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줏단지 모시듯
kch_35@hanmail.net.강철수
약속 시간 늦을세라 헐레벌떡 전철역에 닿았다. 어라! 교통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이 없지 않은가. 검표대 아래로 기어서 들어갈까도 생각했지만 다 늙은 나이에 차마 그 짓은 아니다 싶었다. ‘오금행 열차가 전 역을 출발하였습니다.’ 승차장에서 올라오는 낭랑한 목소리, 다급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저어 선생님, 제가 올해 팔십팔 세인데요, 전철 패스를 집에 두고 왔심더, 문 좀 열어 주이소.”
경로석에 앉아 가슴을 쳤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역무원이 어째서 선생님인가, 굳이 나이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을…. 고향 사투리가 왜 거기서 튀어나왔을까. 손주 녀석들이 그 꼴을 보았다면 ‘할아버지가 왜 저래?’,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하하거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노령들에게 신용카드 등이 들어있는 지갑과 핸드폰을 앗아간다면 사회와 온전히 단절된 감방생활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갑과 핸드폰을 신줏단지 모시듯 정성스레 받든다. 젊은이들처럼 엉덩이 쪽 뒷주머니에 넣는 불경스러운 짓은 어림도 없고 중요한 부위인 가슴팍 쪽에 모신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윗옷 호주머니를 쓸어 지갑과 핸드폰이 잘 모셔졌는지를 확인 또 확인한다. 그날 아침에는 무엇에 씌었던지 그 ‘반드시’를 놓쳐버린 것이다.
지갑과 핸드폰이 그리 융숭히 대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갑에는 통상 전철 패스 외에도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가 들어 있다. 주민증은 금융기관이나 관공서 등에서 본인 확인을 요청할 때 ‘틀림없는 나입니다.’, 얼굴과 함께 내미는 소중한 증표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통사정해도 문은 닫히고 만다.
신용카드는 ‘밥 나와라 뚝딱!’, ‘옷 나와라 뚝딱!’, 무소불위의 도깨비방망이에 버금가지 않을까. 뚝딱! 대신 쓱! 긁기만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등산조끼 걸치고 쓱! 친구와 순댓국 먹고 쓱! 편의점 칠백 원 음료 마시고도 쓱! 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어디 그뿐인가. 꼬질꼬질한 천 원짜리 지폐 만지지 않아서 좋고, 호주머니에서 짤랑거릴 동전 거스름 받을 일 없으니 더더욱 좋지 않은가.
핸드폰, 뭇사람들이 그 앞에 고개 숙여 경배하는 걸 보면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영검한지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핸드폰에는 전지전능, 모르는 게 없을뿐더러 못 하는 게 없는 신묘한 요정이 살고 있다. IT라는 이름의 그 요정은 알라딘의 그것처럼 거인도 아니고 밖으로 나다니지도 않지만, 주인의 명령은 깔축없이 잘도 이행한다.
대곡역을 지나면서 핸드폰을 펼쳤다. 손가락으로 콕콕, 요정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주 참외 3킬로그램, 캐나다산 돼지고기 항정살 1.5킬로그램, 내일 새벽 현관 앞 도착!’ ‘구매 완료!’ 요정의 쏜살처럼 빠른 일 처리, 흐렸던 마음이 조금씩 개고 있었다. 돌아서는 요정을 다시 불러세웠다. 콕콕, ‘방이동 셋째 손자며느리에게 생일 축하금 십만 원 그리고 프리미엄 마카롱 15,300원짜리!’ 대답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핸드폰을 접었다.
시원스럽게 달리는 열차, 눈을 감고 오늘 아침의 해프닝을 되짚어 본다. 식탁에 지갑을 놓고 그 위에다 선글라스를 얹어 놓았는데 급히 서두르느라 선글라스만 달랑 집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걸 집에 두고 왔으니 망정이지 길에서 잃어버렸다면 어쩔 뻔했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남의 주민증이나 신용카드로 별의별 나쁜 짓을 다 한다지 않는가.
그리 귀중한 지갑과 핸드폰을 정중히 모시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쌓인 나이가 태산이라 깜빡할 때가 적지 않다. 오늘 아침 낭패는 약과고 지난달에는 실로 간 떨어질 뻔한 일까지 벌어졌으니 말이다.
싱그러운 6월, 치악산 반그러니 계곡으로 내달렸다.
그곳 장원(莊園) 주인장의 초대였지만, 어릴 적 소풍처럼 설레었다. 이전에 보았던 미려한 경관이 눈앞에 어른거려 싱숭생숭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몸은 늙어도 어째 설렘은 그대로일까.
수십 년 만에 타보는 무궁화호 열차, 여행은 누구와 함께인가가 중요하다고 했던가. 매달 만나 합평도 하고 독서 토론도 하는 십여 명의 문우님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주전부리가 나눠지고 도란도란 담소가 꽃을 피웠다. 나란히 앉은 모지(母誌) 발행인인 L 회장, 내가 전임이라서인지 주고받는 얘기마다 공감대의 고소함이 흘러넘쳤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원주역에 내려 윗옷을 쓸어 지갑과 핸드폰이 잘 모셔져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헉! 핸드폰이 만져지지 않았다. 호주머니를 다시 만져보고 혹시나 해서 배낭도 열어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로 인해 벌어질 고약한 일들이 눈앞을 스쳤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왕 쏟아진 물, 나 때문에 즐거운 분위기에 금이 가면 안 되겠기에 일행들 모르게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우리 집 해결사인 셋째에게 연락하려고 L 회장에게서 전화를 빌렸다. 하, 이럴 수가!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다니…. 아내를 비롯한 식구들 모두의 전화번호도 깜깜절벽, 쓸데없는 단축 번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치를 챈 L 회장이 역무원에게 신고부터 해야 한다며 나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기차 속에 있을 내 전화에 신호를 보냈는데 다행히 누군가 응대했다. L 회장이 그걸 승무원에게 맡겨달라 했고 그분도 그러겠다고 선선히 답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역무원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대기업 CEO 출신인 L 회장은 어디서든 당당했다. 습득한 분이 승무원에게 맡긴다면 오후 5시 이전에 본 역에 도착할 것이니 그때 오시라고 했다. 그때면 우리 서울행 시간표와 딱 들어맞았다.
핸드폰은 얌전히 원주역에 와 있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 상위권으로 꼽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무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받아든 핸드폰, 요정의 무사를 확인키 위해 이번에는 콕콕 아닌 마이크, ‘지금 몇 시?’ ‘현재 시각은 5시 12분입니다.’ 의젓하고 중후한 목소리, 별고 없음을 알려주었다.
브와앙, 경적을 울리며 서울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윗옷을 쓸어 지갑과 핸드폰이 잘 모셔져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2023년 8월 미발표 신작)
첫댓글 강회장님, 추석은 물론 다복하게 보내셨지요?
이제는 글이 춤을 추는 경지(?)에 온 것 같은 느낌.
요정이 사는 손 안의 만능 치트키, 소중하게 모시고 그 에너지와 열정 다 발산하는
멋진 시간 사실 줄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11일 인사동에 오신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그때 뵙시다.
共感.!共感!저도 몇번이나.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숨바꼭질입니다.
언제나 내편, 홍경희 선생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