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한없이 목이 말라가신 순수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집안은 비록 힘들게들 살아가셨지만
일제 강점기
우리들이 흔히들 빨갱이 빨갱이 하지요
빨갱이는 본디
한말에 관찰부서사람들이나 그 외에 사람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특수훈련을받고 의병활동의 대장들이라 했습니다
왜놈들은 그들을 빨치산아라 했다고 합니다
빨치산이라고 대한민국에서 묘지까지 파헤치는 엄벌을 주실까 두렵습니다
그 분들은 순천에 기거하실때엔 순천매산학교도 설립하신걸로 들었습니다
순천 해촌들그리고 조례골에서 서낭골이나 원당골에서 봉화재를타고 죽두봉을거쳐 둑실에서 매산등을타고 곡성을 누빈듯 합니다
그리고 별량상사입구에서도 전설이 있습니다 조기영님의 손주로부터 들었습니다 애두리가 전해주신모양입니다
그걸 전하신 애두릴 두번죽이지 마세요 애두리의 삶 아픔니다 빨치산인지 의병은 나쁜사람들일테닌까요
우리 국민은 빨치산이라고 안하셨고 산사람이라 하셨답니다
21세기 경찰들은 나쁜사람이라 안하시겠지만 일제강점기나 해방직후 경찰들의 반응.......
31운동때엔 북경으로 미리 피신 북경에서 다시 체포 31운동죄가 아닌 다른죄로
한말에서 부터 빨치산의 가족사라면 대한민국에서 그 가족사에게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 무섭고 두렵고 아픔니다
그분의 가족은 ......음 자제분들을 제데로 돌보아주시지아니하였고 오히려 피투성이에 죽어가시는 빨치산인 아버질 극진히 간호하시고 모신 아들은 배우지도 못 하셨습니다 그의 손주들도 제데로 못 배우시고 힘들게 사셨습니다
그분의 큰댁......접고
그분의 자제분들과 부인은 곡성 본토에서 사시다가 .접고
그분들이 얼마나 나쁘기에 곡성엔 흔적을 지우고 계십니다 곡성에서조차
1920년대 중반에 돌아가시기전 곡성에서도 소금가마니를 짊어지시고 선교활동을 하시면서 소금을 나눠주시고 집회때엔 민족사와 독립운동에 몰두 하셨고 돌아가실때에도 피투성이 피투성이로 가셨다 합니다 정초에
그 당시 빨치산인 그는 코쟁이들과 동료들이 많았다 합니다 예배당에 모인 소년들과 남자들은 머리를 빡빡갂으셨고 ........
그의 손주중 한분은 돌아가실때까지 당신의 아버질 무척이나 원망하셨습니다
대한민국사에선 학문의 수준보단 일본식교육이래도 증명서가 필요했나봅니다
당신을 학교중퇴까지 시킴에 한없는 슬픔과 좌절..........
당시에 한글이 사라진체 왜놈글을 배워야 되는데 빨치산의 아들인 그의 아버진 그 교육을 용납할수가 없었겠지요
하필
가파치는 한글교육을위해 지리산에서 책을만드셨다면 대한민국사에도 큰 죄인이겠지요
일본을 도왔어야 대한민국사에서도 환영을 받았을텐데
하필 지리산
하필이면 지리산에서 국어책을 만드셨던것 같아요
가슴으로 낳은 조점조님은 양식을 구하려 마을로 내려갔다가 ......졸지에 잡혀서 도둑? 이상야릇해졌겠지요
아들중 큰아들도 집에 돌아오시지 못했고해방이 되어서야 안경잽이가되어 돌아오셨고 둘째아들은 가파치와 돌아와 쉰둥이와 작별인사하고 집을 떠났다지요 그리고 영영 돌아오시지 못 했답니다 샛째와 쉰둥인 어렸고요
해방이되어 가파친 학교설립추진과 학당을 열어서 여러사람을 분류해서 또래집단을 구성해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교육을 .......
허나
순천에 난리가 났답니다
여순반란보다 더 무서운 손가락총가는데마다 빵빵빵
그때가 1948년 음력 9월22일? 정확히 잘 모르겠고
원조 빨치산의 손주
순수한 청년은 정말 착하고 모법적이고 공부에 열정이 많으신 분이셨다지요
6.25전쟁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은 어느 해양경비대? 의 대장급에게 발탁이되어 경찰이 되었답니다 그당시에 가파치집에서 가파니네의 일을도와주시며 많은 책속에서 나름대로 공부를 하시는게 행복인줄 알았는데 그 보다 더 기쁜 직업을 갖는게 얼마니 행복했는지 상상이 갑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청년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게지요
그리고 부족한 학력을 대신 메궈줄수있는 특헤의 비법까지 사수하게 되었다지요
가파치를 빨갱이로 만들면 출세한다는 어마 어마한 정보까지
허나
그 당시 이승만은 가파치와 한때는 동지였다지요?
인촌 김성수 는 가파치를 선생님이라 모신분이셨다는데
가파치는 어데로 끌려갔는지 심한 구타의 휴유증으로 돌아가셨다지요
다만 공산당이 아님이 밝혀졌다는데
끌려간 그곳이 어데 일까요?
설마 정보부? 아니겠지요?
누가 밀고 했을까요?
가파치는 일제 강점기에 무슨함자를 쓰셨을까요?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은 한없이 가파치를 원망하셨답니다
가파치를 내 걸고 출세길을 놓친게 안타까워? 아니겠지요 단신의 상사의 뜻과 가파치 고민했겠지요
대한민국은 해방후 국민들에게 무슨교육을 어떻게 시키셨습니까?
아름답고 순수했던 청년이 돌아가실때까지 원망과 분통을 못 다스리게 한 정신교육은 누가 심어주셨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
아직까지 음 아직까지 ......
대한민국은 순수하고 열정이 많으신 아름다운청년을 학벌이 부족하단핑게로 더이상 경찰을 할수없게 하셨고 배움의길도 열어주시지 못 했습니다 허나 반공 반공 반공을 늘 잊지않으신 휼륭한 정신아래 힘겹게 대한민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사셨습니다 학벌부족을 늘 원망하시며 안으론 출세길을 놓친걸 가슴뼈져리게 아파하시며 사셨던것 같습니다 기회주의도 잊지 못하셨던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공산당이 무슨증거로 공산당인지 그 증거를 어데서 어떻게 누구한테 배우셨을까요 해방후 순천을 향한 아니 일제 강점기부터 경찰이 쫒던 대상은 어떤 사람들이였는지 알고싶어요 그리고 해방후에도 순천시민들에향한 휼륭한경찰들이 누구를 향하여 ......궁금하답니다
지식인들
답좀 해 주세요
온 국민민이 납득이 가도록 해 주세요
그리고 가파치의 흔적을 찾아주세요
가파치의 흔적
첫댓글 가파치 이야기.....가슴이 아프네요. 가파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제 강점기 빨치산들은 본명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예명도 비켜서 쓰셨습니다 한말에 최고의 빨치산이 쓰시던 함자를 전 찾았답니다 일제강점기 초에 사형선고를 내리신것 같아요 잡히면 죽여라고 하신듯 합니다만 그래서 의병대잔들이 의병을 포기한게 아니라 사정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듬니다 허나 가파친 무슨 함자를 어떤식으로 바궈가며 쓰셨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본명으론 찾을길이 없답니다 해방후 어데로 끌려가셔서 초 죽임이되어 치료도 못 받으시고 돌아가셨고 문원도 책자도 찾을길이 없답니다 쉰둥이는 너무 어려서 잘 모르시고 아들들은 그렇게 되어벼렸고 아들들이 찾으려한들 대한민국이 가만두시진 않으셨겠지요 나쁜
가파치와 어떤 인연이신지 궁금하네요. 이제 털어놓으셔도 좋을텐데요.
전 가파치를 뵌적이 없답니다 가파치를 존경하시던분들이 많았답니다 가파치의 빛나는 눈빛이 방을 가득메웠다고 제 담임께 들었답니다 눈빛이 유난히 강렬했다고
쉰둥인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로 기억하셨지만
전 가파치와의 인연 그것보단 무언들을 모아 전하는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