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옷이 마음에 들어 사지만
몇 번 안 입는 옷들이 있다.
어딘가 여행을 갈 때면 옷을 사고 싶은데
그 심정이 뭔지 몰라,
문제에 답은 못주면서 여행가니까 옷 삽시다. 지인과 함께 쇼핑을 하기도 한다.
저 하얀색 셔츠도 그렇게 여행갈 때 산 옷이다.
아 오월에 이스라엘 갈 때 샀군.
여행가서 한 번도 안 입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더워져서 못 입었다.
칠부고 하얀색이지만 천이 좀 두껍거든
며칠 전 보니 칼라 셔츠가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아침에 벼르고 벼르다가 아들래미 혼자 쓰는 화장실 청소를 한 다음.
옷이 생각나 고무장갑 낀 손으로 옥시크린에 담궜다.
별로 안 좋아져서 코튼 울 세탁 세제를 발랐다. 그래도 안 좋아져서 락스를 두어 방울 부었더니 세상에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하네.
그제야 언젠가도 한번 이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울 세제라 화학약품....일게고 락스도 그러하니
두 개가 부딪혀버린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함께 한 파국이 붉은 빛으로 남았다.
사람들 사이의 얼룩도 생각이 났다.
다시 칼라에 들인 물을 헹구고 빨래비누를 가득 칠해서 락스에 담궜다.
조금 옅어지긴 한데 핑크색으로 남아있다. 칼라를 떼어내면 괜찮을까?
아니면 스카프로 가리고 입어야 하나,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옷에 관심이 많다.
미니멀 라이프를 아주 많이 생각하지만 옷은 아니다.
보자기 하나로 세수 수건도 하고 머리 스카프도 하고 치마로 둘러 입기도 한다는
한비야의 여행차림에 놀란 것도 이젠 아주 오래전 일인데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한다하여 그 생각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나는 외로울 준비가 되면
그게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면 그렇게 될까?
자연 속에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사람이 없어도 좋고 문화나 예술과도 멀어져서
자연 만으로 충분해지는 그런 삶.
근데 그런 시절이 올까? 칠십 되면? 75살 쯤 되면/ 팔십 정도 되면 너무 늙어 시골로의 낙향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러니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할 것이다.
거기 까지 생각하면서도 쉬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혼자라면 조금 더 달라질까? 핑계거리 장가안간 아들과 별로 시골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있으니 어우렁 더우렁이다. 혼자 남게 되면 아마 시골이 무서워서 못갈 것이다.
나의 로망은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주 단촐한 삶. 살림도 거의 없고 조금 적게 먹고 자연만으로 작은 풀이던지 꽃
이든지 나무만으로도 충일한 삶의 시간인데.....
그저 이렇게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별로 특별한 일도 없이
백로 시에는 흰 이슬을 생각하고
한로 시에는 찬이슬을 생각하며
가을이 깊어서 서리가 오겠네. 상강을 기억하며 시절 가리, 가을 가리 그리고 겨울 오리.
세월을 봐도 시간은 흐르고
시간은 잘 보이지 않지만 세월은 흘러간다. 갔다. 그리고 갈 것이다.
무엇을 해야 충일할까, 충일한 시간에는 의미와 까치가 공존하는 걸까?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지 않게 될까?
쟈크 데리다는 해체를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의 행위가 해체라는 것,
가령 그는 더블 리딩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퍼스트 리딩은 작가의 의도나 책이 품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전형적인 독서를 의미하고
세컨드 리딩은 글이나 저자 그리고 독서자가 함께 쌓아올린 그 독서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 다시 읽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칸트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처음 읽는 것처럼 읽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은 우리 삶의 여러 가지를 변주해낸다.
해체가 사랑이라는 것은 해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하에서 가능한 일이다.
부수거나 허무는 것이 아니라 부수거나 허문 뒤에 도래할
새로운 것들에 대한 열린 자세를 의미한다.
억압하거나 한계 짓지 않으며 안다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하는 자세!
그런 자세가 해체이며 그것이 또한 해체라서 사랑! 이라는 것이다.
로맨틱함이나 낭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낭만 속에 로맨틱함 뒤에 당연히 어린 어두운 그림자에 눈을 감는 태도이기 때문이라는
그녀의 말을 나는 매우 공감했다.
사실 새컨드 리딩은 새로운 사조나 철학이 아니라 우리 모두 지성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이미 우리 삶에 배어있는 독서법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미 그 책 제목만으로도 그의 더블 리딩을 느끼게 한다.
모든 기억은 이미 더블 리딩이다. -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문자해독에만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그린 새로운 세상 앞에서 우리는 나의 삶을 읽으며 나의 시선을 보게 된다.
나만의 시선 독법이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퍼스트 리딩이 끝나기도 전 이미 우리는 더블 리딩을 시작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래도 보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보는 것은 생각없이도 보는 것을 말함인데
이즈음 길가다가 자주 분꽃을 본다. 분꽃은 정말 얼마나 고운지 사랑스러운지 어여쁜지
꽃만 어여쁜게 아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꽃이 아니라 이파리도 자주 보며 어여쁘네 생각하는 사람인데 기실 이런 것도 조금 어줍짢은 생각이기도 하다.
왜냐면 사람은 단순하기도 해야 하니까
이파리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극히 자명한 일이니까.
세상에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에서 꽃이 일곱 가지가 나왔다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참으로 놀라지 않았던가, 그렇구나, 꽃은 그냥 무조건 아름다웠구나.
네안데르탈인에게도 꽃이 아름다워 보였으니 곡식과 함께 꽃을 무덤 속에 넣어주었을 것이다. 모든 무덤 속 부장품들이 역사를 알 수 있게 하는 아이러니도 있다.
분꽃은 네시 꽃이다. 거기다 꼭 소박함이란 단어를 마침표처럼 적어야 하는 꽃이다.
누가 분꽃을 소박하다고 정해 놓은 걸까?
소박의 다른 말은 익숙과 흔함이다. 이게 얼마나 분꽃을 한정되게 만드는가,
그렇다고 소박하지 않다고 분꽃을 한정짓지 않는다고 하여 분꽃은 자유로울까?
(이런 식의 사유는 논리적,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제증상이다. 깊게 들어가지 못하니까 어디론가 방향 없이 날뛴다. 생각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분꽃이 피었다/내가 이 세상을/사랑한 바 없이/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저녁을 밝히고/나에게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 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오늘이 백로
나는 분꽃을 보았다.
내년 이맘때도 나는 분꽃에 대해 적을 것이다. 아니 매해 분꽃에 대해 써야지
그런데 저 시인 저녁을 이해시킨다는 말......그는 정말 분꽃을 통해 저녁이 이해 되었을까?
저녁을 무슨 저녁을? 시어로서는 참으로 멋지지만 그게 팩트(?)인지 멋인지......
그러나 분꽃이 뜰에 나왔다 말은 정말 좋다.
그 말은 마치 분꽃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럽고 소박하다..
그렇지 내게도 숱한 비애가 있다.
차안에서 에프엠을 들을 때 첼로 소리가 첼로 대신 마치 내 가슴의 현을 켜는 것처럼
싸아하게 다가올 때
그순간 비애가 나의 모든 것을 누르고 마치 분꽃이 뜰에 나온 것처럼
나인양 나설 때다.
첫댓글 정말이지,,,
푸님의 독서 스펙트럼은 끝이 없이 넓네요!
푸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마도 써드리딩까지 했지만
완독하진 못했죠! ㅎㅎ
매번 '스완의 집 쪽으로' 에서
마들렌의 기~인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지루함에,,
인내심의 한계가 와서~~^^ ㅋ ㅋ
결국은 완독하지 못한 책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주장
' 왜 인간은 존재하는것만을 사고 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고해야 한다!
구절이 떠오릅니다.
존재하는 것도 미쳐 사고하지 못하며
사는 존재,
책 읽기 좋은 계절,
그리고 여행하기 좋은 계절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네요!
허나 저는 여전히 삼실에서~~^^@@@
푸님의 여행기를 워너 비~~ 하면서,,ㅎㅎ
저두 잃어버린 시간을 상당히 두껍긴 하지만 한권으로 읽었어요
그러니 언젠가 다시 여섯권을 읽으려고 해요 시간이 많고 마음이 굉장히 한적할 때 말이죠
그래요 넘나 아름다은 시간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