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즈음에
서 영 희
가을이 오는 소리가 사뭇 요란하다. 바람과 더불어 많은 비를 몰고 왔다. 잠깐 편지를 쓰고 있는 사이 비바람이 몰아쳐 여러 곳이 침수되는 물난리가 났다 눈 깜작할 사이에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 해운대 마린시티엔 바닷물이 방파제를 넘어 아파트까지 밀려오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뉴스는 전한다.
난 그 소리를 정비소에서 차에 엔진오일을 갈면서 들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참 정직하게 비가 오네, 하고 있었는데 작은 나라 좁은 도시 안에서도 기후가 이렇듯 다르다니 새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오묘하고 신비롭다.
조물주의 힘인가 하고 무단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은 하늘이 높아져있다. 그렇구나, 어느새 가을이 왔구나. 하고보니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가고 있다. 가고 오고, 오고 가는 계절의 순환이 이렇게 요란스럽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시끄럽게 울던 매미도 울음을 그치고, 밤낮없이 부릉거려 악담이 절로 나오게 하던 우리 동네 폭주족들도 다 해산 하였나보다. 수시로 창을 넘나들던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들도 사라졌다. 소음이라고 일컬었던 모든 소리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오일을 갈고 돌아오는 길에 노포동 꽃 시장에 들러 봉오리만 맺은 국화화분을 두 개 샀다. 보도에 떨어진 은행잎도 몇 개 주어 왔다. 나의 가을맞이 준비인 셈이다. 한동안 매일 아침 국화에 물을 주면서 이 계절이 주는 여러 가지 색깔을 만끽할 것이다. 이것이 가을을 맞이하는 나의 작은 몸짓이다.
여름은 소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가을은 색깔이 세상을 지배한다. 짙푸르기만 하던 들판이 서서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모습, 노랗게 보도에 깔리는 은행잎, 붉게 물드는 단풍, 여름의 그 축축한 물기를 말리는 바람의 힘, 길게 그림자를 내려놓는 산을 보노라면 만상이 저 마다의 색을 갖고 있구나 싶어 참 경이롭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이 참 아름다워 오래 살고 싶어진다. 노인천국이란 세상에 그런 내 마음이 부끄러워 마음도 붉게 물들어간다. 여름이 시퍼렇게 날을 세운 계절이라면 가을은 분기를 가라앉혀 차분해진 계절이다.
청춘의 계절이 여름이라면 가을은 중년의 계절, 봄이 새큼 달콤한 겉절이 같은 계절이라면 가을은 잘 숙성된 포도주 같은 계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루를 절기로 나누면 봄은 아침이고, 낮은 여름이고 저녁은 가을이다. 시간으로 치면 해 넘어가고 붉은 잔영만 남은 박명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박명의 시간이란 젊은이의 미숙함도 노인의 주름살도 감춰지는 시간 꿈을 가진 자도 꿈을 접은 자도 느긋해지는 시간 이다.
가을이 온다. 출렁이던 내 감정을 가지런히 조율해주고 바깥으로 돌던 내 마음을 조금씩 안으로 모아 숙성시키는 계절, 나는 부패했는가, 발효되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계절, 한번쯤은 나를 돌아보며 온전히 나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계절이다.
좋은 계절은 아쉽게도 쉬이 지나갈 것이다. 낙엽 따라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빠르게 흘러 갈 것이다. 한번 가면 뒤돌아 흐를 줄 모르는 강물처럼, 우리네 시간도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가을이 가기 전에 어디론가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말고 떠나라고 말하고싶다. 노년의 시간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이만큼 가속도를 내며 달린다지 않던가. 때론 외로운 보헤미안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입새 떨어져 버린 나무들 사이를 걷노라면 살아온 날들이 조금씩 쓸쓸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 쓸쓸함에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차곡차곡 두께를 더하는 계절이다. 그리움과 쓸쓸함마저 사랑하게 하는 계절
아!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