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일고발溪亭逸稿跋
유재순(劉載淳) 씨가 그 고조부의 《계정일고(溪亭逸稿)》를 간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이어서 책 뒤에 한 마디 말을 적어주기를 요구하였다.
대개 공의 저술은 다만 시문 약간 편이 있어서 거의 책의 목차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효성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뛰어난 행적이 많아 옛날의 왕상(王祥) 동소남(董召南)의 무리와 같았으니, 당시 고을과 도의 선비들이 관부에 거듭 정려를 청하였다. 비록 포상의 전례를 입지는 못하였지만 아래의 공론은 오히려 백 대에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또한 입언(立言)한 제가들이 한 목소리로 칭찬하여 전후의 기록을 아울러 일고 뒤에 붙였으니, 이는 곧 공의 효행록이다. 이미 이런 지극한 행실이 있으니 저 말단의 문예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또한 공이 군자가 되는 데에 해로울 것이 없다. 더구나 여력으로 이룬 문예가 질박하면서도 부화하지 않아 성정이 드러남을 볼 수 있으니, 또한 어찌 양이 적다고 해서 경시할 수 있겠는가?
아!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마는 효를 행하는 데 있어서 능한 이도 있고 능하지 못한 이도 있는 것은 인욕에 가려짐에 구애되어 떳떳한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니, 공 같은 이는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진정으로 저버리지 않아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잘 보존한 분일 것이다.
또 가만히 느낀 점이 있다. 공의 손자 만송(晩松) 공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의가 있었으니, 옛사람이 “충신을 효자의 집안에서 찾는다.”라고 한 말을 실로 징험해볼 수 있다.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이 뿌리가 있고 근원이 있음이 이러한 경우를 두고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성대한 시절에 이렇게 한 목소리로 포장(襃獎)하기를 청한 것도 실로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시속을 권장하는 바탕이 되는데, 하물며 지금은 천하가 혼란스러워서 기강이 사라지고 법도가 무너져 사람의 도리가 거의 사라져가는 때에 이 책이 간행되어 읽는 이가 경계하고 반성할 점을 안다면, 세상의 교화에 도움 되는 것이 어떻겠는가? 경모(景慕)하는 나머지에 마침내 이 글을 써서 자애로운 효손의 요청에 응한다.
왕상(王祥) : 진(晉) 나라 임치(臨淄) 사람, 자는 휴징(休徵)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를 섬기기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고기와 참새를 먹고 싶어하는 계모를 위하여 못의 얼음을 깨자 잉어가 뛰어나오고 참새가 집으로 날아든 일이 있다. 《晉書 卷33 王祥列傳》
동소남(董召南) : 당(唐)나라 때 안풍(安豊)에 살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한유(韓愈, 768∼824)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다.
양지(良知)와 양능(良能) : 양지는 저절로 아는 것, 양능은 저절로 능한 것을 말한다. 맹자가 이르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은 양능이고,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은 양지이다.[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만송(晩松) 공 :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항일운동가 유병헌(劉秉憲, 1842∼1918)을 말한다. 자는 주현(周顯), 호는 만송(晩松),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당시, 오적(五賊)을 성토하는 격문을 붙이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투옥 끝에 1918년 옥중에서 단식, 순국했다. 저서로는 《만송유고》가 있다.
영지(靈芝)와 예천(醴泉) : 훌륭한 자손이 나는 가문에 그 조상의 근본이 있음을 말한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