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
올여름도 어김없이 폭염으로 이글거린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에도 밥은 먹어야 움직이지 않겠는가. 점심을 먹으려고 오이지 하나를 꺼낸다. 푹 절은 배추처럼 더위로 축 처져 입맛을 잃은 내게는 꼬들꼬들한 오이지만큼 맛난 찬이 없다.
동글동글 썰어 탕기에 시원한 물을 붓고 그대로 담가 먹어도 좋지만, 물에 담갔다가 소금 물기를 꽉 짠 뒤 파, 마늘을 송송 썰어 넣고 고춧가루 조금 뿌리고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려 무쳐 먹으면 더 입맛이 돈다.
매년 여름 오이 반 접을 사들여 오이지를 담근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오이를 깨끗이 씻어 햇빛에 말린 장독에 넣는다. 소금물을 펄펄 끓여 뜨거운 채로 오이에 붓고 위로 뜨지 않도록 김칫돌로 눌러 주면 끝이다.
끓는 소금물을 온몸으로 삼킨 오이는 파릇한 젊은 시절을 순식간에 내어주고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된다. 며칠이 지나면 소금물 주변으로 하얀 골마지가 낀다. 오이를 씻을 때 상처 난 자리에 소금물이 스며들며 생기는 현상이라 한다. 순식간에 늙은 것도 억울한데 상처에 소금물까지 부었으니…. 너무 빨리 늙어버린 할머니의 한이 하얗게 피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쉽지 않은 며느리의 삶을 살았던 우리네 엄마의 엄마들이 피어 올린 골마지가 오이지의 짠맛을 더 숙성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일주일쯤 지나서 한 개를 꺼내어 쭉쭉 찢어 물을 부은 다음 식초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다진 파를 띄운다. 찬물에 밥 한 공기를 말아 오도독거리는 식감을 음미한다. 그 짭조름한 맛에 더위에 집 나간 내 입맛은 바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맛도 대물림되나 보다. 젊은이들 입에 잘 맞지 않을 음식인데 우리 딸들은 여름이면 오이지를 찾는다. 편식하지 않게 하려는 엄마의 불타는 열망은 오이지를 어떻게든 먹게끔 꼬드겼다. 내가 ‘오도독 먹자’며 ‘오도독오도독’ 소리를 내면 아이들은 재미있어 하며 식탁으로 모였다. 양념한 오이지를 수저 위에 얹어주면 ‘오도독오도독’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그 덕분인지 밥 안 먹는다고 투정을 하다가도 ‘오도독 무쳐놨는데’하고 말꼬리를 흐리면 ‘어~그래, 한 번 먹어 볼까?’ 하며 엄마를 위해 선심이라도 쓰듯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운다.
오이지는 잊고 있던 옛 추억도 불러온다. 중학교 때 내 짝꿍은 얼굴이 뽀얗고 귀티가 났다. 반듯한 이마 밑으로 적당한 숱의 반달형 눈썹, 한쪽 눈만 쌍꺼풀이 있는 눈, 부드러운 콧날에 이어진 작고 귀여운 입술 하며 동그란 얼굴로 귀엽고 예쁜 애였다. 점심시간이면 우리는 친구들과 빙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매미가 극성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모두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그 애의 반찬에 오이지가 길쭉하게 서너 쪽 놓여 있는 것이었다.
“너도 오이지 좋아해?”
놀라는 나를 보고 ‘응’이라 대답하며 눈웃음을 치던 그 아이. 평상시 그 애 도시락에는 장조림이나 소시지 계란말이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오이지 반찬은 정말 의외였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이지를 보고는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후로 그 아이와 나는 더욱 쫀득한 우정을 쌓았다.
그 아이가 결혼해서 미국에 이민 가던 날도 오이지 못 먹어 어떡하지 하고 너스레를 떨며 애써 이별의 슬픔을 뭉갰다. 매년 오이지를 담그며 한 번씩 친구를 꺼내 보지만 그 아이나 나나 사는 일에 묻혀 서로를 잊어갔다.
요즘은 먹을 것이 지천이다. 사시사철 채소든 과일이든 뭐든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맛있는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그럼에도 내 여름 입맛은 엄마가 재래식 방법으로 담근 오이지에 손이 간다. 더위에 지쳐 의욕마저 잃고 퀭한 눈을 하고 있다가도 찬물에 밥을 말아 손으로 쭉쭉 찢은 오이지 한 입 베어 물면 짜증 나던 더위가 금방 사라진다. 지쳐 늘어진 몸속 세포들도 오도독 오이지 한 입에 거짓말처럼 쫀쫀하게 수축돼 여름 한더위를 너끈히 견뎌낸다.
올여름에도 옛 방식대로 오이지를 담갔다. 밥을 물에 말아 한 술 입에 넣고 쪼글쪼글 절여진 오이지를 쭉 찢어 오도독 씹으면서 지나온 여름날들을 되돌아본다.
첫댓글 승희샘, 오이지처럼 탱글탱글 짭짜롬 맛난 글, 잘 읽었어요.
사실 '순수의 맹목' 준비했는데 벌써 작품이 올라와 좀 나중에 게재할께요.
좋은 책, 지금 승희샘 일 내고 있는 것 아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