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싯날
이정화
아무 날도 아닌 날이 아니었다. 휑하던 장터에 다섯 손가락을 꼽으면 전이 펼쳐진다. 그날이 오면 돈이 돌고, 곡식도 돌고, 인심도 돌아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제사장 보러 진고개를 넘어온 할배의 쌈짓돈과 이른 새벽 황장재를 넘어온 자반고등어는 주인을 바꾼다.
장터에 해가 떠오른다. 높다란 장대에 노란 고무줄, 흰 고무줄, 검정고무줄을 두툼하게 매달아 든 사내가 다가온다. 설핏 보면 사람 없이 긴 고무줄 장대가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 구경꾼이 겹겹이 둘러선 곳에는 원숭이가 곡예를 넘는다. 자발없는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은 여자아이 꽃핀을 낚아채자 아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친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포라이터와 돌, 손전등과 커다란 건전지와 잡동사니를 부려 놓고 파는 사람, 그 옆에서 구멍 난 솥을 때우는 남정네는 널브러진 솥과 솥 사이를 재주 좋게 건너뛰며 부산하게 몸을 놀린다.
난생처음 보는 왁자지껄한 장터는 어린 내 눈에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국밥집 돈통 위에는 제 몸집보다 더 큰 배터리를 고무줄로 칭칭 감은 라디오에서 구성진 가락이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장터 안을 채우는 힘의 원천은 엿장수 가위소리, 시비 소리, 지청구 소리, 끌려 나온 소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닭 우는소리, 신난 아이들의 옥타브 높은 소리가 아닐런가. 휘장 아래에서 먹던 하얀 찐빵 위에는 솔솔 뿌려진 설탕이 녹으면서 콧잔등의 땀방울처럼 송골송골 맺혔다. 제 몸을 불리려고 열심히 일한 증기빵마저도 장마당의 상징이었을까. 장날은 살아 숨 쉬는 일자리의 표본실이자 현역들의 인생 교실이 아닐 수 없다.
식구들 생일이 가까워 오거나, 조상님 제삿날이 다가오면 장 나들이는 꼭 필요했다. 쇠고기 지나간 국물로 배를 채운 귀빠진 날은 가진 게 없어도 풍성했다. 마루 밑에 묻어둔 밤도, 광에 매달린 건어물도, 디딜방아로 빻은 떡도 집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굴비나 자반은 챗거리장에서 사 와야만 했다. 닷새마다 열리는 장바닥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앞사람 등을 보고 밀려다닌 혼잡함이 덩달아 돼지고기 반 근을 끊게 만드는 경쟁심을 부추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멸치라고 부르는 맷고기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먹는 생선일 게다. 아무리 먹어도 고등어 한 톰배기만큼도 채우지 못할 자잘한 멸치가, 오랫동안 사람들 밥상과 도시락 반찬으로 인기 있었던 것은 서민처럼 머릿수로 세력을 키웠기 때문이리라.
버스가 없던 시절은 겨울 찬바람을 안고 십 리 길을 걸었고, 한여름 무작스런 해를 이고도 장은 열렸다. 조선시대 종로의 운종가도,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서 열리던 장터목도 부럽지 않은 챗거리장이었다.
장터는 찬란한 전성기를 누비는 인생과도 같다. 바쁘고, 들뜨며, 몸을 써야 밥을 먹는 일터이리라. 번창하던 챗거리장은 아쉽게도 시절 인연이 다했는지 강제 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댐 속으로 수몰되자 민속사의 한 구절로 인쇄되어 아련하게 추억될 뿐이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만큼 유구한 것이 또 있을까. 영원할 것만 같던 장터는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용궁의 저잣거리로 수장되었다.
가뭇없이 사라져 간 챗거리장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줄로만 알았다. 이태 전 국도를 지나가다 댐이 생길 때 산 중턱으로 옮겨 앉은 마을에서 마른 고추를 팔고 있는 수몰민 할머니를 보았다. 그 옆에는 호미와 낫, 몇 가지 연장을 어설프게 펼쳐놓고, 늙수그레한 노인이 오후의 볕에 졸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몇 없는데 무슨 연유로 여기에다 전을 폈는지 궁금해졌다. 잠시 쉴 겸 할머니 옆에 앉아 고추가 실하다며 말을 걸었다. 잠에서 깬 노인은 어느새 옆으로 와서 여기가 파장한 지 사십 년도 넘은 그 유명한 임동 챗거리장이라고 자랑을 한다. 융성했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적적한 두 노인은 스러져 가는 옛 직장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다. 은퇴가 두려웠는가, 아니면 퇴직 없는 평생직장을 꿈꾸었는가.
집을 나서는 길은 돌아오기 위해 열려 있다. 그곳이 설령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이라 해도 돌아올 곳이 있어서 하루를 버티는지도 모른다. 아옹다옹 서로의 주머니를 열고 닫는 곳이 장터 아닌가. 식솔이 딸린 가장의 어깨에 지게의 무게가 더해졌고, 일찌감치 생계를 짊어지고 세상으로 밀려난 강한 여인네가 푸성귀라도 내다 팔던 삶의 터전이었다. 장돌림은 지친 육신을 무싯날에 쉬어 가고 싶었겠지만, 다음 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의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우리네 신세가 장돌뱅이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젊은 날, 아이들과 만나는 동안은 늘 분주한 난장이었다. 이십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무 고개를 넘듯이 아슬아슬한 의문만을 남겼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아이들과 만나는 일상이 족쇄를 찬 것만큼 무거워질 때 물러나 앉았다. 세상을 버린 은둔자처럼 유유자적할 줄 알았건만, 막상 무싯날이 되풀이될수록 남루한 옷을 걸친 듯 위축되고 무료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바쁘게 보낸 날들의 숨소리가 생명력 있게 느껴지고 때론 그리웠다. 늘어진 고무줄 같은 시간은 아무리 팽팽하게 당겨 보아도 발아래 쌓여 하릴없이 눌어붙는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은 날들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둑방길을 달렸고, 변두리 골목길을 구석구석 걸었다. 수목원 벤치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아른거리는 눈으로 집에 와도 해는 아직 남아 있었다. 무싯날의 연속이었다. 삶이 조금씩 가라앉고 이방인처럼 밀려나서 겉도는 것 같았다.
만년 월급쟁이일 줄 알았던 친구들도 십여 년 전부터 하나둘씩 장터 같은 직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와 장은 파하고 난전의 문은 닫혔다. 정년을 다 채운다 하더라도 은퇴는 쓸쓸해 보이는 법, 파장한 장터를 지나가는 가을바람 같기만 하다. 이제부터는 한정 없이 남아도는 무싯날을 무엇으로 채워 나갈지 걱정 반 기대 반인 심정이다.
고된 노동도 지나고 나니 축제 같기만 하고, 바쁜 장날이 그리워 마음이 발길에 채일 즈음, 은퇴자들은 이리저리 다시 시장을 찾아 나선다. 상설 장은 욕심이고, 오일장이나 번개시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왕년을 내려놓고 소일거리를 찾아 취미를 즐기기도, 배움을 청하기도, 용돈벌이를 위해 경제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문우들과 모여앉아 공부 칠일장의 난장을 열었다. 예전만은 못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작은 좌판 하나를 펼쳤을 뿐이다. 글밭을 일구며 지나온 세월을 거슬러 기억 속의 장터를 누비고 다닌다. 다시 인생의 장꾼이 되니 내 삶에도 꽃나무 속 왁자한 벌떼 같은 생기가 돈다. 난전에서는 호객하는 잡다한 소리가 들리고 괜스레 서서 이것저것 만져본다. 질문도 의문도 묻어 둘 것 같은 퇴직 이후, 오히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솟구치는 듯하다.
날마다 무싯날, 비록 시장에서는 명예롭게 제대했지만 명랑만큼은 현직 생활할 때만큼 여전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아무 날도 아닌 날들. 그날이 그날 같은 유별난 일 없이 지나가는 게 정말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나는 요즘 별일 없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