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운명
이상기
‘운명적 만남’ 이란 말을 한다. 피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지만 누구는 하느님도 너무 하시지라고 원망하기도 하고, 모두 팔자소관이라며 받아들이기도 한다. 운명이란 신의 의지로 정해지는 것일까? 나 스스로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환경이나 집단의 인과 연으로 인해 저절로 생성되어지는 것일까
북한 미사일이 일본열도를 통과 했다는 뉴스가 있은 후, 한, 미 합동 무력시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북한은 수소폭탄시험을 감행했으며 그 결과가 성공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다. 히로시마 원폭의 열배가 넘는 위력이라니, 폭탄이 되어 날아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유도탄과 전폭기가 머리 위를 나는 것에 더하여 인간이 만든 최악의 살상 무기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갖고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설마라는 말을 입안에 굴려 보지만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염려 또한 뒤 따른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머리는 어지럽게 만들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무력감만 커진다. 이럴 때면 뒷산이 답이다.
어제의 소나기 때문이겠지만 숲은 신선하고 나무 잎들도 평소보다 진하게 반짝인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도 잘 살았음을 자랑하듯 검푸른 잎들이 생명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오솔길은 아직 습기가 남아 시원하고 걷기에 편하다. 소리도 모습도 없는 바람이 나무 잎을 흔들고 머릿속 생각들도 흔든다.
만약 포탄이 떨어진다면? 핵탄두? 대피경보가 울린다면 어디로 갈까? 과연 피한다고 효과가 있을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있지만 포탄은 즐길 대상도 아니고 극복의 대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대상은 더욱 아니지 않는가? 잊어버리려 나선 길 위에서 생각들이 바람처럼 오간다.
두서없는 생각들에 잠겨 걷다 보니 햇빛에 노출된 오르막경사 길에 들어섰다. 볕과 경사 탓에 말라 길은 굳어있다. 늦더위 따가운 햇볕을 피하느라 바삐 발을 옮기다 좀 이상한 느낌에 멈추어 섰다. 개미굴이다. 개미들이 만든 개미성이 길 가운데 생겨났다.
제주도의 오름이 연상되는 모습으로 흙 알갱이가 소복이 올라와 성을 만들고 있다. 분화구의 위치에 뚫린 구멍으로는 개미들이 분주히 드나든다. 개미들은 좁쌀보다 작은 흙을 물고 미끄러지면서도 높은 곳까지 물고 온 것을 놓고 바삐 굴로 되돌아간다. 작은 알갱이들은 구르기도 하고 쌓이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곡선을 만들어 오름 모양의 개미성이 만들어지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흙을 물어 나르는 놈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한 무리 개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마치 검은 줄을 그어 놓은 듯 움직이는 선을 만들며 근처 참나무까지 이어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나무에 오르는 것은 분명한데 그 끝이 어딘지는 알 길이 없다. 줄지어 오가며 맞부딪히기도 하지만 서로 양보하며 바쁘게 움직인다. 다가올 겨울을 위해 집수리를 하고 먹거리 저장에 최선을 다하는 개미들의 생존의 노고를 보고 있자니 경외감이 절로 든다.
다시 그늘에 들어섰다. 바람은 또 생각을 흔든다. 만약 내가 개미집을 밟았다면 투박한 등산화 한쪽에 연약한 개미성은 흔적도 없이 부서질 것이다. 그리고 많은 개미들이 밟혀 죽을 것이 아닌가. 모르긴 해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곳은 시간만 있으면 오르내리던 길이다. 더욱이 건강한 걷기를 한다고 의식적으로 높은 곳을 보며 걸었던 길이다. 나도 모르게 밟아버린다면 개미들에겐 얼마나 큰 재앙이 될 것인가. 예고 없이 큰일을 당하면 개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개미도 개미들의 신이 있어서 다시는 이런 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할까? 아니면 불행의 경험을 기억하여 다시는 사람이 다니는 길에 집을 짓지 않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개미들은 신의 도움이나 과거 재앙을 기억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개미는 사람이 오가는 길의 마른 땅을 찾아 출입구를 만들고 내부를 수리하며 겨울먹이를 준비하기에 바쁘다. 탄도탄과 전폭기가 머리 위를 날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핑계로 산행을 하는 나, 그리고 일상에 바쁘기만 한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전쟁의 비극과 원폭의 처참함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편의 무기가 더 파괴력이 크다며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혹여 닥칠지도 모르는 불행을 앞두고 사람과 개미는 어떻게 다를까?
이제 내려가는 길목이다. 내일은 문상을 가야 한다. 진 죄가 커서 자식을 먼저 보냈다는 동료의 회한을 들으며, 누구보다 직장에 충실했고 부모에게 다정했던 자식이 이제 막 가정을 꾸리던 중에 떠나버렸단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운명이다.
운명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운명의 수레바퀴는 누가 돌리고 있는가?
첫댓글 어떤 운명이 몰아칠 것인가 하는 생각은 인간만이 하는 게 아닐까요?
아마도 개미는 새겨진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 아닌가 싶어요.
현실의 불안한 정세를 보며 산길에서 만난 개미의 집짓기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떠올려보는 작가의 심경과 생각의 갈피가
유려한 문장에 잘 드러나 있는 좋은 작품,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일정부분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운명의 힘'은 정말 알 수 없는 공포가 될 수도 있겠어요.
개미는 집단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룬 벌목과의 곤충이라지요?.
언젠가 EBS에서 개미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요.
여왕개미. 수개미, 일개미, 병정개미, 노예사냥까지...
계급과 분업, 식량조달과 영양교환, 전쟁과 공생, 등등
생태가 인간세상과 흡사했어요. 그런데
개미들의 계급은 역할의 구분일 뿐, 책임과 의무는 접어두고, 권리주장만 하거나 계급과
권력을 남용하는 인간사회보다 더 엄중한 규칙과 질서가 놀랍고 신비로웠어요.
오늘 광복절기념행사가 두 곳에서 치러지는 걸 보았어요.
어떤 생명이든 일용할 양식을 위한 오체투지의 삶은 경배(敬拜) 받아 마땅하겠지요.
기어만 다니는 곤충이 그럴진대, 사람의 도리가 먹고사는 일 뿐이겠나 싶어요.
이런......개미만도 못한.....!
@유진 옛날부터 그랬지요. '이런 금수(禽獸)만도 못한 것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 대해 물음표만 가득 늘어나는 세상,
일사분란한 개미의 삶, 저도 보면서 감탄하며 생각도 많아졌지만
그래도 개미를 보고 배우려는 생각을 하는 인간은 없는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