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
문명랑
새벽 세 시 하고도 오분이 지났다
어제는 분명 지났고
오늘은 아직인 듯한 새벽 세 시
깨어있지만 깨어있지 않은
급히 서둘러 떠난 누우떼의 빈자리
발가벗겨진 그림자만 쫓는
흰머리독수리처럼
마른 영혼은 오늘도 잠들지 못한다
열어 둔 창틈 사이로
뻣속까지 저며오는 오한 같은 그리움에
붉은 서러움이 끝내
석류처럼 터지고 만다
운명이라고 우겨온 그리움이
막다른 골목 끝에서 빈 눈꺼풀로
주억거리는 곪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미 내린 빗물을 다시 맞을 수 없듯이
새벽 세 시도 이미 지나서
문명랑 시인의 시, 「새벽 세 시」를 읽습니다. ‘새벽 세 시’라는 시간은 “어제는 분명 지났고/오늘은 아직인 듯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깨어있지만 깨어있지 않은” 시간이기도 하지요. 참으로 어정쩡한 시간입니다. 한번 깨어난 잠은 쉬 오지도 않지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기 십상입니다. 시인은 그런 생각에 젖어 잠들지 못하는 자신을 “급히 서둘러 떠난 누우떼의 빈자리/발가벗겨진 그림자만 쫓는”, 즉 먹이를 쫓아 왔지만 이미 누우떼는 떠나버린 그래서 ‘발가벗겨진 그림자’만 쫓는 ‘흰머리독수리’에 비유했습니다. 참 멋진 표현입니다. 그러다가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어 둔 창틈 사이로/뻣속까지 저며오는 오한 같은 그리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어쩌면 시인이 ‘새벽 세 시’에 깨어난 것은 ‘오한 같은 그리움’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움’이 가져오는 “붉은 서러움이 끝내/석류처럼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석류처럼 터지고”라는 비유가 인상적이네요. ‘그리움’이 ‘서러움’이 되고 그 ‘서러움’이 ‘석류처럼’으로 비유되어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리움’은 “주억거리는 곪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석류처럼 터진 그리움’이 ‘곪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시각적 이미지에서 청각적 이미지로 옮겨 왔습니다. 상승하는 감정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공감의 폭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 “이미 내린 빗물을 다시 맞을 수 없듯이/새벽 세 시도 이미 지나서”로 끝내고 있습니다. 생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벽 세 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지요. ‘새벽 세 시도 이미 지나서’ ‘그리움’을 잊고 있었던 ‘새벽 세 시’ 이전으로 돌아가 일상적인 자신을 회복할 수 없음을 생략하였습니다.
시인은 그날 밤 ‘그리움’으로 꼬박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문명랑 시인의 시, 「새벽 세 시」는 시인이 구사하고 있는 참신한 표현으로 시적 감동을 더욱 깊게 합니다.
첫댓글 교수님
감사합니다.
잘 감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리한 그리움 아리한 아픔이
글에서 눈을 못 떼게 하네요
새벽 세시의 느낌이 있네요.
그리움은 천형이다
새벽 3시는
이빨 몇 개 빼놓고 간 것 같은 여자도
생각나는 시간이다
새벽 세 시 오 분,
젊을 때는 자주 깨어있는 시간이었으나
이제는 깨어있기도 깨어있지 않기도 하는 때가 더 자주 있는 시간입니다.
쉽지 않은 시간의 삶입니다.
지금은 11시 30분 억수 같이 내리는 장맛비에 잠 못 이루는 밤입니다.
곧 새벽 3시로 갈 가능성이 많은 밤이기도 합니다
이 순간 딱 맞는 시를 감상합니다.
교수님 시평을 읽고서 한층 더 공감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역지사지는 말만 존재합니다
당사자의 현실 고통은
어디 교과서에 나오는
명사도 형용사도 아닙니다
오직 처철한 본인의 아픔 이니까요
아파요 힘들어요
얘기 들어 줄 사람
얘기 하고픈 시와 함께
고즈넉히 승화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