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인민군 초병
서민웅
금강산을 다녀온 지 이십 년이 되어 간다. 처음 북한 땅을 밟아본 기회였다. 밤새워 강원도 고성 남측 대기소에 도착했다. 버스에 시달려 지쳐 있는데 안내원이 버스에 올랐다. 한 사람씩 주민등록증을 대조하면서 금강산을 왕복할 수 있는 증명서가 든 ‘목걸이’를 나눠 주었다.
안내원은 주의사항을 말했다. 군사분계선(MDL)을 통과하면 버스가 멈춘다. 바로 인민군 초병이 승차해서 인원이 맞는지 점검할 것이다. 그때 인민군이 옆을 지나가도 질문하거나 시비 걸지 마라. 얼마 전에 한 관광객이 초병에게 허리에 찬 권총에 실탄이 들었는지 물었다. 그 결과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일행이 탄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또 버스의 커튼은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항상 열어 둬라. 차창을 통하여 사진 찍지 마라. 사진 찍다가 보초병에게 발각되면 카메라를 압수당하고 아예 금강산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인민군과의 관계가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할 사항이었다.
나는 그때로부터 40년 전, 이미 인민군과 마주친 적이 있다. 임진강 건너 민통선 지역에 있던 미군 수색부대에서 카투사 정찰병으로 근무할 때였다. 그 부대는 판문점 인근 비무장지대(DMZ)의 정찰을 담당했다. 밤에 부대에서 보초 서면서 서울 쪽 하늘을 바라보면 희뿌옇게 보였다. 개성 쪽 최전방 서부전선에서 서울이 너무 가까워서 새삼 놀랐다. 그렇게 가까운데도 전혀 전쟁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수도권에만 2천만 명이 모여 산다. 그런 상황에 당혹감을 느꼈다.
몇 달이 지난 그해 겨울, 처음으로 군사분계선 순찰 명령이 났다. 장단 지방 비무장지대의 추위는 임진강 강바람에 코털이 얼어 콕콕 찌를 정도로 심했다.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추위였다. 강추위에 대비하여 야전 점퍼는 물론 파카까지 내피를 모두 껴입고 털모자도 눌러썼다. 군화 위에 물이 새지 않도록 덧신까지 신고 순찰을 나섰다.
처음으로 남방한계선(SDL)을 넘어 군사분계선으로 지프를 타고 달리면서 긴장감이 점점 목을 조여 왔다. 임진강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군사분계선, 4미터 폭으로 양쪽에 드문드문 철주를 박고 가시철사를 아래위로 한 줄씩 늘여 놓은 게 전부였다. 아, 이 하찮은 것이 서해에서 동해까지 남북의 허리를 두 동강 내고 있다니!
철주를 세워 놓은 사이로 국군은 물론 인민군도 순찰한다. 그곳이 논틀밭틀이거나 개울 또는 산등성이거나 순찰병의 구둣발에 밟혀 모두 길로 변해 버렸다. 미군과 한 조로 다섯 명이 순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오는 인민군을 발견했다. 마음속으로 인민군과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던 바람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왜 그들은 우리가 순찰하는 시간에 맞춰 마중 나오듯 순찰을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인민군 순찰병은 소총을 어깨에 멘 채 아무 거리낌 없이 유유히 걸어왔다. 만일 저들이 총을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움직이는 낌새를 채면 나도 M-14 소총으로 먼저 대응해야 했다. 인민군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에 비례해 손에 쥔 소총을 더욱 힘주어 움켜쥐었다. 손바닥은 긴장감으로 땀이 배어났다.
인민군은 미군에게 영어로 말까지 걸었다.
“하우 두 유 두?(How do you do?)”
순찰조 중간에 걷고 있는 나에게도 한마디했다.
“얘기 좀 하다 갑시다.”
우리 조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서로 옆을 지나쳐서 뒤쪽에서 걷게 되었을 때, 뒤에서 총을 쏠지도 몰라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저희끼리 희희낙락하며 멀어져 갔다. 그들이 멀어진 후에야 비로소 긴장의 끈을 놓았다.
그때까지 나는 인민군은 해진 군복이나 입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런색 깨끗한 사지 정장에 외투도 입지 않은 산뜻한 차림이었다. 겨울 칼바람에 춥지도 않은지? 뿐만 아니라 얼굴도 어딘가 다르게 생겼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모자와 군복만 다를 뿐, 얼굴이 같았다. 그들은 적이면서 동포였다.
그 후 금강산에 갈 때 인민군 초병을 다시 만난 것이다. 초병 한 사람은 문 입구에 서 있고, 다른 사람은 통로를 지나면서 인원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탈 때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없이 내려갔다. 안내인이 철저히 주의를 시켜서인지 초병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말을 하는 동포인 그들과 대면하면서도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남쪽 관광객, 그렇게 금강산을 보러 가야만 하는 게 바로 우리 민족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40년 전에 만났던 인민군에 비해 군복이 초라하고 얼굴은 더 그을었으며 피곤한 기색이었다. 자식 또래의 저 초병들은 매일 남한 관광객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초병이 버스를 내려간 후에야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초병들이 안됐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안됐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심전심이 아닐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지?
금강산을 한쪽에선 돈벌이 수단으로, 다른 한쪽에선 관광 목적으로 왕래했다. 통제 속에서 최고의 명산을 찾는다는 것, 그것만으로 분단된 민족의 응어리를 풀어줄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금강산 관광이 얼어붙은 동족의 가슴을 조금이라도 녹여주는 훈풍이 되기를 바랐다.
다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금강산 관광마저 꽁꽁 막혀 인민군 초병을 볼 기회조차 사라졌다. 70년 전, 국토의 중간에 금을 그은 지 두 세대를 넘어섰다. 인위적으로 동족의 가슴에 칼로 그은 군사분계선은 아직도 그대로다. 비무장지대에 인민군이 판 침투용 땅굴은 관광 상품으로 바뀌었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짐승들의 자유를 그리는 그 한은 언제, 누가, 어떻게 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