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뒤에
벽이 비었다. 작은 액자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늦가을 들녘처럼 텅 비어 버렸다. 덩달아 그곳에 숨겨두었던 말과 다시 꺼내 새겨야 할 것도 사라졌다. 절제하고 남은 내 감정의 찌꺼기와 차마 다 하지 못하고 덜어 두었던 기억의 조각들도 함께 비워졌다. 더께 진 세월의 낡은 흔적만 남았다. 연심(戀心)이 북받친다.
그림 액자가 떨어져 부서졌다. 한 점 소품으로 오랫동안 벽에 걸려있던 액자였다. 내 인생의 가을을 암시하는 듯한 그림은, 바라보는 내 눈빛 언어에 지긋이 반응하며 무심한 듯 받아주었다. 세상을 사랑해도 될까, 이렇게 건조하고 위태롭게 살아도 될까 묻다가 지쳤을 때 만난 그림이라 애착이 더했다. 소스라치게 놀랐던 지난 지진에도 무사하더니 못을 물고 지탱하던 끈이 그만 힘에 부쳐 놓아버린 모양이다. 아니다. 어쩌면 숨겨둔 것이 너무 많아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거나, 더는 받아들일 심려의 여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떨어지면서 생긴 시퍼런 생채기에 마음이 할퀴듯 아렸다.
그런 것들이 있다. 단번의 눈에 박히는 강렬한 표피를 가져 마술에 걸린 듯, 넋을 빼앗겨 버리는 것들이다. 그 그림이 그랬다. 마른 덩굴과 늙은 소나무, 작은 다리 밑으로 흐르는 손이 시릴 듯 맑은 물, 저만치 외딴 마을 인가에서 고즈넉하게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그 위로 점점이 나르는 까마귀 떼, 건조한 듯 스산함이 물씬 밴 늦가을 저녁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었다. 수묵의 간결함과 지극히 절제된 채색이 어두운 듯하지만 탁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서늘한 여백으로 완성된 그림은 장애가 있는 지인이 그린 사연 있는 그림이었다.
주로 아이들과 손님이 기거하는 이 층 계단 초입, 일 층 부엌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주하는 그쯤 어디에 걸려있었다. 연회색 벽지와 묵의 농담이 절묘하게 어울렸던 그림은 볼 때마다 내게 말을 건네오는 듯 신비로웠다. 때론 오랫동안 못 만났던 그리운 이들의 맞잡은 손처럼 따뜻하거나 안온하기도, 평생 그늘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의 철없는 농담처럼 해맑고 경쾌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침침했던 눈에서 무언가 걷히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도 했다. 눈이 먼저 가 마음 부르는 편안한 그림이었다.
나는 그 그림 액자에 많은 걸 숨겨두었다. 내 마음 숨기는 은밀한 곳 하나쯤 가지고 싶었을 때였고,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투쟁 같은 생각이 들 때 마주친 곳이었다. 대부분 더는 마음에 담아두면 안 될 일과 차마 다 하지 못한 말들이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부모로 살면서 넘어야 했던 숱한 감정의 파고들. 때론 오해로 선입견과 편견을 낳고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판단력이 흐트러져 상황을 그르칠까 봐, 꿀꺽 삼켰던 그 한마디도 있었다. 그뿐일까. 가족은 내 존재의 근원인 동시에 굴레였기에 시소게임 같은 삶의 굴곡을 안으로 삭이며, 본분에 충실하려던 바램과 염원의 흔적도 있었다. 고통스러운 인생의 혹한기에 맞은 극도의 절망감,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했을 때의 통금 같은 외로움도 호요 바람과 함께 넣어 두었다.
백년 동구 나무처럼 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 여겼던 액자가 사라진 뒤, 희한하게도 내쉬는 날숨이 편해졌다. 그 생경한 경험은 들숨만큼 날숨으로 내놓지 못한 심한 체증의 증거였다. 그제야 포화상태인 내 안의 것들로 숨이 찼다는 걸 알았다. 들숨이 나에게 주어진 숨이고, 날숨은 나에게 맡겨진 숨이라면 그 맡겨진 날숨에 지독히 인색했던 삶이었다. 쉽게 지치고, 불안하고 두려웠던 그것들의 근원은 끝없는 기대와 집착이었음을 비워진 뒤에야 알았으니 회한이 밀려온다.
서향(西向) 창으로 들어온 노을이 빈 벽에 너그럽게 물든다. 떠난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손바닥의 먼지가 전한다. ‘남겨두는 마음도 집착이라고. 그저 세상 변하는 빛에 편승해 함께 물들어가면 될 일이라고.’ 온화한 권유 같지만, 뒤통수를 후려치는 질타였다.
열리면 닫히는 것이 문의 속성이듯, 차면 비워지는 게 자연의 섭리가 아니던가. 이토록 사소하고 위대한 이치라니. 이제는 슬금슬금 바람 빠지는 나이다. 거두어들이고 갈무리할 것도 없는 저무는 인생이다. 떨어지면서 액자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뭐에 그리 숨겨두고 꺼내 보여줄 것에 연연하고 젠체하였느냐고. 애면글면 품었던 그 모든 것도 남은 저 흐릿한 무채색의 흔적보다 못한 것이라고.’ 세월의 나이테가 굵어진 탓일까. 한사코 헤집고 나온 속내를 들켜버린 뒤, 밤의 어둠이 새벽의 어둠과 분명 다르다는 걸 상기한다.
도시의 밤이 비었다. 동물들이 떠난 황량한 빈 숲 같다. 오늘 하루도 삶에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흐름에 동승하여 사라지는 중이다. 이렇듯 빈 뒤, 마음이 더 부요(富饒)해지는 것은 늦가을 부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 서걱대는 마른 수숫대만 남은 빈들이 문제라는 걸 또 깨닫는다. 하현달이 하얗게 비어 가고 있다.
첫댓글 빈 자리 남기고 떠나버린 그림이, 제 눈으로 본 둣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이 작품은 그 그림을 글로 풀어낸 것 같아요.
모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