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엄마와 악마 엄마
-박용철 ‘감정연습’
아이는 자신의 무력함과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엄마에 대한 의존성이 날로 커 갑니다. 엄마는 내 편이며, 항상 날 위해 주고 내가 위험할 때면 언제든지 구해 준다는 믿음이 아이를 안심시켜 줍니다. 무력함과 생존에 대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건 이런 선한 엄마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천사같은 엄마는 아이의 마음속에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표상으로부터 아이는 위로를 받고 안정을 찾습니다.
하지만 실제 엄마는 항상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너무 칭얼거린다며 짜증을 내기도 하고 엉덩이를 때리기도 합니다. 계속 놀고 싶은데도 잘 시간이라며 불을 끄고 강제로 재우려 합니다. 큰 병에 안 걸리게 한다는 핑계로 어디론가 데려가 바늘로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기저귀가 젖었는데도 몇 시간 동안 알아채지 못하고 아이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에 아이는 당황합니다. 혼란스러워집니다. 아이의 사고방식으로는 이런 행동들이 천사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는 인간에겐 선한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선한 것은 언제나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은 그저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흑백논리 그 자체입니다.
아이는 고민 끝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엄마의 표상을 만듭니다. 하나는 완전히 선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천사 엄마이며, 다른 하나는 완전히 악한 악마의 모습을 한 엄마입니다. 마치 다른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아이의 마음속에 입력됩니다.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가 있는 것이지요. 아이는 속으로 이렇게 느끼는 듯합니다.
'흥! 같은 얼굴로 다가와도 나는 다 알아, 두 명의 엄마가 있다는 걸. 지금 나에게 온 건 나쁜 엄마야!'
이런 마음의 작용을 심리학 용어로는 분열(splitting)이라고 합니다. 선한 엄마의 표상을 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원시적 방어기제입니다.
이런 분열의 방식은 그저 엄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는 자신의 마음에도 이런 잣대를 들이댑니다. 기분이 좋고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고,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고 엄마가 미울 때도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에게 두 가지 모드가 있다고 해석합니다. 전자는 착한 아이 모드가 될 테고, 후자는 나쁜 아이 모드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개의 인격으로 구분되어, 경우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지킬 박사를 하이드에게서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본질은 지킬 박사라고 믿으며, 하이드 같은 모습은 진짜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열은 어떻게 극복될까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화해를 해야 합니다. 선과 악이 하나의 존재로 통합돼야 하는 것입니다. 실은 같은 인격 안에 있는 요소들일 뿐이며, 누구에게나 선한 면과 악한 면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엄마의 태도가 이런 화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아이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나쁜 면을 엄마는 이해하고 그저 받아들여줍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분노를 표현하며 울거나 떼를 쓸 때도, 엄마의 젖꼭지를 깨물며 엄마에 대한 미움을 표현할 때도 엄마는 받아들여 줍니다. 잠시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만, 이내 곧 아이를 안아 주고 사랑해 줍니다. 아이는 자기의 나쁜 면까지 보듬어 주는 엄마를 느낍니다.
이런 엄마의 사랑을 접하며 비로소 아이도 자신의 악함을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나쁜 감정도 자기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알게 됩니다. 나쁜 생각을 하는 나도 착한 모습의 나도 실은 하나의 나임을 인정하고, 두 가지를 통합하고 조절하는 법을 터득해 갑니다.
이런 태도는 더욱 확장되어 마음속 나쁜 엄마와 착한 엄마도 통합시킵니다. 엄마가 나쁠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흑백논리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지킬 박사라는 온전히 선한 인물을 만들기 위해 하이드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가질 때도 있고 악한 마음이 들 때도 있으며, 순간적으로 비도덕적이고 공격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일을 잘할 때도 있지만 실수할 때도 있고 망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통합할 때 악한 마음을 조절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인간상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일단 자신이나 타인의 나쁜 점과 좋은 점을 통합하여 하나의 인격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칭찬과 혼냄을 잘 이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칭찬을 할 때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사람의 본질에 대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누군가 실수를 하면 “너는 왜 그러냐? 그 정도밖에 안 돼?"라고 하거나, 자신이 공부를 안 해서 시험에 떨어지면 "나는 원래 이 정도야. 나는 쓸모없어" 하는 식입니다. 또는 나쁜 생각이 들 때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는 나쁜 놈이야"라고 자신의 본질을 평가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실수를 하거나 나쁜 감정이 들 때 자신의 본질 자체가 나쁜 것처럼 인식됩니다. 자기 전체로 결점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칭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어떤 일을 잘 완수했을 때 “너는 원래 똑똑한 아이야"와 같이 본질에 해당하는 평가는 좋지 않습니다. 그런 평가는 '일을 잘 못하면 내 본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 놓기 때문입니다.
칭찬과 평가는 그 행위나 성과에 대해 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안 했다면, '미리 약속한 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야'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제대로 해놓지 못하고 넌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하는 식의 본질에 대한 비난은 안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인격에 유죄 선고를 하지 마세요. 시험을 잘 봤을 때도 '나는 원래 머리가 좋고 능력 있다'보다는 '이번에 열심히 공부한 것이 좋았고 칭찬받을 만하다' 하는 식이 좋습니다.
이렇듯 일은 잘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본질이 아닌 그때그때의 행위일 뿐이며, 자신의 본질이나 인격은 언제나 같다는 것을 알아 가야 합니다. 본질은 선과 악으로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문학작품은 갖가지 감정을 가진 인간의 내면세계를 성찰합니다. 또한 한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감정들 간의 갈등을 보여 주고, 그것이 통합되고 완성되어 가는 과정도 보여 줍니다. 그런 인물들과 동일시하며 우리 마음에서도 통합적인 사고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불쾌한 감정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고, 악한 마음 등도 받아들이고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억눌러 버리거나 부정해 버린 감정은 더 큰 재앙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202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