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시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 둘움, 불안감에 떨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어려운 사연을 지닌 사람을 만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면서 마음을 달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우리 동네 이장 김 씨는 참으로 가슴 무너질 사연을 품고 사는 분이다. 삼 년 전, 늦장가 들어 얻은 다섯 달 된 배 속 아이와 그토록 끔찍이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를 뺑소니차에 허망하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김 씨는 일 년 가까이 칩거로 일관해 왔다. 그러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시 들판에 나와 부지런히 땅을 파댔다. 그렇게 다시 기운을 차린 김 씨는 그 존재 자체가 뭇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희망이 되어 주었다. 동네에서 돌아오는 밤길에 나는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는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슬픔이 슬픔을 구원하는 것이로구나. 그런 깨달음이 그만 한정 없이 가슴에 왔던 것입니다.』
소금항아리, 생활성서 2000년 4월호
루카복음 24장 13절 이하에 언급된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도 인생의 도상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분이 자기 민족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철석같이 믿어 왔는데, 그분이 너무도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크나큰 실망과 좌절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던지 그들은 길을 가면서 한때 가슴 벅찼지만 이제는 깨어진 꿈과 희망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한참 길을 걷고 있을 때 나그네 한 사람이 그들 곁에 다가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냐고 묻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이 고심하던 문제들에 대해 성경 말씀을 들어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줍니다. 인생은 고통과는 떼어 놓을 수 없고 고통을 거쳐야 비로소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 성경에 예언된 구세주도 결국 이런 길을 걸어야 했다고 하나하나 짚어 줍니다. 낯선 나그네의 설명을 들으면서 제자들은 깨달음으로 머리가 환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삼십 리 길을 다 와서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그 나그네가 계속해서 길을 갈 기미를 보이자 제자들은 아쉬움 속에 그를 붙잡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나그네는 그들의 청에 응낙해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고, 그들은 그분과 함께 빵을 나눌 때 비로소 눈이 열려서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는 길을 떠날 때이 실망과 좌절을 털어 버리고 기쁨에 가득 차서 다른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고통을 안겨 주었던 도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스승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깨달음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인생의 도정 곳곳에서 뜻하지 않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면서 망연자실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견디기 어려워 하느님께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분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깨달음의 말씀을 준다면 주저앉은 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꽃>이란 제목의 이야기로 ‘왜’라는 질문에 답해 보려고 했습니다.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다. 교통사고로 저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남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으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오는 여름휴가 때 첫아들을 안고 고향 마을 바닷가를 찾자고 했던 남편의 말만 떠올랐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도대체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망스러웠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려고 하던 남편이었다. 다니던 성당에 발길을 뚝 끊었습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해산을 했다.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고향 마을 산자락에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포대기를 열어 남편이 잠든 무덤을 아기에게 보여 주었다. 푸른 파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아들을 얻은 기쁨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다. 그동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날들이 더 허망스러웠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왜 성당에 가지 않느냐?”
산에서 내려오자 시아버지는 그녀를 불렀다. 정이 넘치는, 햇살 같은 따스한 음성이었다.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어여쁜 아들을 줬는데도?”
“그래도 그래요.”
“아마, 그 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게다.”
시아버지가 한참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녀를 마당 앞 꽃밭으로 데리고 갔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남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던 꽃밭이었다. 꽃밭에는 장미와 달리아, 채송화와 도라지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여기에서 네가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 보거라.”
시아버지가 그녀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손에 들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방긋 미소를 띠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꺾어 천국을 장식하신다. 얘야, 이제는 너무 슬퍼하지 마라.”』
우리의 인생길은 험하고 가파른 산길에 견줄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힘들고 두렵고 불안할 때도 많지만,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기에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낙담과 체념 속에 주저앉은 엘리야가 먹고 힘내도록 음식과 물을 전해 준 천사, 두려움과 불안에 떨던 어린 처녀 마리아를 안심시켜 주었던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이 인생길 고비고비에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깨진 꿈을 안고 절망에 잠겨서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에게 깨우침의 말씀으로 힘과 용기를 갖도록 해 주신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서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인생길에서 지친 우리에게 힘을 주는 분이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분은 가족이나 친지의 모습으로, 때로는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계속 길을 가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을 통해 깨우침을 주십니다. 아울러 성체성사라는 영적 양식과 음료로써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길이 굽은 길, 험한 길, 가파른 순례의 길이라지만,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가신 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말씀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길동무가 되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갖고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인생은 고통과는 떼어 놓을 수 없고
고통을 거쳐야 비로소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
성경에 예언된 구세주도 결국 이런 길을
걸어야 했다고 하나하나 짚어 줍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