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더 살겠다고
kch_35@hanmail.net강철수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 아내를 깨운다.
“잘 잤소?”
허벅지를 토닥토닥 두드리고 장딴지를 자근자근 주물러도 한밤중이다.
“오늘도 35도래!”
발목을 좌우로 돌리고 발가락을 하나씩 잡아빼니 그제야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야?”
밖으로 나갔다. 허리 보정 플라스틱 갑옷을 입은 아내는 아장걸음이고, 그 뒤를 따르는 나는 뒷짐 진 양반걸음이다. 놀이터를 지나 공원을 반쯤 돌아 집으로 오면 대략 이천사오백 보 걷는 셈이었다. 한데, 그날은 아내가 공원 쪽이 아닌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아닌가. 방향을 잊었는가 싶어 손목을 잡아끌었더니 홱 뿌리치며 “당신이나 갔다 와요!” 쇳소리였다. 허허, 이럴 수가.
팔십 대 중반인 아내는 시난고난 몸이 좋지 않다. 심장병을 비롯한 두어 가지 약을 먹지만 당뇨도 없을뿐더러 혈압도 정상이다. 그런데도 비실비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끝 무렵에 대상포진으로 생고생하고부터는 더더욱 맥을 못 춘다. 치통(齒痛)에 버금간다는 대상포진, 아들이 있는 대학병원에서 진료받고 며칠만이라도 입원해서 집중 치료받았더라면 한두 주일 만에 거뜬하지 않았을까. 의사 직계가족에게는 대폭적인 할인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쩌자고 동네 의원으로 달려갔을까. 두어 달의 죽을 고생은 자업자득이니 하소연할 곳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 또 그 의원의 오진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등짝이 당긴다 했더니 의사가 옆구리를 툭 치면서 아프냐고 하더란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바로 신우신염이라며 항생제 처방을 내렸다고 했다. 원래 비뇨기과 소관인 그 병을 내과의원에서 진료받은 게 잘못이었다. 장터처럼 붐비는 그곳에서 기초적인 소변 검사조차 없이 내린 진단, 두 주일 가까이 처방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자 아들이 있는 대학병원을 알아보라 했다.
예약했으니 내일 오전에 오시면 된다는 아들의 답신, 내가 다시 문자를 띄웠다. ‘무슨 꼬투리든 잡아서 어머니를 이삼 일간 입원시켜라. 이번 기회에 검사라는 검사는 모두 다 받아서 시난고난 맥을 못 추는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부자간에는 척척 죽이 맞았다. 아내가 큰 병원에서 종합 검사를 받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나는 매년 그곳에서 종합검진을 받지만, 아내는 가족들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년에 한 번인 건보공단의 무료 검진을 집 근처에서 받기 때문이다.
의사가 겁을 좀 주었을까. 준비도 없이 간 아내가 순순히 입원에 응했다고 했다. 2박 3일 동안 MRI, CT, 초음파 검사 등등으로 샅샅이 뒤졌지만 ‘이거다!’ 싶은 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등짝이 당긴 건 척추 꼬리뼈에 실금이 갔기 때문이라며 두어 달 정도 예의 그 플라스틱 갑옷을 입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했단다. 비뇨기과 의사가 신우신염은 어림도 없는 얘기라며 크게 웃더라지 않는가.
아들과 내가 내린 결론은 ‘운동 부족’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삼 년여를 집안에 갇혀있던 데다 근래에는 차를 없애면서 수영장에도 못 가지 않았는가, 쉽게 할 수 있는 걷기운동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의사들이 걷는 게 좋다고 해서인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천 오륙백 보 정도로 시작해 조금씩 늘려 천 팔백 보 정도에서 한참 머물다가 최근에야 이천사오백 걸음까지 올라갔다. 삼천 보까지 올려서 하체 근육이 되살아났다 싶으면 집 뒤 정발산 맨발걷기 코스로 데려갈 참이었다. 한데, 내 손을 홱 뿌리치며 파투를 내 버리는 게 아닌가. 돌팔매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새 들인 공이 얼만데…. 정수리에 뿔이 돋았다.
작심삼일, 병원 문을 나서면서 먹었던 마음이 채 열흘도 못 가 풍비박산된 꼴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 비장한 말을 꿍얼거리지 않았을까. ‘얼마나 더 살겠다고!’, 새벽 단잠을 깻박치고 목줄 매인 강아지처럼 영감에게 끌려다녀야 한단 말인가 싶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 그 말은 가히 핵폭탄급 위력을 가졌다. 그 꿍얼거림이 입 밖으로 새어나올라치면 우리 식구들은 하나같이 죽은 듯이 납작 엎드린다. 거기에는 이별의 서늘함이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화가 나도 밥상은 차려야 했다. 웬걸, 밥솥이 비어 있지 않은가. 아내더러 밥쌀을 내어 달라했다. 부엌살림 전체를 내가 맡았지만, 핵심인 쌀뒤주만은 아내의 몫으로 남겼었다. 부엌은 여전히 자신의 영토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을 차리는 중에 안방에서 잔기침 소리가 연이었다. 얼른 따끈한 물을 갖고 들어갔다.
“괜찮아?”,
“응, 기침이 좀.”
아까 손을 뿌리친 게 미안했던지 목소리가 은근했다. 열은 없었다. 요즘 코로나19와 비슷한 감기가 유행이라는데 참 다행이다 싶었다. 홑이불을 당겨 덮어주노라니 정수리에 돋았던 뿔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병원에 가보시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가 튀어나올지도 몰라서였다.
첫댓글 나이들어선 배우자가 서로 간호인이 되어주어야 한다던데, 선생님께선 몸소 실천하고 계셨네요.
아름다운 석양을 본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_()_
윤승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래춘샘께서도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얼마나 더 사셔야지요. '노트북'이라는 영화처럼 감동적인 노년의 동행하시기를....
어느 정도 나이들어 가면서부터 입에 붙은 말, 얼마나 더 살겠다고...그 말은 어쩌면 .진심이면서도 아닐 수도....
언제나 편들어 주시는 복희샘,
고맙습니다.