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한 강릉 오죽 한옥마을 2박 3일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끼리 함께 시간을 같이 보내기 위해 ‘강릉 오죽 한옥 마을’ 숙박 예약을 5월 4일부터 6일까지 2박3일 동안 해 두었다. 는 연락을 1달 전 즈음 며느리한테서 받았다.
그 사이 집사람이 교통사고로 무릎을 다쳐 보행에 불편함을 느껴 잘 걷지 못하게 되었다. 치료를 해도 회복이 더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는 가지말자. 라고 했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이미 날짜가 촉박해져서 해약도 어려울 텐데 불편해도 가보자는 것이었다. 자기는 숙소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도 좋으니 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기에 우리 부부는 하루 앞날 출발하였다.
출발을 하고 보니 네비게이션이 작동을 안 하는 것이었다. 돌아와서 업그레이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휴대폰에 아이나비 어플리게이션을 깔았다. 그리고 길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아 처음에는 헷갈렸다. 조금 운행을 하니 차츰 적응이 되었다.
대구 농공 휴게소에서 휴대폰 거치대를 구입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포항으로 향했다. 동해안 옛길 7번국도 해안 길을 따라 바다를 구경하면서 강릉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점심은 영덕에서 먹었다. 내가 대게 가격을 물어 보았다. 작은 것 한 마리에 오만 원이라고 했다. 내가 두 마리를 시키니 곁에 있던 집사람이 그것을 취소하고, 물회로 메뉴를 바꿔 버리는 것이었다.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다.
당초 계획은 속초와 동해시 사이의 해안가에 숙소를 정하려는 생각을 하고 왔는데 해안가에는 팬션만 눈에 들어왔다. 숙소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황금 연후 첫 금요일의 경우 동해안의 숙박업소가 만원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무턱대고 동해시청 부근으로 찾아갔다. 먼 곳에 리치 호텔이 눈에 띈다. 그곳에 차를 정차시키고 물어 보았더니 방이 있다고 하기에 전망이 좋은 곳을 부탁하고 여장을 풀었다. 들어와서 보니 오래된 건물이라 시설이 후졌다. 저녁은 해물 찜을 먹었는데 싱싱하고 맛있었다.
이튿날 숙소를 나온 시간은 10시가 넘었다.
동해안에 있는 ‘掛搒山燈明洛迦寺’에 들렀다. 나 혼자 절에 올라갔다. 고즈넉한 고찰이다. 이곳에는 석가불과 아미타불, 그리고 관세음 보살을 모셔 놓았다. 스님들의 참선 장소로 제일이라 했다.
강릉 오죽 한옥 마을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30분이었다. 3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숙소만 확인을 하고 강릉 시청 부근에서 생선 조림으로 식사를 하고 돌아오니 2시 정도 되었다. 안내소에 갔더니 청소 여부를 확인한후 열쇠를 주는 것이었다.
아들 일행은 조금 늦을 것이라는 연락이 와서 나 혼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릉 오죽 한옥 마을’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과 가까운 곳에 조성했는데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린다.
이 한옥 마을 바로 곁에 ‘오죽헌’ ‘인성교육장’ ‘전통문화 체험 장’ ‘강릉 농악 전수 수련관’ ‘농악 공연장’이 조성되어 있다.
강릉 오죽 한옥 마을 안에는 사물재(四勿齋), 그네, 씨름장, 널뛰기, 윷놀이, 투호장이 조성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오만원권에 초상화가 그려진 신사임당과 오천원권에 초상화가 그려진 율곡의 화폐를 확대하여 전시하고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1504년에 강릉 북평에서 생원 이사온의 딸로 태어났다. 5자매 가운데서 둘째다.
어려서부터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예술적인 천부적 자질을 보였던 그녀는 19세에 이원수에게 시집을 갔다.
몇 년간 신혼 초기를 보내다가 정든 고향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읊은 시는 유명하다.
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坪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靑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 번 바라보니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어머님을 그리며(思親)’라는 시도 전시되어 있었다.
千里鄕山萬疊峯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畔孤輪月 鏡浦臺前一陣風
沙上白鷗恒聚散 波頭漁艇各西東
何時重踏臨瀛路 彩服斑依膝下縫
“산 첩첩 고향은 천리만리 밖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달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모였다 흩어지고
고깃배들 파도 위에 오고가리니
어느 때나 강릉 땅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어머님 슬하에서 바느질 할꼬”
사임당은 조선시대 손꼽히는 천재 학자 율곡을 길러낸 장한 어머니다.
율곡은 과거 시험을 아홉 번 보았는데 아홉 번 모두 장원급제를 했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 일을 두고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한다.
그는 일찍이 3세에 글자를 깨치고 5세에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네(石榴皮裏碎紅珠)’라는 시를 지을 정도로 천재였다.
내가 오죽헌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왔더니 아들, 딸, 며느리, 손녀가 와 있었다.
내가 아들을 보고 이번 휴가 중에는 엄마와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끼리 지내라. 너의 엄마는 걷기가 불편하다. 너의 엄마는 너희들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와 둘이는 집에서 소일을 하다가 컨디션이 좋으면 주위만 조금 걸을 예정이다. 고 말했다.
그래도 억지로 오죽헌과 바닷가 까지는 동행을 하여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고, 아들 식구와 딸은 바닷가로 다시 가고 우리 내외는 집으로 돌아와서 편히 쉬었다.
내가 혼자 사물재(四勿齋) 마루에 앉아 있을 때 다른 가족이 이 곳에 놀러왔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 두 명을 그의 부모가 데리고 와서 나의 곁에 앉는 것이었다.
그때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四勿齋라 쓰인 현판의 글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는 알겠는데 가운데 글자를 잘 모르겠다. 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듣고 있다가 내가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 세대는 한글세대이다. 한글세대는 가운데 글자를 알기 어렵다. 내가 설명을 해도 되겠니? 했더니 좋다고 하기에 내가 글자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사물재(四勿齋)라는 글인데 사물(四勿)은 네 가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재(齋)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공자님이 그의 제자 안회에게 일러준 이야기다.
안회(顔回)가 공자(孔子)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구체적인 실천 조목을 묻자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을 말했는데 그 뜻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이다.
그 말을 여기에서 인용한 말인 것 같다. 라고 했더니 ‘고맙습니다.’ 고 말하더라.
그러기에 사실 나도 일흔 살이 넘어서 알게 된 글이다. 라고 말한 후에 자리를 떴다.
손녀 소영이는 또래만 만나면 말을 걸고 싶어 하고 체험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그네를 뛰어도 지치지 않는다. 대단한 체력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집사람이 다리가 불편하여 중도에 그만 둘 생각도 했지만 일정이 먼저 잡혀 있었던 점과, 또, 우리가 가지 않으면 바쁜 저네들이 내려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간 것이다.
아무튼 같이 동행은 많이 못했을 망정 함께 보낸 시간만으로도 뜻 깊은 푸른 오월이었음이 분명하다.
첫댓글 사모님 교통사고라니? 다리가 많이 불편하신가봐
그나마 다행이구나.
아픈 몸을 이끌고 자녀들 효도에 참여하는 부모의 마음...
영원한 스승 우리 김교장님 오늘도 참교육 실천 하셔서 뿌듯 하셨겠네요.
상대 부모님의 배려까지 잊지않고 ...
먼 강릉길이 헛되지 않은것 같소이다.
아들가족. 딸과 함께한 여행 귀가길은 즐거우셨을것 같아요.
사모님 건강 빠른 회복 기원합니다.
늘 오늘과 같은 행복 이어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