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말의 노래 바닷가에 도착하니 일몰 낙조가 수평선으로 넘어가고 있다. 붉은 노을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하늘과 바다를 물들인다. 파도마저 부서지며 붉은 피를 토하듯이 노을에 반사되어 뜨겁게 달구어진다. 밤물결을 헤치며 바람을 끌고 온 바다는 잠들고 있는 배들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갈매기들은 지친 몸으로 돌아온 고깃배 주변을 맴돌며 반긴다. 바다는 물결을 일렁이며 갯바위에 살짝살짝 스치며 밀려났다 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방파제의 뜨거웠던 호흡은 가라앉고 낚시꾼들만이 바다의 너울거리는 물결 속에 잠긴다. 밤바다는 물기 젖은 바닷바람으로 세레나데처럼 감미롭게 출렁거린다. 어둠 속 등대불은 희망의 불씨를 전해주기 위해 반짝이고 있다. 깊은 바다는 아무런 대답이 없고 파도만이 훨레훨레 춤을 춘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바닷가를 느리게 걷는다. 썰물이 되면서 사람들이 해루질을 하려고 램턴과 후래쉬를 하나 둘 켜기 시작한다. 밀물 속에 잠겼던 수두리보말이 바닷속의 기억들을 남긴 채 돌 위로 기어오른다. 잔물결이 찰랑대며 갯바위에 올라타다 미끄러진다. 해루질이 시작된다. 한발 한발 더듬으며 돌 위에 다닥다닥 붙은 수두리보말을 손으로 훑는다. 금사빠처럼 보말에 빠져든다. 보말은 제주 바다 고둥을 말하는데 먹보말과 수두리보말로 크게 나뉜다. 바닷물이 빠진 얕은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둥그스름하면서 짙은 흑색은 먹보말이고 수두리보말은 깊은 바닷가 돌 틈에 알갈색 고둥이다. 썰물의 시간은 짠맛으로 절여진 발자국에 그리움이 묻어난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피부에 스며들며 애틋했던 기억이 보말 속으로 감겨든다. 스무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직장에 출근했다가 뇌출혈로 이승을 훌쩍 떠나셨다. 천지개벽 요동치듯 모든 것이 하얀 포말처럼 산산이 바위에 부서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유산처럼 남겨진 술빚과 가난은 두 어깨로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아틀라스라고 할까. 따닥따닥 돌 틈에 달라붙은 보말처럼 삶의 무게가 나를 옥죄였다. 대학을 다닐 수 없는 처지에서 일주일 단식해 가며 두드린 대학 문, 졸업하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등록금 고지서가 나올 때마다 “대학 문 구경했으니 학교를 그만 다니라.”는 어머니의 성화는 형벌의 무게만큼 어깨를 짓눌렀다. 그럴 때마다 침묵으로 매사에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쪼들리는 삶의 물때를 맞추느라 동분서주했다. 알바비 기쁨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슬픔처럼 썰물과 함께 지나갔다. 밀물에 떠밀려 대학의 젊은 낭만도 즐겨보지 못했다. 가난한 집에서 딸이 대학까지 다닌다는 이웃의 비웃음은 고둥처럼 어둠이 내리고 고독 속에 갇히고 말았다. 백중사리 날이다. 물때가 좋으니 어머니가 “보말국이나 끓여 먹게, 바당에 글라”고 하셨다. 양동이와 호미를 들고 별도봉 바닷가로 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의 풍경은 낯선 듯 새롭다. 수평선은 아득하고 쓸쓸했지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난의 굴레와 빚 독촉에 시달리는 쓰디쓴 삶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소리였는가. 더 높이 더 멀리 비상하기를 꿈꾸는 한 마리 외로운 조나단처럼 애절하다. 소매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썰물의 물결무늬를 밟았다. 팔뚝에 핏줄을 세우며 누워있는 둥글둥글한 돌들을 일으켰다. 먹보말과 수두리보말이 돌 틈이나 바위 아래쪽에 달라붙어 있거나 숨어 있었다. 보말은 뼈도 힘도 없어 누구에게나 대항할 수 없는 듯했다. 사람의 눈 같은 모자를 뒤집어쓴 채 무골호인처럼 큰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썰물에 실려 온 보말은 가끔씩 방게만이 들락날락할 뿐 하안거에 든 수행자처럼 침묵하고 있다. 마치 달력에 졸업 날짜를 써 놓고 뭍으로 올라서려 이불속에서 몸부림을 치던 나를 보는 듯하다. 보말을 줍는다. 희망을 줍고 싶었다라고 할까. 보말을 주울 때마다 어머니의 무릎에서는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퍽퍽 소리가 났다. 보고 듣는 이 없어도 가슴에 담아 둔 울음을 뱃고동처럼 마음껏 뱉어내고 싶었다. 옷깃에 기워진 꿈의 실타래를 바다 위에 풀어 놓았다. 부서지는 파도가 가슴을 할퀴어도 놓아버릴 수 없는 게 삶이 아니던가. 보말 속살이 설비치는 생의 열망이 꿈틀거린다. 햇살이 어머니의 굽은 등에 웃음 번지듯 내려앉는다. 이 햇살이 오래 머무르면 좋으련만. 보말을 양동이에 채우며 지친 마음을 바닷물에 헹구어 내셨는지 어머니의 모습이 안온하다. 어느 때보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워보인다. 보말을 삶는다. 보말은 잡는 즐거움도 크지만 식구들이 모여 앉아 삶은 보말을 까먹는 정겨운 시간이 만들어진다. 보말 머리에 바늘을 찌르고 돌리면 달팽이처럼 나선형으로 기어 나오는 보말. 겉모습과는 다르게 희망의 물결이 숨어 있다. 보말은 어머니와의 약속처럼 살에 박힌 문장을 읊고 있었다. 연애하지 말고 아르바이트와 수석 졸업해야 한다는 속절없이 쓰여진 글귀가 빠져나오며 물동그라미를 그려낸다. 물동그라미는 피할 수 없는 나의 큰 꿈이자 어머니가 내린 숙제이다. 보말 머리에 쓴 모자를 뗀 보말 살로 보말국을 끓여본다. 보말을 굵은 소금을 넣고 박박 씻어서 해감시킨다. 건미역을 물에 불려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냄비에 불린 미역을 넣고 참기름을 두르고 볶는다. 해감시킨 보말을 넣고 육수를 넣고 팔팔 끓이다 국간장으로 간을 한다. 어머니 품속처럼 구수하고 감칠맛이 난다. 그 맛을 음미하며 잠들지 못해 퍼덕대던 지난 시간을 연상해 본다. 어쩌면 시련은 인생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계기인지도 모른다. 짙은 해무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도 하고 깊은 골 속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보말에 갇힌 세월은 인내와 부지런함이란 체화된 선물로 약속은 지켜지고 가난의 터널을 건너게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닷가를 걷는다. 저 멀리 나갔던 고깃배가 포효의 물살을 가르며 포구로 돌아오고 있다. 고기를 잔뜩 싣고 드나드는 포구,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왁자지껄하게 외친다. 생명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바다가 윤슬로 눈이 부시다. 기쁨보다는 아픔이 더 많았던 어머니. 아픔만큼 다가오는 뉘우침이 커서 더 서럽고 슬프다. 붉은 노을이 꽃비처럼 떨어진다. 내일을 잉태할 붉은 빛을 날갯짓하며 물때에 젖은 보말의 노래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