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숨 / 박혜정
숨은 것도 다 들킨 봄이다 삼월의 봄꽃들을 말려 지갑에 90도로 접어 놨다 꽃은 그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피는 거다 가끔 난 당신에 대해 마음만 앞선 것은 아닌지 할 때가 있고 또 가금은 내가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나인가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뭘 모를 때가 많다
몇 해 전부터 당신은 나의 세계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보면 나는 없고 당신만 있다
맑은 하늘이 나무에 걸린 가을 나뭇잎의 날씨를 만들자는 당신의 작음 숨소리가 지금도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날아가지 못했다 꽃피우지 못한 말들이다 또 부메랑처럼 내게 다가온다 밀려와 나를 생각의 굴레에 빠드린다
무얼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없고 나 없는 당신의 세계를 말하고자 한다
당신의 세계는 어지러운 생각이다 더러운 생각이다 당신을 생각하면 머리가 깨진다 깨진 머리카락들이 징글징글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숨소리다 꽃이 숨을 내뱉는 공기다 꽃이 피워 올린 생각이다
제발 가, 다시 오지 말고 가,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생각이다
생각을 기차역에 두고 온 날이면
구두가 먼저 나를 벗는다
구두 굽에 달라붙은 당신, 내가 생각을 버리고 왔는데 생각은 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야, 하고
어디선가 내 밤을 보고 있는 당신의 숨소리가 들린다
생의 얼굴
사진기가 없던 시대에는 얼굴이 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늦은 여름의 길거리에 화가 많이 난 새를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빨간 물감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빨갛게 물든 새를 바라보는 오후의 다섯 ㅣ시도 하나하나 물들어 갔다
버스 정류장에 앉은 바람은 여름 온도로 더 높아진다
붉은 외투를 입다가 버리는 식은 바람들은
새의 흐릿한 눈동자처럼 휙
바람의 조각난 눈동자처럼 휙휙
핏빛 옷을 벗는 새들의 얼굴은 점점 늘어난다
다섯 명의 새들은 또 다섯 명의 새를 데리고 온다
새의 부리는 또 다른 눈이라고 의지한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기울기는 더 낮아진다
새들이 전해 준 소식들은 전부 다 그러했을 것이다
모두 같같은 안부하며 새의 부리가 쪼아대고
가엾은 새들은 부리를 땅에 묻고 죽어 간다
땅에 새와 얼굴과 현미경을 묻는다
무덤을 찍는 렌즈는 투명하게 알고 있다
현상된 사진에는 새의 영혼이 있을 것이다
더운 길거리에 화가 나 죽어 간 얼굴들도
바람이 된 빨간 물감들은 그대로 있다
모래시계를 삶았다
모래시계를 커피포트에 삶았더니 저녁 9시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들을 시곗줄로 엮어 긴 바늘 뒤에 숨겨 두었습니다 감춘 시계의 손톱이 짧은 바늘과 나란히 걸어갑니다 잠깐 멈춘 사이 5월의 어둠은 커피포트 속에 끓고 있었나 보죠 당신은 문구점으로 라이터를 사러 간다고 했습니다
내 손바닥의 그림자는 시계를 좌우로 뒤집어 굽고
시계에 묶어 둔 체크무늬 리본 보플이 아름답게 떨어집니다
당신에게 숙제를 시킨 것도 아닌데 필통은 보이질 않습니다
라이터와 당신은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요?
천천히 식어가는 모래시계가 내 갈색 눈동자를 쿡쿡 찌르고 있습니다
시계가 내지르는 소음이 극성맞게 나에게 달라붙는 밤입니다
창문에 박힌 별의 발자국이 똑딱거립니다
당신은 어딧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이 공식의 수수께기를 나에게 남겨 두었을까요? 풀리지 않는 문제와 차가운 시곗바늘의 뾰족한 모래들이 부엌에서 픽픽 쓰려져 갑니다
당신이 자주 눕던 소파의 자세처럼요
목련나무 신분증
앞마당에 목련 나무가 새벽부터 울먹거린다
딸각거리는 기척들이 몸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물들이 흡수가 되어버린 몸, 나는 두 개의 몸이다
목련 나무가 좋아하는 부스러진 돌멩이들이 있다
달빛의 두 볼이 스친 별들의 어깨들도 고요하다
부지런하게 펄럭거리던 개매의 손짓들을 살펴본다
내 안에 이런 것들을 가만히 되새겨보는 새벽,
나는 아내에게 내려온 조금은 이른 봄을 생각한다
앞구르길기를 하며 그녀 앞에 움직이지 않는 봄,
뒤구르기를 하며 다섯 해에 떠나간 아이의 계절을
나의 신분증에는 아내의 봄이 들어 있다
봄이 두 개, 몸도 두 개라고 불렀다.
마치 아이와 중첩이 된 임산부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를 천천히 갖자고 말했었다
입버릇처럼 아내는 우리가 아이를 갖는 게 아니야,
아이가 우리에게 오는 거라며, 목련 꽃잎이 잘게
떨어진 골목에서 울음들을 거침없이 토해내기도 했다
꽃잎까지 떨어드린 아내의 울음은 온 집안에 있는
가구들과 내 마음까지도 축축하게 물들여 놓았다
아내는 밤의 밑바닥에 배냇저고리를 내려두고서야
하루의 간격에 잃어버린 잠을 찾을 수 있었다
창틀도 조용한 저녁에는 작년에 심은 목련 나무의
작음 잎사귀를 손등처럼 쓸어내렸다, 아내와
아이의 작은 귀처럼 핀 목련 나무의 꽃망울
곁에 서서 내 검은 눈썹들을 말끔히 흘려보냈다
무덤이라는 침대
아버지의 두 다리가 침대 가로선을 넘어간다
양복바지를 살 때도 실의 넓이는 두툼했다
물방울들이 지겨운 빛을 꺼둔 바밤이 되면
양복을 이입은은 아버지는 내 방으로 기어 온다
-아들아, 밥은 먹고 다니니
용돈을 얼나마 부족할까
삐뚤엊어진 글자들이 환생을 하는 아침이 오면
토요일의 햇빛들은 침대 다리들을 깨물고 있고
아버지의 두 다리는 내 책상 위에 가지런하다
나는 독일어를 검정 볼펜 뚜껑에 끼워 두고
아버지의 긴 다리를 접어 무덤에 놓는다
달력에 붙어 있는 숫자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
이번 달 통장에 잔고가 남은 동전 소리가 딸랑거린다
아버지의 두툼한 양 발바닥의 울퉁불퉁하게 새겨진
흰 눈송이 냄새는 늘 부드럽게 내 콧등을 만졌다
-아버지, 여긴 방에요 쉿!
오늘 먹어야 할 알약을 놓고 갈게요
제발, 소주는 하루에 한 잔만요
오늘도 아버지는 치매를 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