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농 52회. 졸업 52주년 해에 회상한 추억
진주농림고등학교 농업과 2조 반창회에 오늘 처음 참석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동창회에는 참석해 왔는데 유독 고등학교 동창회는 회피해 왔던 것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나 스스로의 열등감 때문이었던 것이다.
진주농림고등학교 출신들은 전통적으로 높은 기개(氣槪)와 기상(氣像)을 선배들로부터 전수 받고 또 몸소 익혀 졸업을 한다. 그래서 어느 분야로 진출하든지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용의 꼬리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일찍 기관장의 반열에 오르고, 또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호기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씀씀이의 배포가 크다. 그런데 비해 교원은 승진의 기회도 늦고 경제적으로 그것을 감당하기가 여의치 않아 동참하는데 부담을 느껴 스스로 참여를 꺼리게 되었던 것이다.
퇴직 후에 쌍백회에서 만난 김영술 회원이 반창회의 동향을 이야기 하면서 함께 하자고 여러 차례 권유를 해도 뒤늦게 참여하는 것이 민망스러워 고사해왔던 것이다.
나의 마음을 흔든 동기(動機)는 그전 농협중앙회 진주지부 지점장을 역임했던 최윤명 동기다. 지난 해 우연한 기회에 만났는데 반창회 동참을 권유하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생각해 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참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후 여러 차례 문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 내가 동참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친구가 몇 차례나 문자를 보내며 설득하는데 그것마저 외면한다면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향교에서 같이 공부하는 明甫 김영술 동기에게 “반창회를 한번 소집해 달라 그러면 내가 저녁을 한번 사겠다.”고 했더니 오늘 소집한 것이다.
나는 약속시간보다 너무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을 했다. 그래서 강변을 좀 거닐다가 20분 전쯤 왔더니 회장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동기 명단을 주기에 살펴보았더니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몇 년 전에 가끔 만났던 친구들이다. 공직 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사업을 하는 친구들은 사업 역량을 키웠던 쟁쟁한 인사들이다. 지금도 취미활동을 하며 노년을 역동감이 있게 살고 있는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신중년층(Active Senior)인 것이다.
역시 만남은 좋은 것이다. 교사 초년시절 같이 근무했던 친구, 안타깝게도 고인이 된 나의 초·중학교 여자 동기 남편이었던 사업에 성공한 친구, 나의 큰 딸과 고등학교 때 제일 가깝게 지냈던 시청 과장 출신의 현 국궁회장 친구, 고향 이웃 마을에 살면서 늦게 색소폰을 배워 봉사 활동을 하는 친구, 시청과장 출신이면서 근무당시 시민들로부터 존경 받았던 친구, 평생 동안 교직에 종사하며 학문에 매진해온 해박한 친구, 산청의 터주 대감으로 있으면서 오가는 친구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교감하는 친구, 나의 홈페이지를 나 보다 더 열심히 보아 우리 집 자녀의 이름과 하는 일을 꿰고 있는 친구, 정말 52년 만에 처음 만난 육상 선수였던 친구 모두 포근하고 따뜻했다.
나는 40대 초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진 동창 모임 중에 초등학교와 대학교만 남겨두고 정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퇴직 후에 중학교 동창회에 나갔고, 이어 오늘 고등학교 동창 모임도 회복시킨 것이다. 이젠 동창회 모임의 체계를 예전과 같이 완성시켰다.
공무원의 신분으로 일생을 살아 갈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지 않고는 가족을 부양하면서 살아가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힘들었다. 과거 공무원의 보수 수준은 국영기업체 보수의 60%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대신 연금 제도를 운영하여 퇴직 후 노후의 삶을 보장해 준 것이다. 나와 같이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혜택이 없는 것이다. 그것에 만족하면서 연금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의 의지대로 살아가니 그것보다 좋을 수가 없다. 사업을 하여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노후에 일정한 수입이 없으면 자산을 처분하여 쓸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인생의 삶의 성공 여부는 노년의 삶이 좌우를 하는 법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교직을 선택했던 것이 무척 다행이다.
며칠 전에 진주 삼락회 5월 월회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날 식대는 참석회원들에게 10,000원 씩 갹출(醵出)을 하여 점심을 먹는 것이 상례인데 그날은 삼락회원중의 옛 제자 두 분이 와서 스승과 같이 모임을 갖는 회원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미 전에도 몇 차례 그런 후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제자들은 그분 자녀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그분 자녀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친구들이 자기 아버지회원들을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미국에 거주하는 자녀가 자기의 친구들에게 돈을 보내 자기를 대신하여 대접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 돈은 다음에 점심을 사도록 하고 오늘의 점심은 참석한 친구들이 또 부담을 하고 돌아갔다. 접대를 한 사람도 대접을 받은 사람도 따뜻한 마음의 교집합과 여집합이 융해되어 되살아났다.
오늘 반창회에 갔더니 동창의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동창의 며느리는 어느 중학교 서무과장인데 며칠 전에 시아버지 등산 멤버를 초청하여 점심을 대접하더라는 것이다. 그 기특한 마음에 감탄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오늘 동창회 자리의 메뉴로 오르게 된 것이다. 돈의 금액이 많고 적음을 떠나 그런 생각을 한 대견함과 사례 깊음을 칭송한 자리가 되기도 한 것이다.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한 세대는 고마움도 모르는 법.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세대는 가끔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지만 풍족함 속에서 성장한 세대는 자기만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돈을 지혜롭게 쓰는 사람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증명한 사례들이다. 나의 자녀들도 여러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는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생각이다.
아무튼 좋은 시간이었다. 헤어지고 돌아와서 오늘 만났던 친구 이름을 마음속으로 다시 되뇌어 본다. 金榮述, 崔潤明, 李丁煥, 梁在源, 金德祚, 成煥烈, 鄭金鳳, 吳容圭, 曺在日, 金相珉
우리의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충섭 선생님은 나의 중학교 국어 담당 선생님이셨는데 고등학교 때에 또 다시 만난 것이다. 내가 교대로 진학한다고 하니 한사코 말리셨던 분이다. 부산 교육대학교에서 퇴직을 하셨는데 연극 부분에 있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셨다. 부산 교육대학교 졸업생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선생님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선생님의 열정을 모두 존경하고 있더라.
퇴직 후에 양산 웅상에 살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양산에 근무할 때 알았다. 명절 때와 스승의 날에는 잊지 않고 조그마한 선물을 사서 찾아뵈었다. 특히 스승의 날에는 나의 집사람과 함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축하 꽃바구니 하나 화분 하나도 소중히 여기셨다.
자녀들도 모두 훌륭하게 잘 기르셨다. 그런데도 사모님께서 추어탕 장사를 하시는 것이었다. 전통 추어탕 기능 보유자이시다. 사모님께서 사업을 접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시는데 감동적이었다. 연세 많으신 종업원 세분을 쓰시는데 자기가 그 업을 접으면 그분들의 생계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그 연세에도 하는 수 없이 업을 계속하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양산에 근무할 때 입춘이 되면 손수 입춘 절 시를 지어 나에게 편지로 보내 주시면서 격려하시곤 하셨다. 퇴직 후에도 몇 차례 더 찾아 갔더니 손수 정리를 해 주시는 것이었다. 너는 나에 대한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너도 이젠 나이가 들었다. 이젠 네가 찾아오면 내가 더 불편하다. 이렇게 정리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퇴직 때 발간하신 자서전을 나에게 한권 주시는 것이었다. 그 자서전에는 내가 쓴 글도 수록되어 있다. 제자의 글 첫머리에 소개되어 있었다.
졸업 앨범을 찾아내어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영상을 만들었다. 같이 올려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