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 장영석(베드로 클라베르)
우리말에서 '그리움'은 세상 그 어떤 단어보다도 아름다운 말이다. '그리움'은 그림, 글과 어원이 같다. 모두 '긁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긁는다는 것이 뾰족한 도구로 대상에 흔적을 새기는 행위라고 할 때, 활자의 형태로 긁는 것은 '글'로, 선이나 색을 화폭 위에 긁는 것은 '그림'이라는 말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속에 긁는 것은 '그리움'이 된다.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단어다. (김정운/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종종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의 공간들을 그리워하곤 한다. 가끔은 시간을 내어 그곳엘 간다. 거기에 거닐며 익숙한 공기에 흠뻑 취한다. 그렇지만 그때의 거기와 관계 맺는 건 지금은 변해버린 공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를 살았던 어린 내가 아니기에 묘한 단절감을 느낀다. 물론 동창이나 이웃을 만나거나, 공간에 묻은 흔적들을 음미하며 과거를 간접적으로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도 흔적도 공간을 떠난다.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 미련이라는 감정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깨끗이 잊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오는 게 미련이니까. 과거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일 수도 있고 과거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일 수도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과거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타난다.
성경에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는 그리움의 시가 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시편42,2) 이 시의 배경은 바빌론 유배 때인 것 같다. 작가는 포로로 잡혀가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 있는바, 과거 성전을 회상하고 하느님과 친교를 가졌던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시편 작가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팔레스티나 북부에 유배 중이었다. 성전에서 치러지는 장엄한 예절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불같은 희망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으로 용기를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해 본원적인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천상에서 죄를 짓고 이 땅에 태어난 영혼들로서 우리 영의 고향이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영적으로도 영원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본성이 있고, 동서고금의 시인들도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토로하거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은 많은 시를 남겼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고향이 본향이 하늘이라고, 성경을 통해 알려주셨고 고향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주신 것도 우리 영혼이 이 땅에서의 삶을 산후에 돌아갈 곳이 있기에 그런 마음을 심어주신 것이다.
지난날 아름다운 기억의 숲을 거닐며 추억의 꽃을 찾아 가슴에 담고 영혼의 고향 ‘천국을 그리며 주 찬미하리다. 우리도 천국을 그리며 주 찬미하리다.’ (성가 259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