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획-캘리포니아> 100살의 이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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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유자 수필가
기사입력 2025-02-06 [17:06]
어머니 평생의 숨결이 배어있는 고가구 이층장. 백통 장식은 물론 그 장식을 붙이는 데 쓰인 새끼 손톱 길이보다도 짧은 못까지 장인의 손으로 두드려 만든 수제 장롱이다.
1906년생 어머니는 백수를 하고도 저세상에 가신 지 어언 20년이 흘렀다. 굴곡과 매듭 많은 근세사를 모두 감내하신 생애다. 한일합방의 치욕과 일제 강점기의 수난, 혼란속의 해방, 포화와 불길 속에서 생사를 넘나든 육이오 전쟁, 그 소용돌이 모두를 용케 어머니와 함께 겪어낸 이 장롱은 지금까지 건재하니 참 귀하다.
전쟁 후, 페허 속에서 재건되는 도시 상황에 따라 이사를 다니기도 여러 번이나, 그보다도 우리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이 이층장도 어머니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왔다. 미국에 와서도 40여년동안 이사를 여섯번이나 하며 옮겨왔다.
이 속에는 아직도 어머니가 생전 즐겨 입으시던 본견 겨울 한복들과 여름 흰 모시 적삼과 깨끼 옥색 치마가 들어있다. 아끼느라 다 신지 못한 진솔 버선 몇켤레, 수놓인 일제 양산, 수달피 숄이 좀약과 함께 고이 잠자고 있다. 험난한 세월을 견뎌오며 낡아서 칠이 좀 벗겨지고 장식도 부식되어 반짝이는 빛을 잃고 쪽이 떨어져나간 부분도 있다.
이 이층장 전면은 밋밋한 널빤지를 사용하지 않고 작은 졸대로 입체감 있게 모자이크 되어있다. 아래층 두쪽 문에는 자개 공예로 큰 화병에 매화가 탐스레 꽃혀있고 한 마리 새는 가지 끝에 않고 또 한마리 새는 막 날아드는 화조도가 있다. 역시 자개 무늬로 이 화조도를 싸고 있는 가느다란 실금의 사각 둘레에는 네 모서리에 태극 문양이 있다.
이층 네 쪽 문에 붙어있는 거울에는 아래쪽에 대나무가 조각되어 있고 위쪽에 동전 크기의 볼록거울이 맑은 달처럼 떠있다. 거울의 위는 자개로 두마리의 봉황이 아치형으로 마주보게 새겨져있다. 섬세하고 오밀조밀한 짜임새 있는 모습이 당시에도 드물었을 장인의 세련된 솜씨를 짐작케 한다. 실제로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한국의 고가구 시장을 둘러보니 요즘 새로 만든 고가구는 화려한 반면, 진품의 옛날 고가구는 단순한 디자인이 많고 이것처럼 아름다운 자태와 매무새를 갖춘 것은 찾기 힘들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만 해도 이 장은 실용적인 쓰임새로만 취급되었다.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시고 나서, 작은 집으로 이사하여 옮기고 보니 어머니 방이 없어지고 이 장롱을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거실에 두기도, 서재에 두기도 모양새가 어정쩡했다. 어머니 평생에 셀 수 없는 수많은 손길이 이 장에 스치고 닿았을 것을 생각하니 선뜻 없앨 수도 없어 안방에 들여놓았다. 아래층엔 어머니 유품이 들어있고, 이층에 겨울 옷을 넣고 쓰니 쓰임새가 퍽 좋다. 안쪽에 칸막이가 없는 궤 모양이라 부피가 큰 겨울 옷들이 꽤 많이 들어간다.
이 장롱이 한 세기를 살아내어 나이가 백수에 달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늙어서 낡고 빛 바랜 고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홀연히 눈이 밝아져 그 바랜 빛이 고색 창연한 은은함으로 새롭게 다가든다.
그 옛날 한 때는 이 장롱이 안방에 놓여있음에 상당한 고가의 알찬 살림살이로 어머니 어깨를 으쓱하게 했을 터다. 이제 이 장롱은 장수하신 어머니의 전설같은 한 평생을 함께 살아내고, 애지중지하던 주인을 잃고도 아직 건재하며, 그 가치가 날이 갈수록 더하고 있다. 이 장을 만든 장인도 세상을 등진 지 반세기는 지났을 게다. 허나 장인의 정성과 혼이 담긴 예술품은 장수하며 이렇게 사랑받고 있다. 이제부터는 이 이층장을 더 이상 고물 취급하지 말고 골동품 격에 맞게 곱고 소중하게 다루어야겠다.
바라기는 내 노년의 삶도 이 이층장 같을 수 있을까? 긴 세월의 옷을 입은고로 백통장식이 반짝이는 빛을 잃었고, 어느 부분 쪽이 떨어져나가기도 했고, 나무는 바짝 말라 가벼워져서 무거운 것을 담을 수 없이 사그랑거린다. 생각 없이 언뜻 보면 없애도 좋을 빛바랜 고물이지만 격을 갖춘 심미안으로 보면 그윽한 예스러움으로 골동품의 보배가 된다. 실질적인 쓸모가 아니더라도 존재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
다짐하건대, 비록 빛나던 육체의 젊음은 날로 멀어져 가더라도 해묵은 세월이 건네준 관조, 초월, 사랑, 비움을 더욱 꼭 붙잡고 시시로 실천하며 마음 근육을 키우도록 노력해야겠다.
첫댓글 카페가입을 원하시는데 국내 전화번호가 없어 쉽지가 않다고 하십니다.
저도 방법을 몰라 난감해서 울산지역 신문에 실린 민유자선생님의 작품만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