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김아인
요즈음 내 취미는 산을 오르는 일이다. 생각이 많을 때나 온몸으로 나이를 느낄 때 즐겨 찾는 길이 있다. 길 위에서 땀범벅이 되다보면 속에 있던 잡생각 뭉치들이 빠져나간 듯이 홀가분해진다. 언젠가부터 남녀노소 없이 걷는 게 유행처럼 됐다. 수직상승을 향해 달려온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수평적 삶의 안정을 누리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한다.
그에 발맞추듯 올레길, 둘레길, 슬로길 하면서 새 이름의 길들이 많이 조성됐다. 그렇다보니 걷기에 편안한 기능성 신발이나 등산용품이 인기인데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면 홈쇼핑에서도 등산복 판매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무이자 할부 조건이 솔깃해서 몇 벌 샀다. 고가품 못지않게 품질이 좋아서 만족스럽게 입는다.
산행의 유일한 동행자인 내 남자는 휴일이면 쉬고 싶다 엄살을 부린다. 28년을 지켜본 바로는 게으른 남자다. 그래서 저 사람이 정말로 피곤한 것인지 단지 가기 싫어서 빼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럴 땐 없는 애교를 부려 꼬드기고 안 통하면 살짝 윽박지르기도 한다. 그러면 툴툴거리면서 따라나서는데 막상 나섰다하면 앞장서서 잘 간다. 무에 그리 바쁜지 날다람쥐처럼 휑하니 가버려서 따라가는 내가 숨차다. 보폭이 안 맞아 같이 못 다니겠다고 되레 그가 잔소리해댄다.
사실 나는 걸음도 느린데다 앉은뱅이 꽃이나 풀들과 눈 맞추며 정을 쌓느라 꾸물거리기 때문이다. 산길이란 게 오붓이 조붓이 팔짱끼고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느리게 걷기가 대세란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한달음에 내달린다. 도란도란 얘기라도 나누면서 걷다보면 부부간에 식은 정도 되살리고 돈독해지지 않을까 싶은 은근한 기대를 단박에 뭉개버리는 사람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혼시절부터 그랬다. 소읍의 선생이던 그는 외출을 할라치면 학생들이 쳐다본다고 나더러 100m 뒤에서 따라오라 했다. 애들 교육상 안 좋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달았는데도 맹물스럽게 곧이곧대로 믿었다. 시장을 가거나 심지어 아파서 병원 갈 때조차도 두어 발 앞서서 갔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서운하지만 그렇다고 정이 영 없는 사람도 아니어서 따져본 적은 없다.
오늘도 곰살가운 남자를 구슬리고 닦달해서 나선다. 혼자 내빼든 말든 나는 나를 깝치지 않고 꿋꿋이 내할 짓 하며 간다.
목적지가 같다는 것이 여유만만하게 만드는 이유일 게다. 3월이면 복수초를 시작으로 노루귀, 제비꽃, 양지꽃을 만날 수 있다. 4월부턴 진달래, 생강나무, 산수유들도 앞 다투어 꽃눈을 틔우기 시작한다. 생강나무와 산수유는 노란 꽃빛도 같거니와 꽃모양도 닮아서 얼핏 보아선 분간하기 어렵다. 나만의 구별법이라면 수피의 옆구리를 꼬집어보는 것이다. 손톱 끝으로 살짝만 찍어서 냄새를 맡아보면 생강나무는 신기하게도 생강냄새가 난다.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서어나무... 넌지시 이름을 불러준다. 나무들도 귀가 있을 것 같아서다.
여러 개의 귀를 쫑긋거리고 지나가는 구름소리, 바람소리, 세상의 소리들을 다 들을 것만 같다. 층층나무는 허공에다 그네를 걸고 겹겹의 주름치마를 펄럭이며 논다. 오지랖 넓은 나는 또 그냥 갈 수 없어서 한 컷 찍어준다. 함초롬한 꽃무더기 앞을 예사로이 지나치다보면 귀가 짜글거리는 것 같다. 저들도 한 컷 찍어달라며 저요, 저요, 하는 듯한 환청에 돌아본다. 간혹 산바람이 잔뜩 든 꽃잎을 따와서 차도 만들고 술도 담근다.
어릴 적에 우리는 술도가를 했다. 할머니는 꽃이든 열매든 나무뿌리든 손에 잡히는 대로 술로 안쳤다. 그 술맛이 일품이어서 돈 잘 번단 소문이 근동까지 자자했다. 덕분에 아버지는 일찍이 노름꾼이 됐다. 달도 없는 밤 초롱불 든 엄마는 나를 앞세워 아버지 찾아다녔다. 숙제도 해야 하고 할일이 많은데 엄마는 헤아려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로만 공부 잘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오솔한 밤길을 이 동네 저 동네 뒤지다 아버지를 찾으면 벼락만 맞았다. 겨우 끗발 오르는데 여편네가 찾아와서 재수 옴 붙는다며 숫제 방문도 열어보지 않고 날벼락을 쳤다. 그 벼락을 고스란히 다 맞던 엄마는 마당귀에 벌벌 떨고 서있는 나를 벼락같이 끌어안았다.
싸락눈이 댓잎을 조용조용 구르던 겨울 밤, 엄마는 벼락은 믿어도 아버지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엄마의 도마질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는 것이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살림밑천이라며 애지중지하던 첫딸의 고사리손이 벌겋게 얼어도 엄지를 빨며 노루잠 자던 막내가 새파랗게 경기를 해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승이란 데가 외갓집 갔다 오듯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갈 때쯤 아랫목 고구마 싹처럼 철이 웃자라기 시작했다. 저지레 놓던 동생들은 생라면을 부셔먹으며 엄마의 빈자리와 싸웠고 그 싸움 빤히 보고도 말릴 수 없던 아버지는 차츰 만무방이 됐다. 불콰하게 낮술이 취하면 죽은 아내가 벗어놓은 고쟁이에 한쪽 다리만 끼우고 새우잠을 잤다. 유일한 자학의 수단인 듯이 문뱃내 진동하는 입가에 허연 침버캐를 달고 자는 날이 많았다. 자다가도 빗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가마때기 끌고 산으로 갔다. 죽은 마누라 젖는다고 떼도 없는 햇무덤을 덮었다. 산돌림 하던 비가 잦아들 때쯤 온몸에 황토팩을 해서 돌아오곤 했다.
끌탕이 된 할머니는 아궁이 앞에 몽당비를 깔고 앉아 부뚜막에 장죽을 쳐가며 담배만 빨았다. 그 무렵 나는 얼른 미래로 달려가고 싶었다. 돌담 아래 장미는 심어놓고 엄마의 상여가 슬몃슬몃 넘어간 고갯길로 아버지도 뒤따라갔다. 허물어진 담장아래 장미는 해마다 펴서 떠난 사람들을 기념했다. 초승달 걸린 밤이면 봉창에 이마를 대고 돌아오지 않는 그분들을 원망하다가도 나는 향수보다 먼저 알게 된 우리 집 누룩냄새를 더 그리워했다.
“좀 천천히 가” 재넘이 가르며 앞서 걷는 내 남자의 뒷덜미에 대고 버럭 신경질을 부렸다. 놀라서 멈칫 돌아보던 그가 섰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갈참나무 그늘에 신문지 몇 장 깔고 앉아 걸어온 길을 무연히 바라본다. 땅거미 지는 마당에서 먼산바라기 하던 아버지 옆얼굴이 겹친다. 어느새 나는 한걸음 한걸음의 무서움을 깨닫는 미래에 와있다.
첫댓글 그랬군요.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