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 <용서를 위하여>를 펴냈을 때였습니다. 잘 아는 스님 한 분이 그 책 여러 권을 사서 가까운 분들에게 보내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들려온 말이, 제 가슴에 칼이 되어 꽂혔습니다. 스님들이 그분들에게 읽고 난 소감을 물었더니, 책 이야기는 없이 첫 마디가 대뜸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어?" 하더랍니다.
이제 저도 그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매일매일 나이만큼 절망하고, 나이만큼 분노하고, 나이만큼 허무해지면서 살아갑니다. 오늘이 어제 같지 않았으니 내일은 또 어디만큼 달라지려나. 어쩌다, 상식이 저주받는 이 겸손조차 없는 시대가 제가 맞고 있는 노년입니다.
제가 60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가, 자네도 벌써 그 나이가 되었나. 60은 노년의 청춘이라네. 나는 그때가 참 행복했다네." 그렇게 저의 늙음에 희망을 심어주신 은사가 계셨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시절어었다는 60대를 나도 '노년의 청춘'으로 살아가자." 소년 같은 희망을 갖게 하셨지요.
제가 70이 되었을 때는 또 70은 노년의 중년이라면서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때'가 70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나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나이가 70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에게 그 말은 "70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인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흔의 후반을 살아갑니다. 내 몸이 하루하루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것을 느껴야 하는 공포가 있습니다. 먼저 떠나는 친구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절망도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보다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받아야 했던 고통과 자책이 더 많았던 신자의 하루하루는 아니었던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묻곤 합니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하루하루입니다.
"주님, 이 작품만은 끝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요즘 저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리고 어딘가 눈물겨운, 그렇습니다. 저 깊은 곳에 행복한 슬픔 같은 것이 곁들여 있는 나날을, 글을 쓰며 살아갑니다. 마지막까지 쓰다가 죽는 '책상 앞에서의 행복한 이별'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작품을 끝내는 그날까지만이라도 저를 지켜달라는 처절한 염원입니다.
'백조의 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조는 죽기 전 한 번 마지막으로 운다는 전설입니다. 제가 부를 '백조의 노래'를 위하여 '기쁨아 웃음 소리를 낮추어라, 옆방의 슬픔이 깨어난다'는 영국의 속담처럼 기쁨을 달래며 슬픔을 다독이며 삽니다. "주님, 풀처럼 고개를 들며, 꽃이 지듯 이 저무는 저녁을 바라보면서... 백조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한수산 소설가, 가톨릭 서울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