 총무
<안경라 시인>
1964 강원원주출생. 1984-88 ‘비르소미오글벗동인', '토요시동인' 활동. 1988 도미. 1990 미주중앙일보 시당선. 1997 본국, ‘한글문학’ 시추천완료. 2000-02소노마카운티한국학교교장역임.2007 1회미주동포문학상 시문 장려상
2009 시집 '물소리바람소리' 4인공저외동인지다수.2010 제 16회가산문학상시부문수상. 2011시집’듣고싶었던말’
현재미주시인협회부회장, 미주문인협회원.시전문지’미주시학’편집장,’사민방’동인,’빈터’동인.
<들꽃>
홀로 앉아 꿈꾸는
새벽
가슴으로 피워올린
망울마다
피로 터지는
들
꽃
아주 쓰러지지 않은
순결로도
차마 너를 보기 두렵구나
* 문학을 가지고 노는 놀이터에서 시를 가지고 놉니다. 놀면서라는 표현은 일전에 어떤 저자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일하지만 나는 논다. 그런 긍정적인 발상에서 나도 “시를 가지고 논다.” 라고 표현하고 싶다. 김 현승 시인의 말은 세 가지의 인간 세계가 있다고 있다. 그리움의 세계가 있기에 황 동규 좋은 시란 짜임새가 있어야 하고 시 안에 인간이 있어야 하고 시 속에 삶 속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였다. 살아있는 한 그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글을 잘 썼고 문예공모에서 상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내 그리움의 세계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의 세계가 있지 않았나. 내 무의식에서 시를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본격적으로 시를 접한 건 중 2때다. 그 후, 3학년 때 시부분에서 장원을 했다. 문교부장관 상을 받았다. 그 때는 염세주의에 빠져 있었기에 상에 대해서도 시큰둥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정적 혼자 하고 파헤치는 것을 좋아한다. 문 덕수 시인의 책을 사서 다 닳도록 잃고 연구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 빌린 책 <그 소리 바람결에 사라지고> 코스모스가 흩날리는 겉표지였다. 그 후 놀랍게도 그 저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모 방송국 아나운서였는데 원주에 내려와 있었다. 그 때 저자는 “시는 돈이 안 됩니다.” 차라리 소설을 써야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실망하고 있었는데 이 분이 그 때 그의 두 번째 수필집을 주셨다. 첫 번째 작품에서 <나는 달빛이 좋다. 나는 달빛 중에서도 나는 보름달 빛이 제일 좋다.> 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 두 번째 책에서도 <나는 초승달빛이 제일 좋다. 고 다르게 표현했다. 그 때 나는 그 작가가 왜 두 가지의 말을 하는가? 의문스럽고 실망스러웠다. 내가 유명작가를 쫒고 누군가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고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을 돈과 연관해서 쓴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돈도 안 되는 그깟 시를 왜 쓰냐는 아버지의 말에 더 실망스러운 적이 있었다. 지금 까지도 내게 시를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급성간염에 걸려 요양을 하면서 집에 있는데 오빠가 내게 “그렇게 누워만 있지 말고 시 좀 써라 임마!” 그 말이 나에게는 육체적인 약보다 더 큰 정신적인 약을 투여하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95년 에 쓴 시의 제목이 급성간염이다, 대학 때 방공 활동도 했는데 아픈 바람에 그 활동도 쉬게 되었다. 들꽃은 등단 전 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이고 아련한 추억이라 이 시를 선택했다.
단순히 알고 있는 오빠가 있었는데 그 오빠 식구들이 설악산에 가기로 했다. 다섯 시간이나 넘게 기다리면서 같이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아마 그 때 이 오빠는 나를 내 신부감이라 점을 찍었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대학 졸업 후 취직이 안 되고 있는 무렵이었다. 지금의 내 남편을 만났을 때 이 오빠가 취직이 되었다. 그 당시 내 남편은 돈도 없고 어머니는 미국에 가 있고 아무것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남편을 선택했다.
이 오빠에게 이별을 고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썼던 시다.
<지는 해>
수만 번 덧칠해진
저 붉은 목표물
붓을 거둔 팜추리
새 한마리 발사한다
네 심장을 겨냥해 가는
저물 무렵의 귀향.
*감상문-
나는 토렌스에 산다. 퇴근을 하려면 해를 보면서 돌아가야 했다. 해를 바라보며 “고향에 갈거야!” 라는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가니까 정말 그 해가 남다르게 보였다. 팜추리는 세월, 긴 해는 고향, 새 한 마리는 나 자신을 의미한다. 이 시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시다.
수 없이 생각하고 생각해서 완성된 시는 세월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고 남는 것이 아닌가 한다.
<원주 일기---듣고 싶었던 말>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
듣지 못해서 기억 날 수 없는 말
사랑한다 딸아
하얀 꽃비 머리에 흠뻑 맞으시며
언어를 버린 아버지의 혀, 그 혀 지금 살아 있어도
귀여운 나이를 건너간 나에게 들려주실 수 있을까
따스하고 부드러운 여섯 자 그 말,
아버지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듯
나에게 들리지 않았던
사십을 넘어서 찾아 뵌 아버지,
흰머리 반은 어디 가고
오른쪽 팔 다리 넘나들던 싱싱한 핏톨은 또 어디로 가고
내 청춘의 한 묶음 꽃 시들어 빈 손 방문에
얼른 알아보지 못한 당신의 윤기없는 노년이 안쓰러워
오라버니는 자꾸만 소주잔을 쥐어 드렸지
움푹 패인 아버지 얼굴에 암호처럼 볼그스름히 번지던
듣고 싶었던 말,
사랑한다 딸아.
2)원주일지
듣고 싶었던 말
시작노트가 필요 없이 느껴지는 시일 것이다,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참으로 많이 느낀 부분이다.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지만 부모님이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는 것을 삶을 통해 알고 있다. 부모님이 내게 표현을 못 했을 뿐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지 안다. 이 시는 부모님에 대한 내 마음을 표현한 시다. 아버지는 평소 술을 참 좋아하셨는데 아프신데도 내가 술을 사다드렸다. 그 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불그레해지시는 걸 보았다. 당시 아버지는 말씀을 하실 수 없는 상태셨다. 그 때 아버지의 얼굴이 그렇게 붉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딸아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느꼈다. 나는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 거라고 받아들였다. 그 후 1 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는 흙이 된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뒤>
자매 하나가 뒤를 캔다는 소릴 들었다
거기 내 뒤뜰 낙엽 다 떨어져
휑하니 고독한데
뿌리없는 말들 오가고
바람은 나 대신 입을 다문 채
가지에 앉은 새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나의 진짜 뒤는 무엇일까 이 참에 생각해 본다
오늘도 며칠 만에 힘들에 뒤를 보기는 했다만…
뒤끝이 좀 아프긴 했다만…
아, 그런 것들도 다 부끄럽게
그녀의 녹슨 호미끝에 잡혀야 하는 것들일까
만남 뒤에 이별 뒤에 눈물 뒤에
가을이 오고 있다
거기 내 뒤뜰 가득 쌓이는 그리움
한 시절 푸르던 나의 진짜 뒤가 캐졌으면 좋겠다.
<시작노트>
어느 모임에 당파가 느껴지는 아주 살벌한 시절이 있었다.
마음이 참 아프고 쓸쓸하고 기분이 나빴다. 이 기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오빠가 내게 “시 좀 써 봐 임마.” 라는 말이 또 생각이 났고 다시 용기를 내어 써 보았다. 그 때는 내 뒤가 안 좋았기 때문에 뒤를 캔다는 느낌에서 이 시를 써 놓고 속이 후련함을 느꼈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서운했던, 분노, 쓸쓸했던 마음이 많이 치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시는 젊음의 문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생의 곰삵은 깊은 철학이 시다. 내가 발랄한 시를 쓰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으니 30년이 되었다. 이제는 깊은 사색과 감동의 시를 쓸 때가 아닌가 한다. 나는 시 라는 놀이기구에서 놀고 있다. 감사하면서 더불어 후회 없이 놀았으면 한다.
<문무웅 수필가>
`충북 청주 생 . 1977년 도미. 한국'엣세이 문학' 수필 추천. 글마루문학회 회원.
그곳, 시간, 나
선선한 저녁 바람에 목초가 쓸리고 있는 목장을 내려다 본다. 지금 내가 선 자리에는 참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는 외로이 서 있던 그 참나무 아래에서였는데, 지금은 태양 전지판으로 지붕을 인 기다란 주차시설의 넉넉한 그늘 안에서다. 그 나무는 지금 베어져서 없다. 이 학교 캠퍼스의 지대가 낮은 곳에는 그동안 크고 작은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다행히 이 주차장이 있는 높은 언덕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칫 트인 시야를 가릴 뻔했던 캠퍼스 밖 떨어진 곳에 지어진 두 고층 건물은 그들 사이의 거리가 웬만큼 떨어져 있어서 다행히 앞을 통째로 가리거나 이곳의 조망을 크게 망치지는 않는다. 내가 그 그늘 아래서 시간을 보냈던 베어진 참나무는 이 언덕의 서쪽 끝에 있었다.
지금도 이 커뮤니티 칼리지의 캠퍼스 안 여기저기에서는 크고 작은 공사들이 진행 중이고, 질박하던 이 학교의 옛 모습들이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 발전은 어차피 이렇게 계속될 것이고, 싫다고 멈출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따르는 변화가 흐름의 자국을 메워 가는 동안 부득이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실의 안타까움은 느끼는 사람의 몫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녕 언젠가에는 닥칠 발전의 물결이라 하더라도 지금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목장을 한꺼번에 쓸어 버린다거나, 석양이 온통 가려지는 일 만은…’하는 간절한 소망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게 밀려오고 있는 변화의 물결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지금 눈 아래로 보이는 한 조각의 옛 모습과 저간의 변화들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이 외진 주차장은 학교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데에다 학생들의 발길 또한 드물어 늘 한적하다. 여기서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 저만치 아래를 보고 있노라면 분주한 도회에 싸여서도 모른 채 한가롭기만 한 목장이 내 메마른 눈길을 다독여 맞아 주곤 한다. 이곳은 꽤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데도, 그 주위가 건물에나, 또 가파른 비탈에서 자라 올라온 높은 나무들의 우듬지에, 아니면 다른 언덕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다. 그런데, 그 서쪽 끝은 막힘없이 트여 있어서 멀리 연이은 산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가파른 비탈 아래 숨겨져 있는 이 목장은 주차장의 끝까지 가 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아침 아홉시경을 넘기면서부터 외로운 참나무는 짧지만 승용차 하나를 품기에 넉넉한 그늘을 드리웠고, 시간이 가면서 그 그늘도 차츰 길어 졌다. 해를 쫓아 움직이는 그늘을 따라 차를 가끔 옮겨 놓기만 하면 종일 바람이 일렁이는 그늘 안에서 지날 수가 있었다. 그곳은 내가 처음 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 강의 시간을 기다릴 적당한 곳을 찿다가 알게 되었다. 편리한 곳에 차를 세우려면 학생들로 붐비는 시간에는 눈치껏 목을 잡고 기다려도 작은 운이 따라야 주차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 나무 밑은 갈 때마다 그늘 아래 차를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이 넓은 주차장에는 자그마한 나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을 뿐 한낮의 햇빛을 피할만한 그늘이 없었는데, 그 나무 한 그루가 유독 쓸만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그늘이 두르고 있는 아늑함과 주위의 호젓함을 알게 되면서 주차장 끝의 외로운 나무와 나는 말 없는 친구가 되었다. 여가만 있으면 그 나무 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 뜻밖의 존재는 이때부터 고향처럼 나의 마음 속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친구가 만든 그늘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의 의자를 한껏 뒤로 물려 놓는다. 의자 등받이는 편한 위치에 고정하고 창문들까지 적당히 내려 놓으면 어지간히 더운 날이라 하더라도 별 불편이 없다. 그곳에 앉아 있노라면 다람쥐 한 마리가 차 옆으로 다가와 앞다리를 모으고 서서 “왜 혼자 여기 와서 앉아 있지?”하며 나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이때 어디로부터인가 아스팔트 위로 발톱 소리 죽이며 다른 한 마리가 살금살금 다가가다 서다 하다가는, 거리가 가까워지자 두 놈은 느닷없이 참나무 줄기를 타고 쫓기고 쫓는데, 이 놈들의 발톱이 나무 껍질을 급하게 움키며 뛰는 소리가 정적 속에 잠시 부산하다.
눈 아래로는 초지를 가르는 목장길이 경사진 풀밭을 너머 연봉을 향하고 천천히 오르는 품이 홀로 평화롭다. 목장길 한쪽 옆을 따라서 쌍봉낙타의 등어리 같아 보이는 언덕이 도시의 모난 모습들을 뒤에다 대충 숨겨 놓고는, 방향을 틀어 목장길을 향해서 내리닫는다. 참나무 발치 쪽으로 빛바랜 붉은색의 오래된 축사가 보이고, 그 뒤편에는 소들이 흩어져서 풀을 뜯고 있다. 멀리 둘러선 산봉우리들이 내 눈에도 과연 떼지어 움직이는 코끼리들의 머리통 같아 보이는 것은 그 나무 밑에서 읽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이 생각나서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에 눈을 드니 매 한마리가 날개 끝의 작은 깃들까지 한껏 펼친 채 허공에 걸린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나만의 것이다. 해가 지기 전이고, 별일이 없는, 특히 수강하는 과목의 강의가 있는 날이면 나는 대개 나의 ‘그곳’인 나무 아래 있다. 그곳에서 심술부리는 바람과 승강이하는 누런빛 목장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환생할 캘리포니아의 초록색 겨울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곳에서 다가올 겨울의 싱그러운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나뭇잎 위로 늦가을 빗방울 듣는 소리에 물기 머금은 초록색 캘리포니아의 겨울 들판을 떠올리고 혼자 가슴 설렌다. 석양에 폭풍을 안은 검은 구름 뒤에다 누가 장작불을 크게 놓았었나 보다. 그곳 나무 아래에서 본 잉걸불 이글거리던 겨울 어느날 그 해 지던 하늘을 잊을 수가 없다.
해마다, 십일월이 되면 잊지않고 찾아 왔다가 이듬해 이월이 가기 전에 어김없이 떠나가는 기러기 떼를 기다리게 되었고, 삼월이 가까워지면 엄마 곁에 붙어서서 두엄내 나는 목책가를 지나가는 나와 왕방울 눈 맞추는, 난 지 며칠도 안된, 내 것도 아닌 송아지들의 머릿수를 세면서 흐믓해 한다. 또, 봄 마다, 불어난 앙증스런 누렁 점박이 흰털 염소 새끼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일이 이제 예사롭다. 그리고, 언덕 너머 골짜기, 작은 숲 속에 살던 코요테 가족의 안부도 궁금하다. 도회의 바람 속에서 자신을 풀어 생명의 장으로 바치고도 발전의 물결에 잠식되어 가는 무력해 보이는 이 단아한 목장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아릿하게 피어오르는 연민과 상실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이 쌓이고, 내려다보는 한 뙈기의 땅이 내 가슴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연민은 도도한 물결을 홀로 거스르는 것 같은 오롯한 외로움으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이 고독한 잔재가 나에게 주는 상실감은 “조용한 절망” 속에서 애잔한 한 조각의 옛날을 바라보는 동안 조금씩 길들어져 갔다.
그곳을 찿는 사람이 나뿐은 아니다. 백발의 노인과 여자가 있다. 대개 내가 나무 그늘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더운 날에는 승용차의 엔진을 끄지 않은 채 창문을 닫아 놓고 있다. 오후에 오곤 하는데, 목장을 향하고 앉아서 가지고 온 점심으로 시간을 보내고 간다. 그 참나무가 없어진 다음부터는 기다랗게 줄지어 선 태양 전지판 지붕 아래 차를 세운다. 그들은 베어진 참나무를 아쉬워 할까?
언젠가 나나 그 노부부가 이 곳을 찿지 않게 된 후에도 이곳에 애착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계속 찿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밀고 들어오는 흐름을 안간힘으로 버티는 애처로운 목장이 변화의 물결 속에 쓸려 그 모습을 잃어버리든, 아니면 이곳에 각별한 감정을 가진 내가 떠나가든 지레 애타할 일은 아니다.
경사진 목장길을 뛰면서 피폐해 가던 나의 폐와 심장은 젊음을 되찿아 갔고, 위축되어 가던 척추도 곧아졌는지 키가 커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동안 내가 이 고독한 잔재와 친구한 덕이리라. 도회지 한복판에 있는 나의 ‘그곳’인 한 뙈기 땅의 앞날에 대하여 마음 졸이기 보다는 이 향수를 부르는 잔재가 지금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동안 한껏 즐기는 것이 옳은 일이겠다. 그래도 잃을까 애타 하는 동안이 행복한 때가 있었다.
작가 노트
수필 “그곳, 시간, 나”는 12, 3년 전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어떤 장소”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본 것 그리고 느낀 것들에 대하여 쓴 것 입니다.
“그곳”은 San Fernando Valley의Woodland Hills에 있는 Pierce College입니다.
60이 가까웠던 저에게는 젊디 젊은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배우는 일이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수강하는 과목은 영어 과목 하나였습니다. 다 늦은 나이에 학교 다니기를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물론 있었습니다. 늦게 나마 “나 자신”을 찿아 보자는 것 이었지요. 저의 학교 다니기의 목적은 우선 “영어 공부” 였지만, 속셈은 “학교 다니는 일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 지” 보자는 것 이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국대학에서는, 특히 Community College에서는 학생들이 대학을 다니면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위해 교양 영어 시간은 작문에 중점을 두지요. Class밖에서 해야 할 과제를 주어 그 과제에 대한 essay를 쓰게함으로써 작문 훈련을 합니다. 그래서 편지쓰기 조차 부담스러워하던 제가 영어로 글을 써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지요. 글을 쓰지 않으면 않되게 된 것이지요. 학교를 다니면서 어떤 “나”를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늘 “글마루의 밤 ” 낭송회에서 자작 수필을 낭독하는 데까지 “학교 다니기”가 저를 인도 한 것이지요. 저에게는 커다란 변화 였습니다.
Pierce College는 San Fernando Valley서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오래전 이 지역의 특성상 농학과와 축산과가 주축이되어 시작된 학교 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수필 안에 그려진 목장은 이 학교에 속한 실습 목장과 농장의 잔재입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지금 그 규모는 거의 반으로 줄어 그저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목장과 농장은 제가 처음 보았던 불과 12, 3 년 전에만 해도 아주 바쁘게 움직였었습니다.
때가 되면 이 곳에서 재배한 알파파를 걷우고, 베어진 목초를 묶어 만든 건초뭉치들을 산더미 같이 쌓아 놓은 건초장, 이 건초 뭉치를 소떼에게 가져다 먹이려고 오가는 트럭들과 일꾼들은 물론 실습생들로 제법 붐비고 활기있던 목장이었습니다. 이렇게 학교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퇴락해가는 작은 목장이 내려다 보이는 주차장 끝의 한 나무그늘 아래에서, 지켜 보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서 밀고 들어오는 발전의 물결에 이 아담한 목장과 소박한 교정이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마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곳곳에 남아있는 고향이 변해가는 모습을 고향을 찿을 때마다 목격하면서 느끼는 것과 같은 안타까운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 입니다. 구석구석에서 묻어나는 기억들이 변화에 묻혀서 없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하던 조각조각의 생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적인 것으로 천천히 바꿔지게 된 것이지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또 “그 곳”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제가 처음 느꼈던 것은 상실감이었습니다. 지금 내려다 보고있는 저 작은 땅떼기가 없어지지야 않겠지만, 그 모습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오래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으니까요. 제가 이 학교에 다니기 오래전에도 이미 이 목장을 골프장으로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이 땅이 학교의 소유로 계속 남아있는다 해도 늘어만 가는 학생들을 수용하려면 앞으로도 이 땅 위에 건물을 더 짓고 새로운 주차시설을 마련해야겠지요. 이미 이 목장의 일부가 새 건물들과 주차장으로 수용 되었지요, 제가 이 목장을 처음 보았던 때에는 6, 70 마리의 소를 방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요즘에도 목장길을 따라 뛸 때마다 습관처럼 소들의 머릿수를 세어봅니다. 열 대여섯 마리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무리지만 모여있는 소의 머릿수를 뛰면서 세면 틀리곤 하지요. 소들이 움직여서만이 아니라 겹쳐 보여서 더 그렇지요. 이제는 돼지나 닭은 사육하지 않은 지 오랩니다. 아마 10여 마리의 말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면양 10여마리에, 누런 얼룩백이 흰색 염소 2, 30십 마리가 고작일 겁니다.
교정 안에 정취를 더하던 수 많은 아름드리 소나무들도 병충해로 해가 갈 수록 그 수가 줄어서, 아직 서 있는 소나무들도 언제 베어질 지 모르는 운명입니다. 그리고 방갈로형으로 길게 지은 교실들과 자그마하고 운치있는 사무실 건물들이 소박한 정감을 더하던 교정에도 커다란 변화가 왔습니다. 작고 오래된 건물들은 이제 많이 허물리고 크고 효율적인 현대식 건물들로 바뀌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학생수도 벌써 몇 년 전에 2만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의 눈에 띄이지 않는 변화들도 있겠지요. 이곳이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가끔 보기는 하지만 바빠서 잊어버렸다가 나중에 생각날 때면 이미 변해버린 것을 보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겠지요. 늘 눈으로 보면서 느끼는 감회와는 많이 다를겁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당연히 긍정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발전이니까요.
하지만, 발전에 밀려 옛 모습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각별한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저도 훗날 나의 “그곳”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나무그늘을 잃은 상실감을 태양 전지판으로 된 새로운 주차시설의 지붕 아래에서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넓다란 주차시설의 지붕으로 얹은 태양전지판이 캠퍼스의 전기 소비량의 30%를 감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발전을 어떻게 마다하겠습니까. 반면에, 변화가 가져오는 발전의 혜택이 엄연한 것과 같이,이 작은 나무가 베어짐으로서 경험했던 저의 상실감 또한 엄연한 느낌이 아니겠습니까.이런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감상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목장 안의 작은 골짜기에 살던 세마리의 고요테 가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장길을 뛰면서 그들을 가끔 보곤했습니다. 이들을 가끔 보면서 번잡한 시가지 한 복판에 그들의 집과 먹이가 있는, 이 조그만 땅떼기, 문명에 둘러 싸인 이 작은 섬 안에서 앞날을 모르고 살고있는, 그러면서도 서서히 좁혀 오는 주위를 의식하며 불안해 했을 고요테 세마리의 처지를 안쓰러워 했었습니다. 동병상련 이겠지요. 그런데 이 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족히 4년은 된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혹시 큰길 건너로 이사가다가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은 있습니다. 동물보호 기관에서 이들이 자유롭게 살 수있는 곳으로 옮겨 주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그곳”에서 지난 10년의 “시간”을 보내기 전의 “나”는 무엇을 글로 표현해 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개론이나마 영국문학/미국문학 등을 수강하면서 배운 것들 중에 이렇다 할 지식으로 저에게 남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제 속에 스며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다니던 10년간 목장길 위로 만든 CROSS COUNTRY TRACK 을 뛰면서 문득 명상을 경험했습니다. 또, 한 계절이 가면 어김없이 다시 돌아 오는 것을 거듭 보면서 새삼 떠오른 생각이 분명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Canada에서 여름을 난 기러기 떼가 매년 11월15일 경이면 어김 없이 왔다가, 다음 해 2월15일 경이면 또 어김 없이 떠나 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 해, 또 그 다음 해에도 돌아왔었기에, 내년에도 반드시 돌아 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곳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확인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2,3월이 되면 어김없이 몇 안되는 소떼 속에 아직 부실한 다리를 비칠거리며 어미 주위를 멤도는 까만 송아지 새끼가 한마리씩 눈에 뜨인 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목장이 여기있고, 소떼가 있다면 내년에도 제가 비칠거리며 걷는 새까만 눈망울을 한 송아지와 눈맞추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렇게 저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반복하는 자연을 보았고, 변화를 목격하면서 상실감을 알게 되었으며, 또 발전이 남기는 발자국인 변화에 순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변화에 순응함이란 지금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나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 “그곳, 시간, 나”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혜숙 시인>
1982년 도미. 홍익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졸업. 홍익 미술대학원 서양화과 수료.
남가주 미술가 협회 회원. 남가주 카톨릭 미술가 협회 회원 글마루 회원.
2012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수상. 홍익 아트스튜디오 운영
<짧았던 여행>
창 안으로 길게 늘어진
아침햇살에 시린등을 맡기고
진한 커피에
멘델스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타서 마신다
은빛 햇살위로 바이올린 선율이
파도를 타기 시작하고
나를 수평선 멀리 밀어보낸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그곳
출렁이는 물살에
작열하는 태양이 떨어지며
토해놓은 눈부신 잔해
영롱히 반짝이던 물방울
어느새 흩어져 날아가고
바다위를 맴돌던 의식의 파편들
진한 커피향에 조각을 맟추며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다
오후로 밀려나기 싫어
끝자락 잡고 주저앉은 늦은 아침
잔잔한 음율이 선물한
짧았던 여행
<시작노트>날씨가 쌀쌀해지고 특히 몸이 피곤한 날은 양쪽 어깨에 통증이 와서 잠을 설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아침엔 따뜻한 햇볕에 등을 쬐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으며 신문을 읽곤 한다. 10여 년 전, 캠핑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침에 햇살이 호수 위를 비추며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광경에 무척 매료된 적이 있었는데 그 날 마루에 앉아서 그 장면을 떠올리며 찰랑이는 물결 소리를 들으며 평화롭게 누워있다는 상상을 하며 쓴 시다.
<가슴시린 오늘은>
산속으로 떠나서
모진 풍파 견뎌온
소나무 밑에 앉아
옛 이야기 나누고싶다
뜬 구름 걸려있는
아득한 절벽 끝자락
물기먹은 한줌 흙에 피어난
이름없는 작은꽃도 보고싶다
개울가 에 앉아
쉬지않고 때리고 흐르는 물줄기
온몸으로 묵묵히 받아내며
송곳 같던 모퉁이 매끄러이
닳아지도록 인내한
조약돌에 입 맞추고싶다
<시작노트>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인정을 못 받는다는 느낌이랄까 사는 게 허무한 것 같은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사람들 발 길 끊긴 외로운 산 속에 있는 나무, 꽃, 돌을 비유해서 써보게 된 시. 비바람 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긴 세월 버티고 견뎌내며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정원에 피어서 사람들의 정성된 손길을 받으며 예쁘게 피어나는 꽃들과는 달리, 습기 먹은 돌 틈새에 홀로 뿌리내리고 이름 없는 소박한 꽃도 피어내는 자그마한 풀 꽃, 거칠고 울퉁불퉁하던 표면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과 바람에 깎이고 깎이어 매끄럽고 예쁘게 다듬어진, 하지만 속은 더욱 단단해진 조약돌들이 그 당시 내 마음 같다는 생각으로 비유해보며 쓴 시다.
<시계에게>
오늘은
너를 보지 않겠어
부지런 하라고 재촉해도
서두르지 않을꺼야
내가 하고싶은것만 하겠어
시간이 없다고 눈을 부라려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차 안에서 햄버거먹으며
크락션 울리고
페달을 밟아대도
내 마음이 원하는것을 할꺼야
햇볕아래 졸기도 해보고
새소리에 귀 기울이겠어
오늘 하루는
너를 잊겠어
꽃 에게” 예쁘다” 고 속삭여
얼굴을 붉게 물들여 놓고
나뭇잎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바람 의 마음을 헤아려 보겠어
곧 해가 진다고 째깍대어도
귓등으로 흘려 보내고
노을과 대화 할꺼야
석양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산다는건 얼마나 좋은건지
<감상문> 어느 순간 수시로 시계를 보며 살고 있는 나를 자각하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엔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하며 마치 시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루만이라도 시계를 보지 않고 시간가는 것 무시하고 자유롭게 내 마음 내키는대로 하면서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 쓴 시다. 마음이 바빠 미처 보지 못 하고 지냈던 내 주위에 있는 아름다움을 누리고 싶었고 지쳐있는 내 몸을 토닥이고 싶었다.
<그땐 몰랐었다>
“나 가수” 에 나와서
유명해진 김범수는
이별을 노래하기위하여
사랑하던 여인 과
헤어졌었다고 했다
고통을
몸으로 겪어 보아야
절절한 슬픔을 담은 노래를
해낼수 있으리라는 이유로
가수도 배우도 아니었던 나는
무슨이유로
그를 떠나 보냈을까
품고있던 사랑은 덮어버리면
썰물처럼 사라질줄 알았다
땅 속에서 싹이트고 뚫고나와
내 평생 아픔으로 지켜보게 될줄
그땐 몰랐었다
<감상문> 이 시로 작년에 문학세계에서 시 부문 문학상을 탔기 때문에 오늘 이 시낭송에서 이 시를 빠트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지난 과거를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시를 쓰고 나서 지난 일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고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상황이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약간 힘든 시기에 글을 더 쓰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문자화시키고 나면 마음속의 것을 풀어버리게 되니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것 같아 좋다. 그것이 시나 수필을 쓰며 얻는 커다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입니다.
글마루 문학회 서기- 이일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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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마루의 밤> 낭송회를 그대로 옮겨다 놓으셨네요.
일초님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