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와 추사 김정희 父子와의 인연
해인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 등 국보 3점, 고려각판 등 보물 14점, 대적광전 등 지방문화재 13점을 보유하고 있다. 암자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홍제암, 성철 스님이 도를 닦던 백련암, 해인사 창건 때 최초로 세운 원당암을 비롯하여 길상암, 약수암, 지족암, 국일암, 삼선암, 금선암 등이 있다.
해인사는 7번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했지만,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장경판전만은 피해가 없었다.
순조 17년 되던 해 1817년 대화재로 대장경을 모신 판전을 제외하고 수백 칸의 건물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해인사 복원 불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당시 경상도 관찰사(현 대구 경상감영(監營)공원에서 근무)인 추사 김정희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이다.
해인사 입구에는 <김노경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김노경이 해인사 복구를 위해 희사한 돈은 일만 냥이었다. 또 경상도 내 70여 현의 군수들로 부터 일만 냥을 모금하고 합천군수 서정보가 일천 냥을 시주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해인사 스님들과 신도들의 모금이 모아져 지금과 같은 해인사 모습이 복원되었다. 김노경은 해인사가 다시는 화마의 재앙을 당하지 않게 발원하면서, 1817년 아들 추사 김정희에게 가야산 해인사 복원 상량문을 쓰게 하였다.
당시 추사의 나이는 38세였다. 아직 추사체가 형성되기 전의 추사의 대표적인 해서체 상량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 연유이다. 추사는 불교의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량문을 써 내려갔다.
추사의 상량문이 해인사 대적광전 대들보에 들어간 이후 해인사는 화마를 입지 않았다. 추사 부자의 간절한 염원이 해인사를 지켜온 수호신 역할을 한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은 가로 485센티, 세로 94센티 크기의 감청색 비단에 금니(아교풀에 갠 금박 가루)로 사경 하듯이 해서체로 써 내려갔다.
본문 글씨만 1195자이고, 제목과 연기부분까지 합치면 금니로 쓰여진 총 글자 수는 1215자에 이른다.
1971년 해인사 대적광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