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저녁 수업에는 영화 엘리멘탈을 봤다.
나는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영화여서, 이번에는 전에 보지 못 한 감정선들을 새로이 찾아내는 재미로 영화를 감상하였다.
엘리멘탈의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 외지에 정착한 화속성 가족의 장녀, 엠버이다.
엠버는 정말 개성이 강하며 불같은 성정을 지녔으나, 그 사실을 자신도 인지하고 있기에 평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산다.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받기 위해선, 어려서 부터 자기 삶의 이유로 삼은 일을 해내기 위해선 자신을 죽여야만 했으니까.
웨이드는 태어났을 때부터 엘리멘탈에 살았던 물 속성 종족의 사람이다.
그리고 웨이드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유연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바라봐 주고 비춰 주는, 웨이드는 들어 주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중 연출을 보면 웨이드는 엔버와 함께 있을 때, 엠버의 강렬한 열기를 반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비스테리아는 이 세상을 빗대어 나타난다.
그 어떤 원소의 힘에도 반응하는 기적과도 같은 꽃.
엠버는 어려서 부터 비비스테리아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진짜 자기 모습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리고 결국 엠버는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웨이드라는 낯선 손님을 바라보게 되고, 웨이드는 엠버에게 그녀 본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비비스테리아로 말한다.
웨이드는 엠버가 만들었던 비비스테리아를 다시 엠버에게 돌려주었고,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엠버에게 비비스테리아를 보여준다.
그녀에 의하여 활짝 피어난 비비스테리아가 말 하던 것은 분명 엠버 그 자신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엠버는, 웨이드에 대한, 그리고 유리 공예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그녀는ㅊ몹시 분노한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순간, 엠버는 자기자신이 여태껏 긍정해 온, 자신을 이룬다 생각되는 그 모든 시간을 부정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엠버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였고, 웨이드와 자신의 작품을 부정하려 했으며, 아버지 아슈파의 가게를 물려 받으려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엠버와 웨이드.
그 관계 속에서 피어난 비비스테리아가.
그 작은 꽃 한 송이가 가진 의미가 작았더라면 말이다.
가계 수계식 당일 날, 웨이드는 그 자리의 방해꾼으로서 등장한다.
그 모든 현실을 부정함으로서, 자신을 부정한 엠버와 싸우고, 불과 물은 이루어 질 수 없다던 세계의 관념을 무시하고, 어떠한 요소조차 뿌리친 채, 웨이드는 단 하나의 사실만을 긍정한다.
바로 그 날 웨이드와 엠버 사이에 있었던 한 순간의 기적.
불과 물이 맞닿고, 너와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먼 두 요소가 한 자리에 만나는 그 단 한 찰나의 기적.
영화를 감상하던 나의 언어로 설명하지면, 내가 너로 인해, 네가 나로 인해, 고로서 올곧은 나로서 존재하던 한 순간을, 웨이드는 자신을 내려 놓음으로서 긍정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너무나도 감동적이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엠버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 하였고, 결국 둘은 그 순간 맺어지지 않았다.
아마 엠버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들을 망쳐버린 샘이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아파한다 생각하니, 그 아픔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영화 내내 문제로서 작용하던 땜이 결국 터져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이어타운을 공격한 것은 범람하는 물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감독이 은연중에 작품 속에 넣어 논 현실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불을 꺼버리는 것은 물이라고.
그러니 현실적으로 둘의 관계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빗대어 보여준 것이다.
어찌 됐건 엠버는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 파이어타운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자신의 가게에 있는 푸른 불, 즉 자기 종족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불을 지키기 위하여 홀로 물에 잠긴 가게로 뛰어든다.
그것은 엠버의 일이었고, 엠버에게 있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때, 물이 새는 문을 막고있던 엠버의 세상에 웨이드가 들어온다.
이제 더이상 현실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는 시점에서, 마지막 까지도 웨이드는 엠버에게로 온다.
그 후 둘은 푸른 불이 있던 장소에 갇히고, 웨이드는 엠버와 가장 가깝게 서로를 끌어 안은 후 증발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
여전히 타인의 말에 공감하며.
여러 이야기들에 절감하며 결코 가볍지 않는 눈물과 함께 엠버의 곁으로 온다.
그렇게 둘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아스파가 한 말이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우리 가게가 아니라 바로 너란다."
이 장면은 아스파에게 있어서도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자각하는 순간이었을 것이고, 또한 엠버에게 있어서는 앞으로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한 첫 걸음을 때게 해준 말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엠버는 예전에 아스파가 그랬듯 떠나게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순간 까지도 엠버는 허둥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입을까 두려워, 하지만 아스파는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굽힌다.
아스파의 뜻은 곧 엠버의 뜻이다.
왜냐하면 아스파가 엠버를 사랑하기에, 엠버가 아스파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엠버는 아스파에게 동족의 문화대로 절을 한 뒤, 자신의 길을 향해 떠남으로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감상하며 많은 것을 느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사실 이야기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야기를 감상하며 가장 똑바로 바라보았던 것은, 바로 안다는 착각에 빠진 나의 모습이었다.
이미 한 번 본 영화에 대한 착각, 그리고 영화가 끝이 난 뒤 여공쌤께서 말씀 해 주시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미국에서 살았을 적의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나도 그렇게 봤는데, 나도 미국에서 살았는데' 등의 생각을 했다.
실제로는 이 사실이 어떻든 여공쌤께서 지금 이 순간 말씀 해 주시던 이야기는 여태껏, 그리고 앞으로도 단 한 순간도 재현될 수 없는 오로지 지금에만 있는 보물일 텐데.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면서도 올곧이 여공쌤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 하였다.
나는 그 사실이 못마땅 하였지만, 이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바로 이에 대한 것이었다.
안다는 착각에 빠진 나.
아직도 과거의 편린에 대한, 속세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지 못 한 나를 나는 바꿀 것이다.
이미 떠올린 이상 붙잡고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이제부터 오늘을 살아가며 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안다는 착각에 빠진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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