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환한 나이
조여선
봄비치고는 빗발이 굵다. 좀 늦기는 했어도 몇 달 동안 비를 기다려왔던 농부들은 이제 모내기 준비에 바쁠 것이고, 막 피기 시작한 꽃들도 화사하게 흐드러질 테니 단비이다.
나는 차 한 잔 같이 마시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이는 나보다 적어도 입이 무겁고 새침데기처럼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여리고 글도 깔끔하게 쓸 줄 아는 중년의 여인이다.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목소리가 침울했다. 걱정하는 내게 비 탓일 뿐 아무 일 없다고 했지만, 빗줄기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내 기분을 전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나이가 되어도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와 같은 일상이 권태롭거나 허망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녀가 예상했던 오십 대와 약비가 온다고 좋아서 전화를 하는 나의 한유閑裕한 행동과 혼돈이 된 것일까. 아니면 다가오는 오십 대가 불안하거나 기대하는 바가 큰 것이었을까. 나는 여태 누구한테도 그런 질문을 해보았거나 받아본 적이 없어 느닷없이 묻는 진의를 몰라 잠시 주춤했다.
누구든 그 상황이 돼 보기 전에는 정확하게 아는 건 없다. 우리가 가 보지 않은 곳을 가려고 할 때 두려움과 설렘이 있는 것과 같이 겪지 않은 나이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그녀도 사십 대 중반을 넘어섰으니 몇 년 후 닥쳐올 쉰 살의 변화가 알고 싶어 오십을 훌쩍 넘긴 나에게 물었을 것이다.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무슨 낙으로 사는지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나이가 많아지면 거기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몰랐던 때다. 덧붙이자만 아이들은 언제까지 어린 그대로 어른들의 보호 아래 재미나게 놀기나 하고, 노인들만 나이가 늘어 머리칼이 하얘지고 주름이 생기면 돌아가시는 줄 알았던 철부지 시절이다.
친구들 중에는 대부분 시어머니나 장모가 되어 있다. 결혼을 일찍 한 동창은 손자가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짓쩍어 하기는 해도, 그들이 소일거리가 없다거나 무미건조하게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전에는 주로 남편과 자식 이야기였다면 지금은 사위나 며느리, 또는 손자 이야기로 화제가 달라졌을 뿐 크게 문제되는 것은 없는 듯 보였다.
인간의 육체와 나이는 같이 출발을 하고도 비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중년을 넘어서면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 아닐까. 마음만이라도 더디 늙었으면 하는 시점時點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때를 사십 대 후반이나 오십 대 초반으로 보고 있다.
체력과 기억력은 날로 떨어지고 나만을 위해 준비된 것도 신통치 않은데, 갑자기 찾아온 홍연紅鉛처럼 정신을 퍼뜩 나게 하는 그 무엇, 그때가 바로 늙어간다는 것을 본인도 실감하는 기점인 듯하다.
실토컨대 마음은 젊은지 못지않다고 하면서도 무심결에 노태老態한 걸음걸이며 어눌해진 말투를 감출 수가 없다. 어느 때보다 정신적으로는 성숙해 있고 몸도 시간도 한갓진데 무릎은 뻑뻑하고 시력마저 떨어져 돋보기를 끼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나는
"햇살보다 환한 나이인데 뭐가 허망하고 권태로워요."
라고 답변했다. 그녀가 듣기에는 가식으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오십 대가 되면 날 위해 보내는 시간을 늘리리라고 계획했었다. 나보다 가능성이 많다고 젊은이를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으며, 이만큼이라도 무해무득하게 오십 년 이상의 세월을 거쳐 온 현재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오십 대를 햇살에 비교한 것은 마인드 컨트롤 같은 것이다. 피한다고 닥친 나이가 적어지는 것도 젊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다짐한 것이 오십 대를 재충전의 시기로 삼아 생각과 행동의 폭을 넓히기로 했으며,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나쁜 일들은 속히 잊으며 긍정적으로 살기로 했다. 그래야만 내 앞날에도 희망이 남아 있을 것 같다. 지옥은 희망을 상실한 자가 가는 곳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것 하나만 놓지 않고 살아도 지옥은 면한다니 참으로 몹쓸 것은 단망斷望이 아닌가.
나는 힘들게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미래가 따분할 것이라고 지레 단정하면 못쓴다고 말했다. 늙었다고 구태와 상실만 있고 충일充溢은 젊은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돌아보면 나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보냈던 시간이 많았다. 지루하고 싫증나서 회의에 빠졌던 날 또한 셀 수가 없다. 하지만 이만큼 살아보니 나를 일으켜 세우고 갈 길을 밝혀주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과 모든 불만의 원천은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혹 운이 좋아 남의 등燈으로 내 앞길을 밝히고 있다 하더라도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노력 없이 행운을 잡은 것은 어느 날 박정하게 거두어 갈 수도 있다. 쓸데없는 자격지심으로 홀로 맘 닫지 말고 절반의 절반이라도 웃음 끊이지 않는 인생살이가 되도록 가꿔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서 나는 막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부터 큰아들이 결혼하기 전까지인 오십 대를 나의 황금기라고 정했다. 이 기간에 그동안 잠재울 수밖에 없었던 나를 깨우고 가족에게 쏟았던 시간들을 약간이라도 돌려받기로 했다. 훗날 내가 나를 보고 실망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굽은 나무도 모이면 아름답다고 했다. 내 삶도 모아보면 아름다운 것이 있을 터, 남은 날들도 그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면서 나태의 유혹을 떨쳐낸다면 기로耆老가 되고 망구望九가 되어도 햇살보다 환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첫댓글 자신을 한 번 뒤돌아 보게 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