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진 꿈
kch_35@hanmail.net.강철수
손자 셋이 장가를 갔다.
벌써 7년, 5년, 3년이 되었지만 증손주는 감감무소식이다. 작년 미수연(米壽宴) 답사에서 ‘버킷리스트 첫 번째가 증손주 안아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디 한 커플쯤 일어나 ‘저희가 그 소원 풀어 드리겠습니다.’ 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고개 숙인 손부들,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한 건 ‘축하 케이크 절단이 있겠습니다.’ 였다. 그 일로 해서 아내의 지청구까지 들을 줄이야. ‘왜 애들에게 그리 부담을 줘요. 어련히 알아서 할까 봐. 누가 그럽디다. 결혼해 준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요.’
’함구(緘口), 연만한 이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노년 살이 십훈(十訓)에도 ‘참견하려 나서지 말라!’가 있다. 아무 말이나 했다간 지청구를 넘어 면박 수모를 당할지도 모른다. ‘우리 때는∽’이나 ‘옛날에는∽’ 같은 훈계조 서두는 꺼내기만 해도 ‘꼰대’라는 타박이 쏟아지고 ‘사귀는 사람 있냐?’, ‘결혼 언제 할 거냐?’, ‘아이는 몇이나?’ 같은 일급 금기어(禁忌語)를 입에 담았다간 뜻밖의 낭패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말 들을까봐 명절 귀향을 꺼린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그 금기어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벼르고 벼르다 일급 금기어 하나를 입에 담았다. “아기는 언제 가질 거냐?” 결혼 5년 차인 장손(長孫)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할아버지! 우리 안 갖기로 했어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나온 대답, 곤혹스러워하기는커녕 무슨 자랑이라도 하듯 당당했다. 주말마다 안부 전화 올리는 효손이었지만 무 자르듯 단칼에 할아비의 입을 봉해 버렸다. 머쓱해진 할아비, 준비한 다음 말은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몸이 달았다. 이러다 정말 대(代)가 끊길지도 모른다 싶었다. 7년 차, 5년 차는 이미 물 건너갔고 3년 차는 기다려 달라고 했다지만 손부가 대기업으로 직장을 옮겼으니 어느 세월에 이루어지겠는가. 남은 손자는 둘, 하나는 내년 유월에 결혼 날짜를 잡았으니 아이에 대한 건 벌써 결정이 났을 터, 말이 없는 걸 보면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학원 4년 차, 아직 사귀는 아가씨가 없다고 하니 혹여 이 글을 보고 ‘나는 아이 낳겠다는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라고 만천하에 선포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 그 엄마도 손주가 태어나면 기꺼이 봐주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꿈도 야무지다.’는 말이 있다. 희망이 너무 커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비꼬아 이르는 말이라 한다. 그 야무진 꿈의 주인공이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본 식구 열여덟에 손자 다섯과 손녀 넷의 결혼으로 맞이할 배우자와 그들에게서 태어날 아이들까지 합하면 사십여 명의 대가족이 될 터, 마당이 좁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더라도 저희 아빠 때처럼 마당에 비닐 수영장을 만들고 공중에 무지개를 그릴 수 있는 분사식 물총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제 아빠를 비롯해 큰아빠, 삼촌, 고모들이 이룩한 아롱다롱 빛나는 전설을 속삭여 주리라 다짐했다.
중화요리 마지막 순서인 자장면의 양이 적다고 울그락불그락 화를 낸 아이는 누구였고 설렁탕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운 아이는 누구였다. 유치원 얘기를 구연동화 하듯 맛깔스럽게 읊는 아이는 누구였고 ‘할머니는 놀면서 왜 우리 엄마만 일 시켜요?’ 따지고 든 아이는 누구였다. 독일에서 살다 와 제 할아비와 찰랑찰랑 욕조에 마주 앉아 ‘♪♪동해 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배운 아이는 누구였다.
연년생 고모 둘은 주말마다 잔디밭 잡초 뽑아 부자 되기를 소망했다. 한 개에 오십 원, 할아버지가 셈하기 좋게 열 개씩 조르르 진열해, 맞돈을 받고는 좋아라! 강중강중 튀어 오르기도 했다. 값이 너무 싸다며 제 오라비가 부추기는 바람에 곱절인 백 원으로 올라갔지만, 할아비 입꼬리는 여전히 위로 향해 있었다. 반짝이는 전설, 증조 할아비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까르르, 꼬맹이들의 웃음소리가 집 뒤 정발산에 메아리치지 않을까.
야무진 꿈은 계속되었다. 고향 대문중 선산에다 오십 평의 가족 묘원을 조성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윗대 어른들의 산소를 그리로 옮기고, 우리 가족 모두와 앞으로 태어날 증손자와 그 증손자의 증손자까지 함께할 수 있는 묘원으로 다듬었다. 멋진 도래솔을 배치하고 뒤쪽 둔덕에는 영산홍도 심었다.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현대판 묘답(墓畓), 셋돈이 나오는 상가도 장만했다. 하지만 모두가 허탕, 성묘할 자손이 없는데 그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돌보는 이 없는 묵묘, 잡초더미에 싸인 스산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해야 할까. 손자 부부들도 당연히 저희 부모들처럼 순풍순풍 아이 낳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균 출산율이 0.78 명으로 떨어졌다는 뉴스가 넘쳐나도 강 건너 불, 우리 집과는 상관없는 일인 줄만 알았다. 이리될 줄 알았으면 걔네들 중고생일 때 오늘처럼 미리 증손주 타령했으면 사태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저희 아빠 때는 ‘너무 부자거나 장관, 국회의원처럼 고위직에 있는 또는 있던 분들의 딸과는 사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라는 내 당부가 그대로 받아들여져 흡족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던가.
와중에도 한 가닥 위안이 되는 소식이 있다. 두 달 후 결혼하는 맏손녀가 시댁 어른들에게 ‘저희 아이를 갖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지 않는가. 맏며느리로 올 아가씨의 그런 선언은 기쁨 충만한 복음(福音)이 아니었을까. 그 어떤 금은보화나 억대의 지참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선물일 것이다. 나 또한 외증손을 안아 보게 생겼으니 첫 번째 버킷리스트를 성취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아이들이 외갓집 산소를 돌보리라 기대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허방을 짚은 사람의 기도가 더 간절하다고 한다. 매일같이 새벽 미사를 통해 마음을 다한 기도를 올린다. 그분이라면 내 야무진 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2023년 8월 미공개 신작)
첫댓글 회장님과 같은 고민입니다.
손자 둘이 장가는 갔는데 손주얘기를 하면 씨익 웃고 자리를 피합니다.
홍경희 선생님,
공감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