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 갇히다
서 영 희
잠결에 휴대폰을 찾아 어둠을 더듬는다. 시간을 보기위해서다. 흐릿해진 눈에 비친 시계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제 멋대로 늘어져있다. 간신히 초점을 맞추는데 이번에는 뜬금없이 25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25시라니. 순간, 묘한 표정의 안소니 퀸이 시니컬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화들짝 정신이 든다. 세계적인 유명 배우가 왜 나를 보고 있을까. 그리고 늘어진 시계라니.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고 이리저리 궁리를 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제 옆집의 젊은 여자와 나눈 대화중에 잠깐 25시의 의미에 대한 말이 나오긴 했다. 그러나 그녀는 25시란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 어둔한 말로 그것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도 나도 서로 완전하게 소통을 하지 못한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숫자 25와 안소니 퀸의 조합이라면 영화, <25시>다. 그 영화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감명 깊고 시사하는 바도 컸다. 굳이 꼽으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영화다. 제목부터가 그랬다. 25라는 시간의 상징성에 가장 부합되는, 영화중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게는 멕시코 출신의 안소니 퀸이라는 배우 자체가 볼 만한 영화의 인증서와 같다. 내 기준에서 본 그는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참 잘 표현하는 배우다. 그가 나오는 영화중에서 캐릭터가 비슷한 것을 보지 못했지만 어느 하나도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 배우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알아야 될 필요도 못 느꼈고 그의 팬도 아니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슴에 오래도록 감동이 남아 있던 영화 몇 편 속에 그가 등장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영화 <길> 속에서 여인 젤소미나를 학대하고 착취하는 장면에서 그는 영락없이 나쁜 남자다. 노틀담의 종지기인 콰지모도로 등장하는 <노틀담의 꼽추>에서는 에스메랄다를 향해 지고지순한 착한 남자다. 내가 어찌 대배우의 연기력을 평할까마는 어쩌면 저리도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잘할까 싶었다. 그에게 자신을 표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영화 <25시>에서 그는 루마니아의 어느 시골 마을의 요한 모리츠라는 농부로 분扮한다. 바보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순박한 사람이다. 백치미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미소는 그를 한없이 낙천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열심히 사는 그에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평소 그녀의 미모에 눈독을 들이던 경찰서장은 요한 모리츠를 유대인으로 둔갑시켜 전쟁터로 보내버린다. 그는 자기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의 요구대로 유대인이 되었다가 독일인이 되었다가 아리아인이 되기도 한다. 생과 사를 넘나들며 험난한 시간을 보낸 그는 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집을 떠나있는 동안 아이는 더 늘어났다, 그 대목에서부터 나는 슬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는 여인들의 심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한마디 설명도 조명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남편이 전쟁터에 있는데 아이가 자꾸 생기겠는가. 기차역에서 그를 기다린 건 자신의 아이를 포함해서, 자기를 전쟁터로 내몰았던 남자의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였다. 그 곱고 예쁘던 여인이 삶에 지친 표정으로 남편을 영접하려고 햇빛 속에 서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었다. 아무런 내막도 알지 못하는 사진 기자는 기념사진을 찍겠다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그들 가족에게 웃으라는 주문을 한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안소니 퀸은 웃는다. 아니, 운다. 입은 웃고 눈은 울던, 얄궂은 모리츠의 표정은 두고두고 회자될 영화의 멋진 장면이었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한 인간이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몰락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의 미소가 난감해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싶었던 영화 <25시>. 그 영화를 본 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왜 뜬금없이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는 왜 영화를 나와 연관시키는가.
25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즉, 내가 원하지 않았던 시간이고 물론 당신도 원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았던 불행한 시간이다. 안소니 퀸이라는 배우는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 속에서 전쟁에 떠밀리며 산다. 그러나 나에게 25시는 엄연히 존재했던 시간이고 지금도 존재하는 시간이다. 병이라는 거대한 상황 속에 갇혀버린, 죽지 않고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시간을 짊어진 채 20여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잊혀지는 고통은 시간이 약이고 신이다. 어떤 작가는 아들을 잃고 시간이 가는 것을 두고, 그리고 상처가 점점 무뎌지는 걸 보고는 시간은 신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 시간은 신도 아니고 약도 아니다. 오로지 고통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육체의 아픔은 정신을 흐리게 한다. 사고하고 판단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시간이 가면 좋아지는 것도 많은데 난 점점 나빠진다. 결국 나의 하루는 오롯이 내가 견뎌내야 하는 25시간이다.
어둠을 툴툴 털고 일어난다. 살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므로 부실한 몸이나마 움직여 볼 참이다. 수술을 앞두고 너무 예민해졌던 까닭이라고 안소니 퀸의 미소를 해석하며 씩씩하게 하루치의 알약을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